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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광 시인 / 소리지옥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22.

이영광 시인 / 소리지옥

 

 

이, 천년 전의 마야 인형은

마른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웅크려 울고 있다

 

들어서는 안 될 소리가 파고 들어온다, 어쩌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던 자세가 몸부림친다

저렇게 산채로 굳었으리라

 

소리는 이미 돌 속에 단단히 스며들었는데

소리는 몸을 깨뜨리고 찢고 電氣처럼 우는데

어쩌면 그것은 원래 몸속에서 나타났던 것이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세상 밖에서 홀연 들려오던 것인데

 

이 천년의 돌사람은 아직도

어딘가로 숨으려는 듯 웅크리고 있다

 

천지에 가득한 울음 들어오지 말라는 듯,

그러나 다시 보면

그 소리 절대로 내보내지 않으려는 듯

결사적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울고 있다.

소리 내지 않고, 죽지도 않고

 

 


 

 

이영광 시인 / 폭풍이 오면

 

 

내 가장 소중한 것이 세상 가장 흉측한 것들에게 찢기고

시달리는 꿈에 쫓겼다

내 가장 소중한 것이 내 가장 흉측한 것에게 찢기고 시달리는 망상을

모르고

 

사랑은 감히,

멀다

 

폭풍이 오면, 들판에 선다

폭풍이 오기만 하면 들판에 혼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幻覺처럼, 들판에 선다, 나에게만 발견되는 너의

幻覺처럼

 

들판에, 들판의 들판에

들판의 멀어지는 한 점 들판에

 

나는 오래 죄 없는 벌을 몰랐지만

지금은 감히,

벌 없는 죄를 모른다

 


 

이영광 시인 / 사실은

 

 

비 오는 날 찻집에 혼자 앉아 있어봐도

별로 쓸쓸하지도 않다는 것

쓸쓸한 척을 들킬 진짜 쓸쓸이 없다는 것

책을 읽고 있지만 사실은

열중하지도 않는다는 것

술집으로 옮겨 낮술을 마셔보지만

환자가 오만상 쓰며 약을 먹듯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

글을 쓴다지만 사실은 꼭 할 말이 있지도

않다는 것, 사실은 꼭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지도 않는다는 것, 하루 종일

섹스 생각 돈 생각만 나기도 한다는 것

글쟁이도 선생도 아니라는 것

무언지 몰라 잠시 이것들이라는 것

가장 확실한 살아 있다는 느낌이 사실은,

살아 있지 않다는 느낌이라는 것

거의 살아 있다는 것

물속에서 오줌을 누듯

빗속에서 눈물을 훔치듯

희망이란 좀체 입 밖에 내질 않는데도

아픈 시간들은 그걸 온통 썩게 하고

썩은 시간들은 다시 그걸 낱낱이 아프게 한다

 

 


 

 

이영광 시인 / 조금 전 조금 뒤

 

 

돈하고 별 인연 없는 나도 전에 어쩌다

빚 받으러 간 적 있다

조금 전에 이사 갔는데요

 

아버지 위중하단 전화 받고 내달렸는데

조금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조금 전을 이겨본 적이 없다

준비물을 잊어먹고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학교로 뛰어가는 아이처럼

땀 흘려, 조금 전에 지각하곤 했다

 

흉하게 일그러지는 네 우는 얼굴에

지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조금 전에게 지면 늘

조금 뒤가 온다

 

빚쟁이가 먼 데로 숨었듯이

아버지가 몸밖에 없었듯이

응, 이제 괜찮아, 정말 괜찮아,

 

태연히 웃는 얼굴,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은

조금 뒤가 온다

 

 


 

 

이영광 시인 / 수화

 

 

드디어 몸은 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슬픔임을 나는 안다

손끝에서 실타래처럼 엉켰다가

다시 풀리는 말

두 손을 포갰다가 뒤집고

구부려 얼굴을 만졌다가

가슴을 치는 말

나는 언제나 저 들리지 않는 몸의 말에 무릎 꿇어왔다

터질 듯 입 다문 마음이 있어

대화를 포기하고

몸속으로 들어가 돌아눕는 말

몸은 이제 몸으로도 말하지 않는다

변명은 끝났다, 나는

갈라지고 끊어진 발음으로 새어나오지 않는 슬픔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몸을 쥐어짜서 마음의 눈빛들을 뽑아내고 싶은 자

마음을 쥐어짜서 붉은 혀의 목청을 꺼내고 싶은 자

울지 않는 슬픔은 믿을 수 없다

나는 언제나 저 발설되지 않는 몸의 말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도 귀로 듣지 못했다

내 심문이 불러내던 내 모든 수화들을

수화 속에 숨은 찢긴 마음,

자백이라곤 모르는

금간 진실들을

 

-시집 <아픈 천국>에서

 

 


 

 

이영광 시인 / 의자

 

 

앉아 있는 사람의 몸 아래에

어느새 먼저 와서

앉아 있는 사람

 

의자는 먼 곳에서 쉼없는 네 발로

삐걱삐걱 걸어 여기 왔다

 

의자의 이데아는

마르고 저리고 구부정한 몸을 한

늙은 신일 것이다

 

-시집 <아픈 천국>에서

 

 


 

이영광 시인

1967년 경북 의성 출생. 고려대 영문과 및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빙폭〉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 『끝없는 사람』 『해를 오래 바라보았다』가 있음. 2008년 제8회 노작문학상, 2011년 제11회 지훈상, 2011년 미당문학상 수상,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