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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순 시인 / 환상통
지난봄 거울 속으로 저승 가는 통로가 생겼다 현관을 잠그려다 말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여자, 화마에 휩쓸려간 남자를 이야기하며 거울을 밀고 들어간다 저승에 한 발 이승에 한 발, 그녀의 봄이 꿈꾸고 있다 꿈을 끝내야 계절이 지나간다 잊히지 않는다고 조바심 낼 일이 아니다 가만히 살아만 있어도 기억은 쥐도 새도 모르게 흘러간다 사라진 사람의 기억은 어디에 고일까 모든 기억이 고인 곳은 아마도 생지옥일 거야 기억이 흘러간 방향으로 그녀가 총총 사라진다
―《시에》, 2024년 봄호
황희순 시인 / 너무 높은 세상
그가 사다리를 접어 메고 간다 또 다른 그가 사다리를 접어 메고 따라간다 서성이던 그가 사다리를 한 번 더 접어 메고 간다 또 다른 그가 사다리를 접어 메고 그의 뒤를 따라간다 -------- 또 다른 그가 사다리를 접어 메고 그의 뒤를 따라간다 ---------------
사다릴 밟고 올라서면, 어디 잡을 수 있는 별이 있을까 뒷모습이 닮은 저들은 사람인가 전생에 보았던 그림인가
깊이 몸 접어야 마음 놓이는, 나는 사람인가 누구의 사다리인가
황희순 시인 / 데이지꽃 필 시간 delete에 집착하는 내게 설렘 만지작거리는 그녀가 늑골 틈새 틀어막은 내게 거울 앞에 선 그녀가 꽃을 무시하는 내게 꽃향기에 손 뻗은 그녀가 눈물 글썽이는 내게 누군가의 웃음 그리는 그녀가 죽은 듯 멈춰선 내게 신호 위반하려는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내게 무엇이 되려는 그녀가 소곤소곤 귓속말하네 아주 쉽게 녹아내리는 입술 시작이고 끝인 그 벼랑은 아슬아슬한 빛을 품고 있지 스스로 그윽하여 거기, 한번 내디딘 혀는 영영 거둬들일 수 없지 봄내 부푼 데이지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은밀히 꽃을 피우고 계간 『다층』 95호 2022년, 가을호 발표
황희순 시인 / 데칼코마니
몸에 박힌 옹이를 한 개씩 뽑아 너에게 심고 싶다 모든 옹이에 통증이 스며있는 건 아니다 네 것을 뽑아 내게 심는다면 기꺼이, 중심을 내놓을 것이다 이 별을 숨 쉬게 하는 건 서로 다른 너와 나의 옹이다
황희순 시인 / 인생은 아름다워?
한때는 숨기 좋은 곳이 있었지. 따듯하지 않아도 위태롭지는 않았어. 그날 이후 가지가 하나씩 툭툭 부러지고 하늘이 훤히 보이기 시작하더군. 그게 하늘이 땅이 무너질 징조였다는 걸 삼십 년이 지나서야 알아차렸어.
그 후 숨을 곳을 찾아 헤매는 동안 키가 자라, 어딜 가나 꼬리도 점점 비어지게 자라, 그늘조차 없는 허허벌판에 홀로 서있게 되었지.
유독 한 나무에만 모여 지저귀는 참새들 본 적 있니? 숨기 좋은 나무의 비밀을 사람이 어찌 알겠어. 어여쁜 조슈아, 이젠 네가 술래 할 차례야. 영영 숨은 네 아비는 나중에 찾기로 해.
비어져 나온 이 꼬리부터 싹둑 잘라 묻고, 숨어볼까? 흐흐 그래그래, 인생은 아름답다고 했지. 찾으라고 말할 때까지 눈뜨기 없기. 몸 숨길 만큼 땅 파낼 때까지 찾기 없기.
흡, 숨소리도 내면 안 돼. 더 꼭꼭 숨어야 해. 누가 뭐래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황희순 시인 / 자폐
이봐요, 자기 가슴을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는 거 아니에요 그 안에 바닥없는 벼랑이 생길지 몰라요 다시 살고 싶어져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어요 움푹 파인 당신의 절망과 절망과 절망 사이 계단이 있어요, 벼랑이 보이기 전에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서요 이 땅에 사람답게 필 기회 꼭 한 번뿐이에요 어서요
황희순 시인 / 詩를 본 적 있니
한 백년 후, 누가 우리의 詩를 이야기하겠는가 詩가 남아있기나 할까 만약 있다면 로봇이 짓고 스마트하게 얇아진 몸통을 열고 로봇이 지은 詩를 만지작거리겠지 허무맹랑한 이 세기에 왜 詩를 짓느라 골치 썩이나 생각하다가 내가 누군지 생각이 안 나 그만 거울을 보고 말았지 거기, 중늙은 엄마가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거야 어느 틈에 詩가 아득한 거울 속으로 들어가 버린 걸까 거울 속으로 손을 쑤욱 밀어 넣어보았지 뒤죽박죽 잡히지 않는 자음과 모음들, 요즘 누가 詩를 읽기나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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