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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춘석 시인 / 음악성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23.

박춘석 시인 / 음악성

 

 몇 음절 남은 음악으로 땅을 딛었던 사람 몸이 허공으로 들리려다 오래된 세포처럼 떨어졌다 날개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한 발씩 공중에 떠야 걸을 수 있다 어제까지의 사람이 세포로 떨어지며 수명을 다해 걸음을 옮겨보려는 사람과 죽을 맛인 사람이 서로 교차했다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일을 도모하고 걸음을 옮겨 평지를 걷고 있지만 평지는 얼마만큼의 위일까 음악의 높낮이 차이가 확연했다

 그 동안 반올림 위를 걸었던 것이다

 가라앉아 세워둔 악기 같은 몇 날, 물결 없는 호수 같기도 해서 움직이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고 바람 불어 잔물결 감각도 힘겨웠다

 ‘당신이 고요해서 돌을 던지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음이었다고 단언합니다. 그때 당신 물결이.’

 ‘나는 악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 연주하듯이 살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충분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호수는 물론 아닙니다. 당신이 돌을 던져서 흐르던 그 음악은 계절처럼 연주가 끝났습니다.’

 길게 계속되던 노래가 뚝 끊어져 연주할 수 없는 피아노처럼 발이 고요히 있고 싶어 한다 죽음인가 음악의 물성을 아는 순간이다 절망했구나

 발은 몸인지 마음인지 모를 곳, 걸음을 감미롭게 끌어올리는 허공, 공기와 걸음을 떼는 것 사이 표면을 깨트리면서 소리가 났고 깊숙한 곳에서 나갈 수 있었다 묵묵히 걷다보니 저녁 어스름이 추구해온 방향처럼 땅위로 솟아오르곤 했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니요. 나는 정신으로 납니다. 잉크를 따라 음악이 흘러갑니다. 오늘은 잉크가 굳어 있습니다. 죽음을 설명할 수 없지만 어둠은 무겁습니다. 내일 해는 얼마나 높이 떠오를까요. 슬픔과 좌절에도 음악이 개입해야 눈물을 흘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을 수 있습니다. 커피 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낭만적인 음악이 빡빡한 생을 가를까요?

 누군가 긴 편지를 보냈는데 짧게 답장했다

 ‘가끔 너를 생각했어. 오늘에서야 펜 끝에 음표가 자랐어.’

​​

-웹진 『시인광장』 2025년 5월호 발표

 

 


 

 

박춘석 시인 / 행복해지고 있습니다

 

 

 발걸음 소리 촘촘하게 하늘을 울려 퍼지도록 불러 모았습니다 발걸음 소리는 광장 위에 가득하여 합창을 합니다 모일수록 더욱 웅장하여 노래 소리는 백 명 이백 명 천 명 아, 수를 헤아리는 일이 무의미한 나의 화음입니다 벽돌 한 개, 벽돌 두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우뚝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건축물이든 사람이든 꺼낸 만큼 나는 길 위로 옮겨져서 혼자서 듣는 노래 같기도 합니다 때로는 혼자서 보는 그림 같기도 합니다 아직 젊군요 아이들이 많이 컸지요 결혼을 일찍했습니다 나이는 얼마 안 됩니다 나는 키가 느리게 자라는 차별이 있습니다 비는 같은 날 평등하게 내려 전 세계의 산을 적시고 전 세계의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히 평등하게 덮여 있고 세계의 초목이 나란히 비를 맞았습니다 성질이 달라 키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큰 나무 작은 나무 중에 나는 작은 나무입니다 같은 구름 아래서 같은 비를 같은 날 맞고도 기근이 다르고 모습이 다르고 일조량이 작은 나는 가을입니다 아니 가을꽃입니다 구름은 평등하고 비는 평등하고 나무는 독자적이고 나는 또 나대로 키가 작아 독자적입니다 그러므로 늦었지만 자라는 걸 멈출 줄 모릅니다 비는 여러 번 내렸고 나는 여러 번 차이를 겪었습니다 여러 번 보라색 꽃을 피웠습니다 일조량이 작은 탓이 아니라 독자적인 약간 어두운 보라색 꽃입니다 피었다 지는 반복 속에 어느 해 가을과 어느 해 가을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가을의 태도 보라색의 태도에 너무 진지해서 색깔이 짙어지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좀 여유가 없어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각오한 삶이었습니다 보라색 꽃을 키우는 나무둥치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행복과 상관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한 편 그것이 행복과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꽃 자체가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람 불어 흔들리는 나무가 춤추는 듯이 보입니다 행복 다음에 졸음이 오는 상황까지는 아닙니다 고통도 맛이라는 사실까지 왔습니다 꽃이 질 때 내가 소로로 잠이 든다면 그 무수한 걸음들의 한 잎 아름다운 낙하 그곳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만

 

 


 

 

박춘석 시인 / 백조의 불안

 

 

 물밑의 발은 암굴왕입니다 오리의 무리 속에서 오리로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오리였습니다 물밑의 잠재된 발이 하얀 새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사이 밤이 왔습니다 하얀 새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졌습니다 많은 오리 들 속에 한 마리로 섞였습니다

 

 오리가 무엇을 초월할 수 있을까요

 

 잠재적인 백조와 오리 사이에 단절은 없었습니다 물밭의 발이 계속 백조를 찾고 있었으니

 

 오리가 조금 컸을 뿐입니다 뒤바뀔 때도 있었습니다만

 

 오리와 백조는 흐린 날과 화창한 날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백조의 마음, 어제는 오리의 행동, 나는 순환합니다

 

 혼자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백조'라고 불렀습니다 '아! 오늘은’

 

 재불거리는 발놀림은 지루하게 계속되었습니다 발놀림이 성장할 때마다 방향이 선명해져 갔습니다

 

 오늘은 날이 흐려 백조가 희미합니다 오리에게로 간 것은 아닌지 '오래 지루하게 물밑에서 재불거리던 발은 하루쯤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태양에게 왈츠풍의 밝은 빛을 선물 받았을까요 암굴왕의 감정은 경쾌합니다 그러나 내일부터 겨울비가 온다고 합니다

 

 흐리고 비가 오니 이 호수에는 백조가 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그 이야기는 단편적입니다 오리 무리 속에 한 마리 백조라니요 그렇게 쉬울라구요 그 하얀 새를 닮아갈 뿐입니다

 

 백조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발놀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어제는 바람이 불어 물이 흔들렸습니다 감정이 급격히 호수 아래로 떨어져서 발을 담근 물속이 차가웠습니다 내일도 날이 흐리다고 합니다

 

 '너는 염결성이 너무 강해 가외의 길이라는 것도 있는 법인데.' 당신이 해준 말입니다만 어제 오리가 나를 방문했습니다 아직 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체로 맑습니다 개인의 날씨는 누가 관장하는지 알 수 없지만 백조를 향해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원 풍경이 호수를 지나고 미풍이 불고 서정적인 발놀림입니다 저 둥근 호수를 건너면 백조가 있다고 합니다

 

 오리 무리 속에서 이방의 오리, 오리 내부에 어떤 다툼이 있는 걸까요 어머니는 늘 나를 미워하고 형제들과 함께 있어도 외롭고 나는 오리 내부로부터 밀려났습니다

 

 오리와 백조를 가득 메운 발자국들 무수히 떠내려가고도 물 위에 화석이 된 발자국들 하얀 백조보다 발자국이 더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평면의 물 위, 어느 쪽으로 가든 둥글기만 한 호수, 둥근 물길이 끝이 있을 리 없고 이제 그만 평화롭고 싶습니다

 

 잠깨고 나면 거울 속에 오리가 상으로 맺혀 있다면

 

 오리를 떠나온 세계가 호수였다면 백조를 향해가는 세계가 호수였다면

 

 영원히 평면일 것 같고 잠들기 적당한 호수에 넘어야 할 갈등이 있는 듯 안개가 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몰아칩니다 그러나 이내 물 표면의 고즈넉함은 같은 자리를 느끼게 합니다 싸워야 할 대상이 없는 듯합니다

 

 호수에 백조가 살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은 잴 수 없는 수면의 깊이와 고즈넉한 역사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한 번도 발놀림을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리이고 백조인 호수, 서로 같은 세계에 살며 다른 모습을 구하여 오리인지 백조인지 구분이 안 되는 발놀림 위에 꿈인 듯 백조가 아! 하얀 새가

 

- 월간 《현대시》 2022년 3월호

 

 


 

 

박춘석 시인 / 내면적 평면*

 

 

 나는 저쪽, 계절 반대쪽에서 왔다 내가 살았던 지하창고는 측량할 수 없이 깊었고 헤아릴 수 없는 날을 계단을 올랐다 평면은 계단 맨 위쪽, 햇살이 편편하게 내리는 곳에 있었다 나선형 계단이었다 계단을 타고 오르다 어둠에 발소리를 묻으며 쉬기도 했다 빛이 없는 곳일수록 나의 모양은 단단해졌고 먼지처럼 작은 입자도 흩어지지 않았다

 

 지하와 계단이 숨겨진 이면처럼 고요히 따라왔다 같은 공간을 빙글빙글 돌며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창문 가까이 왔을 때 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 빛을 따라 온전한 체를 가진 사람을 찾아 나섰다

 

 계단을 한참 오르다 보니 창문이 보이고 바깥 빛이 몇 줄기 창을 뚫고 들어왔다 계단에 놓인 화분이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측량되지 않는 어두운 지하는 앞장서 걷고 나란히 걷고 뒤따라 걷고 다시 앞장서 걷고 체가 선명하면 동시에 그림자가 피었다 해가 떠서 내 얼굴 반쪽이 보일 때쯤 지하는 어머니처럼 반쪽 얼굴 위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불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고 마비된 듯 잠이 들었다

 

 계단이 넓어지고 밝아져서 평평하게 변해갈 즈음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나타났다 '나'의 긴 행렬이 지구의 계절로 들어 갔다 발아래 한마리 새가 날개짓을 치며 날아올랐다

 

 삶은 평면 위에서만 빛났다

 

 계단을 타고 올라서서야 나는 식물과 동물과 사람이 되었다

 

 마주 앉은 사람이 코를 킁킁거리며 지하를 여기까지 데려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진지한 사람 얼굴을 벗고 약간의 유머가 섞인 얼굴로 아주 긴 지하 계단과 평면 위, 여러 사물을 통과해온 시간을 파도처럼 밀어내며 햇볕과 햇볕의 이면처럼 웃었다

 

*스피노자의 철학적 개념

 

-월간 《현대시≫ 2022년 3월호

 

 


 

 

박춘석 시인 / 시

 

 

 말들이 사는 창고가 많은 것 같아요 창고마다 말이 가득 든 것 같아요 그 모든 말을 죽이지 않고 살렸으면 좋겠어요

 

 문이 한 개고 좁아요 다투지 말고 차례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말들이 앉아 있을 의자, 누워 있을 침대, 걸어갈 길, 말을 마중할 말, 말을 만날 말, 집을 짓는 말, 함께 살 말, 슬픈 노래를 부를 말, 기쁜 노래를 부를 말, 보석처럼 반짝일 말, 쏜살같이 달려갈 말, 쓸쓸한 곳에 당도할 말, 곡진한 삶에 도착할 말, 이별에 당도할 말……

 

 말을 하다 보니 줄줄이 따라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에 있는 일과 바깥에 있는 일이 조우한 것입니다

 

 약속된 시간보다 늦게 문이 열렸습니다

 어제 만난 그 일은 짹짹 그 새소리에 불리어 나갔습니다 나가자 동시에 똑같은 짹짹 하나의 새소리를 냈습니다 한 마리 새소리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일은 왜 나를 찾아왔을까요 왜 그 새를 만나야 했을까요 왜 그 새를 만나야만 안의 새가 깨어날까요 잠은 무엇을 만나기 위한 기약일까요 나는 그때 새장 안에서 눈을 뜨고 잠을 잤고 허공이었는데 땅속에 묻힌 생명처럼 움질움질 문을 열고 싶은 마음을 눌렀습니다

 

 그 일은 바깥에서 활동하는 한 사람. 하나의 일. 한 마리 새.

 

 고통의 욱신거림. 가벼워지는 생명체. 안에 있던 새가 바깥으로 나가고 안에 있던 사람이 바깥으로 나가고 나타나고 그것은 초월이 아니며, 양분된 것이 아니며, 그제야 한 사람입니다 그제야 한 마리 새입니다

 

 끝이 없겠어요 아직 말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노는 창고가 여러 개입니다

 

 


 

 

박춘석 시인 / 눈사람

 

 

 나는 새로 집을 짓기 위해 낡은 건물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더 나은 집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일관되게 차가운 온도와 하얀색을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층에 닿는 무너지는 색깔이 내는 소리였을까요 차가움을 버리는 소리였을까요 궁금했지만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무너뜨리면서 귀가 조금 밝아졌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때 한 가지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에 대한 실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단 한 줄도 기록할 수 없다는 걸 알아갔습니다 눈사람이 눈사람을 녹이지 않고는 눈사람을 떠날 수 없듯이 살고 있는 집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좋은 집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갔습니다

 

 나는 그때 집을 부수는 현장에 있었다기보다 부서지는 집 자체였습니다

 

 몇 차례 굉음이 지나간 후, 눈사람은 중화되어 꽃으로 환생하고 풀로 환생하고 물고기로 환생하고 그러고도 남아서 바다로 갔습니다

 

 눈사람 안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눈사람 안에 어떤 역사성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역사가 시간으로 풀려나올 때에야 꽃으로 가고 바다로 가고 수증기로 갔습니다 눈사람으로 뭉쳐져 있는 동안 눈사람에게 성장의 인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차가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감정은 변하는 것이라서 지금은 눈사람을 허물고 있습니다 겨울이 올 때까지 고요히 숨죽이고 있던 사람이 눈이 오면 나타납니다만 새로운 사람입니다 허물어지기까지가 길었을 뿐 무엇이든 될 수 있어서 달라질 수 있어서 다른 무엇이 되어서 떠나고 있습니다

 

 


 

 

박춘석 시인 / 분자적 새

 

 

 땅은 안심하고 디딜 수 있는 곳이라 했는데 움직였다 집을 짓고 마당에 식물을 심는데 땅이 움직였다 땅은 가만히 있는 게 임무야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어가다 넘어졌다 일어나 걸어가다 또 넘어졌다 일어나 뛰어가다 또 넘어졌다 반복되었는데 흔들림에 익숙해지면서 아이들이 자랐다 나는 땅을 제압하는 여신이나 되는 듯 땅의 문제에 골몰했다

 

 바다를 다녀왔다 배의 땅은 물인데 바람이 잠잠하여 배가 평화로워 보였다 선장은 바람이 불면 나른함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마음이 참 부조리합니다 땅을 살피던 내가 말했다 고요한 물 위에 배를 정박하기 위해 풍랑 속을 배를 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요한 물 위에 도착하면 배는 구름처럼 흩어집니다 바다에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바람뿐입니다 선장은 배를 몰고 바람 없는 물 위를 떠났다 우주는 모순투성이야 고함 소리는 수평선을 향했지만 바로 앞에서 분해되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람 불면 땅이 공중에 뿌옇게 펼쳐지는 일이었다 눈, 깃털, 부리, 발톱이 분별없이 그러나 아이들을 넘어뜨리고 집을 움직였지만 날아가는 곳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나는 끝없는 잠에서 깨어나 아무런 움직임도 발생하지 않는 쪽으로 가려는 듯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고요함 밖에 없었다

 

 마당에 파 놓은 연못을 들여다보니 물이 맑아 사물이 가득했다 아이들이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할 텐데 괴물이 일어나 나올지 모르니 아주 큰 새가 모이겠군

 

 먼지로 모인 것이 땅이라고 당신이 말했다 결속력이 부족합니다 모래가 많이 섞인 땅이 아닐까요 모래가 섞였다면 중력이라도 더 하겠지요 내내 인내하다 무거움을 번쩍 들어 올리는 봄이 오면 더욱 움직이는 땅을 무엇으로 극복할까요 당신이 옆에 있었지만 답을 원하지는 않았다

 

 


 

 

박춘석 시인 / 창조

 

 

아침에 자고나면 눈 코 입이 없어요.

하루의 길이만한 도르르 말린 하얀 종이 위에

이목구비가 없는 흙덩이가 올려져 있어요.

날숨 같은 그림자를 뒤에 늘어뜨리고

들숨 같은 발걸음을 옮겨 흙덩이로 하루살이 세상을 만들죠.

 

장거리 선수가 길을 그리는 것과 닮아 있고

건축가가 집을 짓는 것과 닮아 있죠.

매일 아침 흙으로 되돌아온 내가

흙으로 되돌아 온 세상을 주물럭주물럭 발을 옮겨 빚죠.

 

생은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물감을 마저 써내는 일이죠.

나의 얼굴은 하루 이상 보존되지 않아 발을 옮겨가는 유목민이 되었죠.

목숨을 갖가지 색의 물감으로 사용했어요.

미완성의 그림을 위하여 나는 아직 젊고 색색의 물감은 넉넉하게 남아 있죠.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입체적인 하루가 될 것 같아요.

낱낱의 오늘들이 땅을 재연하여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여러 종의 사물들이 들어와 살고 있어요.

 

나의 종말은 나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

마지막 창조물을 위해 남겨진 물감을 꾹꾹 찍으며 발걸음 옮겨가고 있어요.

 

어릴 때 꿈꿔온 미래를 향해 길을 잘 찾아 왔어요.

시인이 되었어요.

 

 


 

 

박춘석 시인 / 경계에 관한 짧은 이야기

 

불륜

통행금지 구역,<여기서부터 길이 아닙니다>라는

푯말 앞에서 두 남녀가

그 푯말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월

네살박이 딸아이가 흘러

소녀로 건너오는 동안 거울 밖의 내가

거울 속의 나를 낯설어 하는 날이 찾아왔다.

 

죽음

喪家 집에는 죽은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그가 사라진 쪽을 가리키는 조등 하나 노랗게 떠 있었다.

 

환생

계절이 가고 오는 길목에

작년에 진 꽃이 다시 피면서

화들짝 환생의 기적을 재연하고 있었다.

 

새 한 마리 하늘을 날다

옛 고가의 담을 넘어갔다.

과거와 현재가 합성되는 순간이었다.

 

 


 

박춘석 시인

경북 안동 출생. 2002년 《시안》을 통해 등단. 시집 『나는 누구십니까?』 『나는 광장으로 모였다』 『장미의 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