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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철기 시인 / 보리차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20.

홍철기 시인 / 보리차

 

 

주전자에 물을 담아

보리 한줌 집어 넣는다

 

그대 심장에도 물이 있어

하고 싶은 말을

한줌 넣어두고 싶다

 

푸른 보리밭 사이

걷다 돌아보며 건넨

함께 하자

알알이 굳건한 말

 

끓어오른 물은 물빛을 잃고

내가 건넨 말의 빛으로 물든다

 

물이 보리차가 되는 시간동안

굳건했던 말이 진하게 우러나

나는 그대로

그대가 된다

 

 


 

 

홍철기 시인 / 의자

 

 

한때는 이 의자도 빛나는 각을 가졌다

 

중심이 흔들릴 때마다 사각사각

시간은 각진사연을 둥글게 깎아냈다

한순간의 선택이 기울어진 길에 놓여졌고

나는 그 마음을 모른척 등진 채 살았다

 

조금 더 깎아내면 마음에 닿을지 몰라

제각각 다른길 걸어와도 아픈 발처럼

모르는 내일이라도 성큼성큼 떠나봤으면

가늘어지는 머리칼이 빠질 때 마다

묵주를 색칠하며 떠나는 밤의 시간은 깊어졌다

 

수시로 저만큼 떨어진 탱자나무에서 바람이 불었고

의자는 가시에 찔린 듯 묵묵히 웅크렸다

더 이상 각을 세우지도 않았고

이제는 내가 다가가 괴어놓은 시간이 늘어갔다

 

흔들릴 때마다 흔들린 자리에 더 마음 가는일

눈앞에서 가늠할 수 없는 햇빛의 각도 뒤로

문을 닫고 떠나는 것들이 많아졌다

 

이제,

빈 의자에 내가 앉는다

 

 


 

 

홍철기 시인 / 길을 묻다

 

 

 나는 때때로 별첨했다 머리맡에선 모하비 사막 구석으로 몰려다니던 마른 당나무풀이 자라나 불면이고 발끝에선 우기를 맞은 세렝게티 초원이 꿈처럼 범람했다 밤새 나에게 붙여진 각주를 찾아 떠났다 해독할 수 없는 해설로 길은 자주 갈림길에 섰다 서 있는 길마다 비가 내렸고 젖은 생각이 무거워 종종 지도를 놓쳤다 낙타의 혀로 감아올리는 노을을 등 뒤에 두고 고개 숙인 시간은 계절을 몰고 왔다 나는 사막의 모래를 만지듯 상처의 기억을 쓰다듬지 않았다 그해 여름, 어깨에 난 상처가 흉터로 남았다 건기의 모하비 사막과 우기의 세렝게티 초원처럼 마르고 범람하던 시절 뜨거운 흉터 사이로 그대가 떠나갔다 먼저 간 발자국을 더듬던 그 계절엔 걸음마다 지워졌다

 

 


 

 

홍철기 시인 / 믹스커피를 마시다

 

 

오늘 하루

중간중간 마음이 울컥거려

제대로 섞이지 못한 관계는

종이컵 위에서 거품으로 태어나요

지금, 우리 관계는

거품 위 거품 속

어디쯤일까요

 

그대는 가라앉기 전

저어줘야 향기가 나고

나는 지금,

싸구려 향기를 버리고 싶죠

미지근하게 전해지는 나른한 하루란

몸과 마음이 제각각일 때 나는 맛

 

믹스란 나와당신을 섞는일

커피는 우리를 위해 준비된 하루

이 둘을 합쳐 현재를 마셔요

 

국경 넘어 입학을 준비 중인

아라비카와 모카 형제를 위해

혀끝으로 전하는 안부

후하고 불면

남는건 미처 다 스며들지 못해

언젠가 드러날 유혹

 

이제, 그만

떠날 준비 되셨나요

 

 


 

홍철기 시인

1974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2012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7년 《시와 표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파프리카를 먹는 카프카』. 문학동인Volume 회원. 현재 군산시청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