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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연 시인 / 제의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26.

허연 시인 / 제의

 

 

 강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떠나보낼게 많은 사람이다. 폭우 지나간 철제 다리 위로 이국처럼 노을이 진다. 쓰레기봉투 몇 개 떠다니는 몸집 불린 강을 내려다본다. 오늘도 강에선, 누구는 몸을 던졌고 누구는 떠올랐고, 누구는 몇 달도 못갈 사랑을 읊조렸다.

 

 제물은 늘 필요하다. 몇은 이번 장마의 제물이 됐고, 한 겹의 뻘이 되어 하구 모래톱에 쌓였다.

 

 영역 다툼에 지친 물새들 줄지어 지나간 모래톱. 병든 고양이가 다 포기한 듯 졸고 있다. 고양이는 이번 장마의 마지막 제물이 될 것이다. 그에게 지금이 짧은 햇살은 냉정하게 따사로울것이다.

 

 이곳에선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다. 슬픔도 기쁨도 없다. 쓸려갈 것과 남은 것, 그것만이 가능하다. 검은 구름 저편에 속삭이듯 어둠이 온다. 오늘의 제의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떠내려가다 강둑에 멈춰선 컨테이너 조각엔 마지막 낙서가 흐릿하다 새 떼가 날아올랐다

 

 


 

 

허연 시인 /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보이지도 않은 길 끝에서 울었다. 혼자 먹은 저녁만큼 쓸쓸한 밤 내내 나는 망해 가는 늙은 별에서 얼어붙은 구두끈을 묶고 있었다.

 

 부탄가스 하나로 네 시간을 버티어야 해. 되도록 불꽃을 작게 하는 것이 좋아. 어리석게도 빗속을 걸어 들어갔던 밤. 잠결을 걸어와서 가래침을 뱉으면 피가 섞여 나왔다. 어젯밤 통화는 너무 길었고, 안타까운 울음만 기억에 남았고, 나는 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알고 계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

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지대의 나무들은 또 얼마나 흔들리는지.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허연 시인 / 거진

 

 

 당신이 사라진 주홍빛 바다에서 갈매기 떼 울음이 파도와 함께 밀려가 선 오지 않는다. 막 비추기 시작한 등대의 약한 불빛이 훑듯이 나를 지워 버리고 파도 소리는 점점 밤의 전부가 됐다. 밤이 분명한데도 밤은 어디 론가 가버렸고 파도만이 남았다. 밤은 그렇게 파도만을 남겼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내내 파도 위로 가끔 별똥이 떨어졌다. 바스락거던 조개 들의 죽음이 잠시 빛났고 이내 파도에 묻혔다 소식은 없었다. 밤에 생긴 상처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했다 거진.

 

 


 

 

허연 시인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혹 시간이 맞거든 연차를 내고

 시골 성당에 가서 커다란 나무 밑에 앉는 거야.

촛불도 켜고

 

 명란파스타를 먹고 헤어지는 거지.

그날 이후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돌진하는 건 재미없는 게임이야.

잘 생각해. 너는 중독되면 안 돼.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뻔해,

 우리보다 융자받은 집이 더 오래 남을 텐데.

 

 가끔 기도는 할게. 그대의 슬픈 내력이

그대의 생을 엄습하지 않기를, 나보다 그대가

덜 불운하기를, 그대 기록 속에 내가 없기를.

 

 그러니까 다시는 가슴 덜컹하지 말기.

이별의 종류는 너무나 많으니까. 또 생길 거니까.

 

 너무 많은 길을 가리키고 서 있는 표지판과

 너무 많은 방향으로 날아오르는 새들과

 너무 많은 바다로 가는 배들과

 너무 많은 돌멩이들

 

 사랑해. 그렇지만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리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에서

 

 


 

 

허연 시인 / 마지막 비행

 

 

태양에 대해 뭔가 쓴다는 건

어떤 긴 사연들과 대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울고 태양은 뜬다

 

숱한 눈물이 말라서

기체가 되어버린 나방을 안다

 

스스로 타버린 것들

유리한 것이 불리한 것이 될 때까지

날아오른 것들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이 운명을 결정하는 법

 

타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깨끗해지는 하늘

타버린 것들

날아오른 것들

 

태양은 헌신을 받아주지만

답은 해주지 않는다

 

타버린 나방에게만 보였던 세상이 있다

 

 


 

 

허연 시인 / 우울한 고원

 

 

1.

 

“반대편을 볼 수 없어서

이 고원에선 날개가 필수다“

 

결국 A가

기뻐도 기쁘지 않다며 울었을 때

우리는 날아오르기로 했네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던

지난여름

 

남쪽 창문과 북쪽 창문을 번갈아 보다가

 

벽지 무늬를 따라가다 보면

햇살은 어느새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은 채

방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고

 

A가 가라앉았던 그 여름

나는 아프느라 바빠서

내일도 모레도 말해주지 못했네

아프면 순간만 있으니까

 

A의 금붕어와 A의 사과나무와

A의 노래와 그리고

A의 이동

이런 걸 볼 수 없었네

 

2.

 

늘 그 모양인 게 싫어…

그럼 이렇게 하자 A

 

내 자전 속도에 맞춰

A는 반대편으로 날아

그러면 나를 만날 거야

 

시든 이파리 같은 얼굴로

A는 날아올랐네

 

반대편에서 만난 우리는

도착의 놀라움을 안다

놀랍게도 달라질 수 있는 건 없었네

 

3.

 

상승기류는 슬픔을 날려 보내는 게 아니라

슬픔을 스쳐갈 뿐이다

슬픔은 있다

 

우리는 주문을 외운다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상상하기

 

“이젠 이별과 함께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고원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는 운명들이 있었다.

 

 


 

 

허연 시인 / 하얀 당신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죄는 검은데

 네 슬픔은 왜 그렇게 하얗지

 

 드물다는 남녘 강설强雪의 밤. 천천히 지나치는 창밖에 네가 서 있다 모든 게 흘러가는데 너는 이탈한 별처럼 서 있다 선명해지는 너를 지우지 못하고 교차로에 섰다 비상등은 부정맥처럼 깜빡이고 시간은 우리가 살아낸 모든 것들을 도적처럼 빼앗아 갔는데 너는 왜 자꾸만 폭설 내리는 창밖에 하얗게 서 있는지 너는 왜 하얗기만 한지

 

 살아서 말해달라고?

 

 이미 늦었지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재림한 자에게 바쳐졌다는 종탑에 불이 켜졌다

 

 피할 수 없는 날들이여

 아무 일 없는 새들이여

 

 이곳에 다시 눈이 내리려면 20년이 걸린다

 

 


 

 

허연 시인 / 중심에 관해

 

 

중심을 잃는다는 것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회전목마가

꿈과 꿈아닌 것을 모두 싣고

진공으로 사라진다는 것

 

중심이 날 떠날 수도 있다는 것

살면서

가장 막막한 일이다

 

어지러운 병에 걸리고서야

중심이 뭔지 알았다

 

중심이 흔들리니

시도 혼도 다 흔들리고

그리움도 원망도 다 흔들리고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까지 가는 것도 어렵다

 

그동안 내게도 중심이 있어서

시소처럼 살았지만

튕겨 나가지 않았었구나

 

중심을 무시했었다

귀하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웠다

중심이 없어야 한없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알겠다

중심이 있어

날아오르고, 흐르고, 떠날 수 있었던 거구나

 

 


 

허연 시인

1966년 서울에서 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등단.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산문집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 현대문학상, 한국출판학술상, 시작작품상, 김종철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