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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임 시인 / 여행자
매창이 정인을 잃고 찾았다는 개암사, 공중엔 산기슭을 벗어난 새들의 발자국이 현악기처럼 걸려 있다 가슴에 품은 수만 개 나뭇잎을 꺼내는 걸까 개암사를 향한 오솔길로 바람소리 수런거리고 여자의 어깨 위에서 진물 같은 달빛이 흐른다 더 이상 피울 꽃이 없는 이름 몰래몰래 늙어 간 봄처럼 기다리던 것들이 스스로 주저앉는지 세월이 갇힌 비문의 얼굴이 점점 흐려지고 영원한 것은 영원히 없어 뒤돌아본 시간은 텅 빈 악보처럼 소리의 흰 물결만 일렁일 뿐 한 때의 꽃잎들은 내가 죽은 뒤에 태어난 시(詩)였을까 이화우 흩뿌릴제* 땅속에 묻어버린 이 노래는, 나는 왜 여기 있을까 죽은 사람의 노래는 연주할 수 없어 입 속에 감추어진 혀같이 붉디붉은 슬픔 등을 굽힌 여자의 활이 울음을 삼키는 동안 새들은 가고 투명한 허공을 빗금 그으며 지나간다
*매창의 시
김정임 시인 / 사슴이 건너오는 동안
점술가는 십이궁 모양으로 타로 카드를 펼쳤다 눈을 감싼 흑점이 세상 밖으로 밀어낸 신의 손자국처럼 깊다
인간을 신에게 데리고 간다는 알타이 사슴이 떠올랐다 스스로 걸어나오지 못하는 영혼을 데리고 강을 건넌다는데
카드를 섞는 손가락 사이 태양과 달 그림이 언듯 보였다 호피 인디언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 서 남 북 네 글자 세상의 길이 엎드려 운명의 카드를 들여다보는데
여자의 입술에서 새 나올 예언의 길옆에 앉아 내 외로운 발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가운데 카드를 뽑자 수레바퀴 그림이 나왔다 돌아간 것은 돌아온다는 점괘요
누군가 내 안에서 감았던 눈을 뜨는 기척이다 여기에 없는 나의 거처가 되어 떠다니고 있다는 말 가난한 사냥꾼의 아내로 살다가 오래전 떠난 사람이 나라는 것을 눈물을 훔치던 그 밤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냄새
수레바퀴 그림을 보여 주자 사슴은 점술가의 흑점 속으로 사라졌다
김정임 시인 / 불면 오늘밤은 이천년 전 가여워서 멋진 남자에게 가 봐야겠다
사마천 옆에 앉아 먹물 갈아주고 꽃차 한 잔 나눠 마시게 세월이 별 건가 천년이 백년이고 세평 방이 천하인 것을 장강에 지는 꽃잎 얻어 타고 황해에 이르면 새벽이 오겠네 ㅡ 새여울 시집 중에서
김정임 시인 / 봄날 만어사에서
4월 만어사 마당에 서 있었는데요 녹엽이 짙게 물든 산에서 큰 바윗덩이 우레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오고 있었는데요 누군가 바윗돌이 해산을 하려고 내려온다고 말했는데요 정말 산꼭대기에서 산기를 느낀 그녀가 부풀어 오른 배를 감싸 안으며 계곡을 향햐 내려오고 있었는데요 땀에 젖은 그녀의 신음소리가 위태롭다 생각되었는데 계곡에 도착하기 전에 그만 돌배나무 밑동에 기대어 몸을 풀고 말았는데요 신생의 돌들이 돌게처럼 벌벌 기어서 계곡물 속으로 뛰어드는 소리 들었는데요 절 마당을 서성이던 홍역같은 봄날이 연분홍치마를 펄럭이며 함께 뛰어들었는데요
김정임 시인 / 소라의 집
외포리 뻘밭 소라의 집을 보셨나요 굵은 밧줄 한 개씩 기둥처럼 세워서 수 백 개 다닥다닥 붙은 소라의 빈집들 지금은 선홍빛 노을만 그물질하고 있어요
빈집의 적막이 굴뚝의 연기처럼 피어올라 밀물대신 갯내 나는 뻘밭을 메워가고 있어요 소라의 그물망을 드넓은 바다 어장에 던져두면 호기심 많은 쭈꾸미가 소라의 빈집으로 스며든다 지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능소화빛으로 색칠한 대문을 열고 미로같이 꾸불꾸불한 계단을 내려갔을 테지요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리는 아득하고 속이 깊은 방으로 스며들어 제 꿈을 익히곤 했을 소라의 집
간간이 파도 소리는 열어 둔 창으로 들어 왔다가 꿈의 한 가운데를 현처럼 긋고 나가곤 했겠지요
누군가를 기다리듯 대문 활짝 열어놓은 소라의 빈집이 나를 자꾸만 끌어 당겨요 제 몸을 던져 꿈을 익혀가던 쭈꾸미처럼, 꿈은 꿈꿀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던가요
김정임 시인 / 소나무의 집을 보았다
수타산 중턱에서 커다란 적송 그루터기를 보았다 아직 바닥에 흩어져 있는 송화빛 톱밥이 숲으로 향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이제 소나무는 이백 년의 생애를 밑동에 꾹꾹 눌러 담고 나이테 속으로 사라졌다 마음의 길을 가늘고 촘촘하게 새겨놓고 떠났다 틈 없이 새겨진 나이테의 흔적에서 소나무가 남긴 단단하게 여문 생의 기록을 보는 것 같았다 바람과 햇빛이 수 만 번 다녀간 뒤 나이테의 빗금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소나무는 이제 지상의 집 한 채 완성하러 떠났다 단단하고 굵은 그의 흰 뼈가 사원의 배흘림기둥으로 서서 한 세월의 무게를 오랫동안 받쳐 들 것이다
수타산 중턱 적송 그루터기는 온 숲을 채우기도 하고 다시 비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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