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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 시인 / 소리지옥
이, 천년 전의 마야 인형은 마른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웅크려 울고 있다
들어서는 안 될 소리가 파고 들어온다, 어쩌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던 자세가 몸부림친다 저렇게 산채로 굳었으리라
소리는 이미 돌 속에 단단히 스며들었는데 소리는 몸을 깨뜨리고 찢고 電氣처럼 우는데 어쩌면 그것은 원래 몸속에서 나타났던 것이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세상 밖에서 홀연 들려오던 것인데
이 천년의 돌사람은 아직도 어딘가로 숨으려는 듯 웅크리고 있다
천지에 가득한 울음 들어오지 말라는 듯, 그러나 다시 보면 그 소리 절대로 내보내지 않으려는 듯 결사적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울고 있다. 소리 내지 않고, 죽지도 않고
이영광 시인 / 폭풍이 오면
내 가장 소중한 것이 세상 가장 흉측한 것들에게 찢기고 시달리는 꿈에 쫓겼다 내 가장 소중한 것이 내 가장 흉측한 것에게 찢기고 시달리는 망상을 모르고
사랑은 감히, 멀다
폭풍이 오면, 들판에 선다 폭풍이 오기만 하면 들판에 혼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幻覺처럼, 들판에 선다, 나에게만 발견되는 너의 幻覺처럼
들판에, 들판의 들판에 들판의 멀어지는 한 점 들판에
나는 오래 죄 없는 벌을 몰랐지만 지금은 감히, 벌 없는 죄를 모른다
이영광 시인 / 사실은
비 오는 날 찻집에 혼자 앉아 있어봐도 별로 쓸쓸하지도 않다는 것 쓸쓸한 척을 들킬 진짜 쓸쓸이 없다는 것 책을 읽고 있지만 사실은 열중하지도 않는다는 것 술집으로 옮겨 낮술을 마셔보지만 환자가 오만상 쓰며 약을 먹듯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 글을 쓴다지만 사실은 꼭 할 말이 있지도 않다는 것, 사실은 꼭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지도 않는다는 것, 하루 종일 섹스 생각 돈 생각만 나기도 한다는 것 글쟁이도 선생도 아니라는 것 무언지 몰라 잠시 이것들이라는 것 가장 확실한 살아 있다는 느낌이 사실은, 살아 있지 않다는 느낌이라는 것 거의 살아 있다는 것 물속에서 오줌을 누듯 빗속에서 눈물을 훔치듯 희망이란 좀체 입 밖에 내질 않는데도 아픈 시간들은 그걸 온통 썩게 하고 썩은 시간들은 다시 그걸 낱낱이 아프게 한다
이영광 시인 / 조금 전 조금 뒤
돈하고 별 인연 없는 나도 전에 어쩌다 빚 받으러 간 적 있다 조금 전에 이사 갔는데요
아버지 위중하단 전화 받고 내달렸는데 조금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조금 전을 이겨본 적이 없다 준비물을 잊어먹고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학교로 뛰어가는 아이처럼 땀 흘려, 조금 전에 지각하곤 했다
흉하게 일그러지는 네 우는 얼굴에 지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조금 전에게 지면 늘 조금 뒤가 온다
빚쟁이가 먼 데로 숨었듯이 아버지가 몸밖에 없었듯이 응, 이제 괜찮아, 정말 괜찮아,
태연히 웃는 얼굴,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은 조금 뒤가 온다
이영광 시인 / 수화
드디어 몸은 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슬픔임을 나는 안다 손끝에서 실타래처럼 엉켰다가 다시 풀리는 말 두 손을 포갰다가 뒤집고 구부려 얼굴을 만졌다가 가슴을 치는 말 나는 언제나 저 들리지 않는 몸의 말에 무릎 꿇어왔다 터질 듯 입 다문 마음이 있어 대화를 포기하고 몸속으로 들어가 돌아눕는 말 몸은 이제 몸으로도 말하지 않는다 변명은 끝났다, 나는 갈라지고 끊어진 발음으로 새어나오지 않는 슬픔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몸을 쥐어짜서 마음의 눈빛들을 뽑아내고 싶은 자 마음을 쥐어짜서 붉은 혀의 목청을 꺼내고 싶은 자 울지 않는 슬픔은 믿을 수 없다 나는 언제나 저 발설되지 않는 몸의 말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도 귀로 듣지 못했다 내 심문이 불러내던 내 모든 수화들을 수화 속에 숨은 찢긴 마음, 자백이라곤 모르는 금간 진실들을
-시집 <아픈 천국>에서
이영광 시인 / 의자
앉아 있는 사람의 몸 아래에 어느새 먼저 와서 앉아 있는 사람
의자는 먼 곳에서 쉼없는 네 발로 삐걱삐걱 걸어 여기 왔다
의자의 이데아는 마르고 저리고 구부정한 몸을 한 늙은 신일 것이다
-시집 <아픈 천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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