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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극래 시인 / 피카레스크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30.

조극래 시인 / 피카레스크

 

 

바깥을 생각할 때

창문이 생기는 것처럼

 

잊을만 하면

꿈속에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손가락이 괴발개발 꺼내놓은 편지가

유리창에 가득하다

 

옆집 누나가 부르는 찬송가 리듬에 맞추어

고양이를 던지며 놀았다

 

넌 나쁜 아이로구나

 

천국에 영원히 못 갈거라고 했다

 

누나는 소설 속 주인공으로 나를 캐스팅해 놓고는

진창에 빠진 어린양을 구원하러

천국에 가버렸다

 

틈만 나면 소나무바늘로 구름의 엉덩이를 쑤셔대다가

빗방울이 웅덩이에 걸려 넘어질 때면

발로 짓밟아대는

 

홀로 거니는 악당의 나날은 질척댔다

 

꿈속에서 누나는 너무 심심해서

유리벽을 자주 긁는다고 한다

 

어느 한 사람도 간섭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게 무섭다고 한다

 

악당이 천사를 구원해도 괜찮은걸까

 

누나 내놔라

 

나는 없는 날개를 퍼득거리며

공중을 윽박지르는 공갈범이 된다

 

하지만 소설은 악당에게

연민의 혀를 선물한 적이 없다고 한다

 

 


 

 

조극래 시인 / 공중에 길 내러 간다

 

빈센트가 없는 귀로 총소리를 듣는 칠월

노란 탁자에 올려 둔 해바라기 노란 화병이 귀신 단지 같다

 

빽빽하게 들어선 무더위를 솎아내느라

옆집 개는 혓바닥이 헐고

물을 벗어던지고 돌무더기에 드러누운 개울

어린 갈겨니가 나오지 않는 젖을 한사코 빨고 있다

 

뒷산 고라니 저녁 울음에 우주가 다 아픈데

 

다섯째 주 월요일 한나절이 지나도록

사람 독에 질려

돌아앉은 신께서

마지못해 귀를 여셨을까

 

공중에는 막새바람물고기들이 길 역사가 한창이다

서녘산등성에 저녁연기를 부어 노을을 이개고 있다

 

이 길이 개통되면

비층구름은 숲새보다 빠르게 지저귈 것이다

새들은 울음을 낭비하지 않고

작달빗소리 화들짝 필 것이다

빈센트는 창고에 처박아둔 노란 해바라기에 물을 줄 것이다

논두렁에 모인 개구리들 뽀글뽀글 울음 주전자 들고

공중에 길 내러 간다

땡볕을 쪼아먹고 얼굴이 달아오른 자미화가

배웅을 한다

백양나무 거미줄에 걸린 먹구름이 날개를 퍼득인다

어디서 물큰한 흙냄새가 온다*

 

* 백석 「비」에서 변주

 

-시집 <오늘은 빈둥거림이 수북하고>에서

 

 


 

 

조극래 시인 / 문병

 

 

한 송이 장미꽃이 문병 왔다

 

해쓱한 얼굴에 얽은 몸, 물병으로 목발을 했다

함께 왔던 친구가 내 엄살을 퉁퉁 불리고 갔다

창밖에는 만성체증이 도진 붉은병꽃나무 소낙비로 열 손가락을 딴다

바람의 간섭에 넌더리를 내는 뻐드랑니창문

창가는 서름서름한 마음들이 모여드는 공원 같은 곳

나는 꽃의 낯빛을 살피다가

문득, 밥과 국물을 나눠주던 휠체어 백장미를 생각한다

점심을 받아 든 노숙자들은

때늦은 사월의 눈을 말아 들이키고

공원은 잠시나마 살이 올랐었다

지금 나는, 발목에 붕대를 감은 것만으로도

비바람이 들이치는데

그녀는 깎아지른 슬픔으로 얼마나 뒤척였을까

이 꽃 또한 뿌리를 잃었을 때

여린 잎마저 가시를 움켜쥐었을 것이다

혹독한 질시를 다 걷어 내고

숭고한 꽃으로 다시 피기까지, 그 몹쓸 몸살이

내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보인다

병실 안으로 더치는 빗소리에 속말까지 젖은 나를 보고

꽃이 함빡 웃는다

 

월간 『모던포엠』 2019년 12월호 발표

 

 


 

 

조극래 시인 / 오늘은 빈둥거림이 수북하고

 

 

당신이 쏟아부은 폭설을 치우느라 혓바늘이 돋는다

그럴 수 있다

당신은 현재에 열중하고 나는 내일마저 탕진했으니

 

폭설을 벗겨내도 겨울이다

당신이 짜낸 눈물 두 접시가 녹지 않는다

따뜻한 변명으로도 소용이 없던

 

왜 겨울장미는 무덤자리를 화병으로 선택했을까

쉽게 감정에 노출되는 혼잣말처럼

 

우리는 말문을 닫아걸고

각자의 신발로 현관문을 밀었지 호기롭게

 

누구에게나 버리지 못하는 산책이 있다

 

당신이 절여 둔 향기가 뒤꿈치를 밟는 것 같아

뒤돌아보면

바람이 몸살을 하는 것인지

나도 몰래 앓는 소리가 새는 것인지

시골우체통이 전갈하는 자욱눈

 

오지 않는 기별은 걸음을 풀썩 주저앉히고

천변을 수런거리는 산다화 꽃잎

오늘은 빈둥거림이 수북하고

 

혼자 남겨진 고독이 비명을 지른다

중얼거림이 당신 흉내를 낸다

시든 장미를 버리려다 손가시가 돋는다

 

계간 『경남문학』 2022년 겨울호 발표

 

 


 

 

조극래 시인 / 춘화현상

 

 

초저녁부터 구름이 수상했다

 

기다림이라는 슬픈 운명을 맹종한 나는

예배당 종소리를 껴입는 중이었는데

 

불쑥

 

투박한 손이 내 눈을 가린다

하도 무심한 기별 같아서

눈두덩이 먼저 부어오른다

 

아마도 그는 다른 직업으로 겨울을 견뎠을 것이다

 

가령 골 깊은 곤들막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폭설을 파종한다거나

얼어붙은 강물에 서서 뜨거운 비명을 질러본다거나

절벽 같은 추위에 숨구멍을 뚫는 일 같은

 

<

고양이나 새 발톱에 긁혀도 벌레집을 숨기고

목련이라는 몽울진 이름을 가져서

몸살 앓도록 꽃눈에 젖 물리는 일이 전부인 나는

 

그의 거친 손길에도

노랑부리저어새가 강물을 저어가는 것처럼 심장은 물결치는데

 

공중을 자맥질하던 초승달이

내 쪽방마다 촛불을 켠다

 

 


 

 

조극래 시인 / 너를 부르면 빗소리가 쏟아지고

 

 

오늘 밤은 빗소리가 쏟아져 꿈이 다 젖는다

 

노루잠이 슬어놓은

뒤척임이란 벌레들

 

버글거리며

나를 좀 먹는다

 

빗소리를 자르러 꿈 밖으로 발을 디디면

 

불친절한 밤이 파놓은

수북한 어둠 구덩이

 

네게 속말이 닿지 못하도록

목울대를 키우는 빗소리

 

어쩔 수 없어

젖은 꿈의 눈꺼풀을 덮어주며 다독거린다

 

노루잠의 어깨를 주물러 본 적 없는 나는

아무래도 밉보인 모양이다

 

빗소리는 한 번도 메마른 내 입술에

젖을 물리지 않는다

 

 


 

 

조극래 시인 / 헛것論

 

할머니는 헛것의 힘으로 폐가 한 채 들여놓고 살다 가셨다

바람의 전설에 의하면 헛것은 용권풍 부는 모래언덕이나

설산의 바람계곡 밤낮없는 백야 얼음지대

버림받거나 눈길조차 머물지 못하는 오지에서

몽달이로 살았다고 했다

밤낮으로 뼈저린 독백을 하던 헛것은 어쩌다 지나치는 대상이나

마방 무리 속에 숨어들어

귀신이라는 이름으로 부적되기도 하다가

유혈목이처럼 치명적인 맹독을 스스로 완성하고

마침내 할머니 목울대에 폐허란 꽃 한 송이 피운 것이다

지병이란 질긴 환멸을 오랫동안 씹어 본 사람은 안다

가끔은 망상스런 입술에 올라

타어둠의 허파를 뒤집어놓고

홀가분해지고 싶다는 것을

어쩌면 할머니 까마득한 길 먼저 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누추한 추문을 헐어쓰는 몸부림은 새겨들을지니

돌아보아 궁뚱망뚱한 신세타령이 범람할 때

문을 열고 쓰윽 들어서는 헛것

이것은 헛것을 경계하라는 상여꾼 술잔 속에서도 찰랑이는 달구질이니라

​​

ㅡ계간 《시인정신》 (2021, 가을호)

 

 


 

 

조극래 시인 / 텃밭 한 페이지를 펼쳐놓고

 

 

감나무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물푸레나무

저승꽃 삭은 냄새

새들도 비켜 앉을 것 같은

 

이게 무슨?

정강이를 툭 차보는 나에게

 

밭이랑 문장에 형용사를 솎아내던 어머니

 

그대로 두어라 쓰잘머리 없을 것 같은 잡풀도

뽑아내면 밭둑 무너진다

네 아버지 설산 바람 같았어도

서녘 하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버팀목 아니었냐

비바람이 얼마나 독한 이빨 감추고 있는지

알지 않냐?

곰삭아도

숱한 태풍, 눈보라에도 버틴 악바리다

저 감나무

한 술 햇살에도 홍시 주렁주렁 매달 수 있는 건

물푸레나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바라보니

이불 밑에 따뜻한 밥 한 공기 묻어놓고

꾸덕꾸덕 널어 말린 어머니 눈물

 

문설주에 얼룩져 있다

 

 


 

조극래 (趙克來) 시인

1963년 경남 통영 출생. 경상대학교 영문과 중퇴,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과 졸업. 1999년 《문예사조》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답신』 『오늘은 빈둥거림이 수북하고』. 창작집 『초보시인을 위한 현대시 창작 이론과 실제』. 제3회 시산맥 창작지원금 수혜. 2023년 경남문화예술 지역문화예술육성 지원사업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