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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희 시인(마산) / 북극여우
산토끼 발 가진 여우 활엽수 잎맥에 눈도장 찍는다 빙하가 간직한 몇 만 년을 포옹한 얼음 화폐 이전의 화폐 눈 마루곁눈질하며 반짝인다
백야에 뜬 만월로만 배를 채웠는지 고무판화같은 눈동자가 빙하를 핥는다 빙하에 묻혀 뜨거운 피를 멈춘 지 수만 년 꼭 그 시간만큼 배고품을 하얀 털빛으로 골라낸 산딸기 녀석의 위장에 설경의 걸음걸이가 담겨 있다
배경을 먹어치운 북극여우 사냥한 오로라를 풀어주자 빙하의 겨울잠이 깊어진다
-월간 《현대시》 2020년 11월호
장선희 시인(마산) / 괘릉
도래솔이 가마우지가 되는 곳이 있다 굽은 몸들이 서로의 물길 꿈틀대며 열어줄 때 가마우지 깃털 같은 어스름이 상륙한다 그러면 날갯죽지 돛대로 세우고 천 년 잠에서 알 하나 둥실 뜬다 물때를 기다려 달빛 부서지고 날갯짓 소리가 저어가는 어둠, 꿈도 오래되면 둥글어지는지 그 한쪽을 밀치고 희뿌염한 지상의 달이 항해를 시작한다 더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 먼 바다로 나서면 긴 목 뽑아 하늘로 자맥질하는 가마우지들 별을 사냥하고도 삼키지 못해 목울대가 가지로만 커가는 도래솔 적막도 오래되면 나무처럼 자라는가 오랜 잠에서 뻗은 가지가 가마우지처럼 긴 목을 늘여 구불텅 천년 묵은 살찐 고요를 삼키고 있다.
장선희 시인(마산) / 9회 말 투아웃 투쓰리 풀카운트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태초의 날이 있었다 그날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다가올 때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는 거라고요
제가 너무 도도했나요 아님, 좀 더 상냥해져 볼까요
나는 피난처가 아닙니다 당신의 말을 경청하고 존중하며 하루 두 번쯤 반복할 수도 있지요
침대에 눕더라도 불경하다 말하지 말아요 신발은 얌전히 현관에 벗어 놓았고요 발소리는 지웠답니다
내게 궁전은 따로 필요 없어요 솜이불이면 어떻고 깃털이불이면 또 어떻겠습니까 불시에 찾아오는 영감이라는 게 도통 떠오르지 않을 땐 산책 대신 그림을 그려요 그것도 시들하면 누운 채 양다릴 들어 부채꼴로 만들어보죠
떠난다고 진정으로 떠난 게 아니듯 떠나지 않았다고 그대로인 것도 아니죠
배시시 한쪽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요 누군 건방지다 할 거예요 누군 신비하다며 날 예의주시 할지도 몰라요
꼬마들의 웃음은 왜 싫증나지 않는 걸까요 좁은 복도를 지나고 긴 복도를 지나고 적당히 어두운 조명을 지나 칠 벗겨진 복도를 지나고 언젠가 바위산이 될 복도를 지나면 전생의 내가 후생의 나와 잠시 포개어질 때도 있답니다
가끔 흥이 넘치는 나무처럼 춤추고 싶어요 정물처럼 앉아있는 건 내 취향이 아니거든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조명 삼아 다리가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춤추고 싶어요 사랑받는 여자로 사는 건 행복한 일일까요
아래로 내려가 더 아래로 내려가 배트맨이 살았던 고담에서 박쥐를 만나면 회색으로 낙인찍힌 얼룩을 닦아줄 거예요 정의를 위해 가면을 써야 하는 시대는 언제 끝나나요
나이 들어가는 몸을 생각해 봤나요 바람 빠진 야구공은 멀리 날아갈 수도 없죠
비 오는 날 자동차는 조심해도 위험하죠 수막현상으로 시간 밖으로 질주할 수도 있죠
코란에서 사자처럼 인간의 끈기는 도대체 어디서 솟아나는 걸까요 피곤한 몸이 더 피곤해질 때까지 사랑한다면 믿지 않아도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누구나 어릴 적엔 귀여운 사고뭉치 정신없는 사고뭉치 수다스런 사고뭉치 그 시간의 골목을 지나 재미없는 어른이 되면 경직된 어깨 두려움에 떠는 가슴 도망치는 다리
계산하지 않아도 투아웃 투쓰리 풀카운트는 다가와 있지요 한 번의 스윙으로 역전을 꿈꾸는 스릴 싫어하는 일을 유독 잘하는 재주가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의 하루는 24시간이었다가 42시간이었다가 한순간 8시간이 되기도 하죠 음악에 몸을 맡기지 않고 몸으로 음악이 되게 하는 기술 앰블런스에 실려 가기 전까진 모두가 천국에서 살아간단 걸 모르면서 살아가지요
9회 말 투아웃 투쓰리 풀카운트 긴장하지 말고, 부드럽게 휘둘러봐요
장선희 시인(마산) / 사각 속으로 사라진 손가락
말이 필요한 건 말이 또 다른 손가락인 때문이지
침묵이 더 강하다고 누군가 말하려 하겠지만 우린 모든 걸 들을 순 없지
규칙과 정신 사이엔 투명 유리가 있지 쉽게 깨지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친구처럼 다투듯 속삭이기도 하지
방문을 열면 방이 나와 방문을 열어도 방이 없을 땐 부술 자물쇠도 필요 없지
내 안엔 언제부터 자물쇠가 있었을까
흑과 백이 마주 보고 싸우고 있어 서로를 칭찬하면서 서로를 헐뜯고 있지
어두운색과 밝은색이 엇갈려서 64칸 아름다운 집을 만들지
다른 곳으로 뛰어가지만 서로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 64개의 발자국으로 지어진 집
침묵이 집이란 말 들어본 적 있어 그건 영혼이야 상대의 눈을 바라볼 때 여왕의 눈빛이 되살아나기도 하지
말 엉덩이에 꿈의 언덕이 있단 말 들어봤어 말해봐,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은지
장선희 시인(마산) / 구라바엔
꽃은 세 번 피었다 졌지 상처가 무늬로 새겨질 동안 나비처럼 날아 봐도 꽃 피지 않았지
나가사키 항에 전함이 들어오면 하얀 제복 푸른 눈 푸르스름 턱선에 지평선이 걸렸지
수줍은 얼굴 속 하얀 쵸쵸 마도로스의 허밍에 멈춘 게이샤의 사랑 사랑의 독기가 산다는 위스키에 취해 갈증 앙상한 뒤태를 만들어 놓지
글로버 하우스로 오르는 언덕길 돌담은 밀어처럼 이끼를 키우고 양산 받쳐 걷던 길 위 게다 신고 뛰어가던 발목도 수국으로 피었지
바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면 연못 속 수척한 제 얼굴 떨구고 있는 수국 삼십 년을 세 번 졌다 피었다고
-수요시 포럼 제15집 『마이클잭슨의 거미』에서
장선희 시인(마산) / 아이스버그 인
1. 계단에서 멀수록 완전무결, - 복도 끝방을 주세요 북극해까지 오느라 지느러미가 망가졌다 애인이 의심하기 전에 재생해야 한다 잠은 가짜 죽음, 유빙遊氷 사이를 떠다닌다 이누이트의 조상을 닮은 빙산이 녹는 시간, 투명은 단단한 믿음, 타고 온 픽업트럭이 투명차고로 사라진다 습한 자리엔 오해가 밤낮 자라니, 털가죽부터 말려야지
애인은 비행기를 탄다 나는 손을 흔든다 목적지 현재 시간 8:01, 망가진 지느러미가 재생되는 동안 밤낮이 바뀐다 그의 손길로 내 몸은 물이 된다 - 여긴 한낮이야, 입에 짝 붙던 연어살 목소리, 대기권 밖으로 증발된다
2. 지느러미를 냉동실에 보관한다 해동시간은 백만 년, 객실 인증서에 사인을 하고 성층권 오로라에 눈을 맡긴다 거짓말처럼 눈이 감긴다 북극점이 깃발로 흔들리는 혈거인의 창문은 빛났던가 빙산이 떠다니는 꿈속, 지느러미가 손가락, 발가락이 될 때쯤 눈을 뜬다
눈부신 백야와 알래스칸 말라뮤트의 젖은 털, 썰매를 타고 북극해까지 도달하는 동안 재생된 지느러미, 그 미끈한 피부에 오로라가 뜬다
-『시산맥』 2012년 겨울호
장선희 시인(마산) / 퐁피두
미술관은 커다란 공장 같았지 외벽은 여러 개의 파이프가 붙어 있었어 하얀 연기 대신 검은 구름이 떠 있는 하늘, 이건 누가 그린 캔버스일까 햄스터 관 같은 투명 파이프의 에스컬레이터로 수많은 관람객이 오르내리는 모습은 마치 행위 예술 같았어 나야 뭐, 전공자도 아니고 미술은 상징이고 너머의 의미를 상상해도 된다는데 그 시간, 지중해 인근에서 지진이 일어났어 구호품과 구조견도 비행기를 타고 현장에 갔지 구조하던 사람들이 여진에 다치고 기자들이 취재 도중 대피하는 장면도 화폭이 될까? 아이들이 울부짖어, 피카소도 울부짖어 잔해 속에 팔 하나가 튀어나와 있어 게르니카 속 다리 하나도 툭, 둥근 지구는 사용 설명서가 더 필요해지고 뉴 미디어 전시관엔 설명 책자가 놓여있었지 왜 당신은 이해하려고만 하십니까, 누군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어 샤걀, 칸딘스키, 달리, 엔디 워홀 속을 감추고 겉만 보여주는 현실의 상징체들 그림들이 점점 엷어져, 형체와 색이 소실되더니 시커먼 연기만 자욱했어 뼈 같은 프레임만 걸린 전시실 소방관의 다급한 얼굴 위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와장창 쏟아졌어 여진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 희망의 말을 화염 속에 던졌을까? 허공을 손톱으로 긁는 사람들 속에 내가 앉아 있어 그을음이 잔뜩 묻은 얼굴로 캔버스 속 물감으로 감춘 지진, 붓은 어디로 이어지는 길을 놓아주고 싶었을까 계단이 추상에 기대다 추락하는 자세로 멈춰있어
-월간 『모던포엠』 2023년 8월호 발표
장선희 시인(마산) / 몰디브 생각
난 물고기의 입 모양을 하고, 산호의 말을 합니다
반얀트리 아래 가부좌 틀고 한나절을 한평생처럼 보내고 싶습니다
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은 어디서 쉬고 있을까요 그 생각에 골똘해져 동네 마트에 갔습니다
한 달 뒤의 너를 위해, 오늘 나는 개망초를 준비합니다
요리는 손맛을 통해 여행을 숙성하는 것이라죠
개망초가 몰디브라 생각하니 나는 어느새 수상 가옥 안에 있습니다
깨끗이 씻은 도마 위에, 물고기 같은 산호 같은, 말을 놓고 송송 썰어봅니다
나비가 모여들고 하늘이 숲속처럼 어질러졌어요
숲과 숨통을 순간적인 영감에서 몰디브로 몰아붙이는, 요리는 완성이 쾌감입니다
간간하게 입덧하는 산호섬의 빵나무
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은 어디로 갔을까요? 대기자 명단에 올려져 구름의 변신 속도로 지워지고 있겠지요
먹기도 전에 양치부터 하는 건 인도양 바다 노을을 맞으려는 예복 같은 것이죠
둘이서 하는 식사는 한 접시 개망초가 런칭한 몰디브
섬에서 육지로 죽도록 헤엄쳐 오는 바다거북의 작은 손을 상상해 보세요
몰디브를 생각하면 왜 자꾸 개망초가 피는 걸까요
-계간 『시산맥』 2023년 여름호 발표
장선희 시인(마산) / 돌기둥
언덕 높이 이끼 낀 바위들이 사는 곳, 그곳을 찾아낸 사람은 한동안 소식이 끊겼고 되돌아온 사람도 그곳을 발설하지 않았지 바람 불거나 비 오는 날 찾아가면 돌기둥을 볼 수 없다는 걸 언덕 아랫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지 간혹 이방인들이 언덕으로 올라갔다 돌기둥을 발견했고 돌기둥 속으로 사라진 뒤 몇 년 뒤에 불쑥 다시 나타나곤 했지 어디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는지 그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떠났지 그것은 언덕 높은 곳 다른 세계로 이어진 통로가 분명했지만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곳을 잊고 살지 그것은 언덕 높은 곳에 있고 먼 곳의 전쟁이 마을까지 몰려오면 모두가 언덕으로 갔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따라 돌기둥 사이로 몇 년을 망각처럼 떠돌다 다시 돌아왔지 돌아오면 저쪽은 기억에서 사라지는 이상한 돌기둥, 안개 속에서 모습이 드러나는 날 그 돌기둥 속으로 걸어가면 되돌아오지 못하지 그런 날 그곳에 든 사람을 그 후 누구도 본 적이 없지 그것은 언덕 높은 곳에 있고 돌기둥은 평범한 거석처럼 몇백 년 뿌리 박혀 잊혀졌지 그것은 언덕 높은 곳에 있고 지금도 안개가 이끼 낀 바위를 씻을 때 불현듯 나타나곤 하지
-계간 『울산문학』 2022년 가을호 발표
장선희 시인(마산) / 피사의 사과
기울기의 비밀을 알아버린 사과가 우주로 날아간 날이다
되돌아온 시간여행 전화부스 우주복 차림의 그가 나온다 오른손에 들려있는 붉은색 그대로의 사과
다양한 영웅들이 출몰하는 석양을 보러 온 세계의 배낭족들
망원경에 꼬리가 잡힌 행성들이 하늘 계단에 앉아 만찬을 벌인다
지구별 자매 행성 만나러 운동화끈 묶고 시간여행자가 꿈꾸는 행성행 버스를 탄다
19세기에 발견한 48개의 별자리 고양이처럼 귀를 세운다 투명꼬리도 세워본다
하나의 계절이 봄여름가을겨울이 되는 지점 배낭족들은 한 날 한 시에 만나기로 한다 우주의 축으로 불리는 엑시스 문디를 발견 즉시 여행 노트 속에 가둬버리기로 한 건 비밀
황금사과나무를 본 자는 눈이 먼다는데 이브가 먹어본 사과맛을 아는 사람들 겁도 없이 눈이 멀기로 한 날에 도착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0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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