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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고음 시인 / 나는 가난을 벗었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5.
나고음 시인 / 나는 가난을 벗었다

나고음 시인 / 나는 가난을 벗었다

 

 

우도 산호바다에 누워 하늘을 찍었다

잡티 한 점 없는 코발트빛 하늘이 화면에 가득 찼다

하늘에 눌려 일어날 수가 없다

 

아파트 창문으로 본 하늘은 언제나 사각형

하늘은 늘 좁은 직사각형이어서

나의 하루는 좁고 길었다

 

오늘은 하늘이 끝없이 둥글고 넓다

늘 보던 하늘이 아니다

오늘 나는 가난을 벗었다.

 

 


 

 

나고음 시인 / 미련 없이

 

 

‘미’에는 물의 의미가 있다지

‘미나리, 미더덕, 미꾸라지, 미역감다’ 에서 보듯

‘미’는 ‘밑으로, 미끄러지듯, 미련 없이

미련 없이…란 뜻도 있어

 

강을 사이에 두고 그와 나는 서로의 물결로

미끄러져 갔다

 

물에 잠긴 미나리를 만지며

강물에 미련을 담아흐르는 동안

그물 사이로 그 미련마저 빠져나가고

미련 없이 우리는 서로를 버렸다

돋보기로 메뉴판 글자를 보던

그럴듯한 중년이 되기까지

미련 없음이 얼마나 미련했었나를 알기까지

미련을 밀었다 당겼다 하며 살았다

 

‘미’에는 ‘미련 없이’란 뜻도 있어.

 

 


 

 

나고음 시인 / 꽃잎은 어디로 날아 갔을까

 

 

꽃비에 젖은 봄날

왈칵 달려와 안기는 노란 꽃이 불러온 그 날

향긋한 그리움에 빠졌던

후레지어 향 같던 그 봄

다시 갈 수 없는 간이역에 걸어 둔

꽃잎 하나

 

그 꽃잎 어디로 날아 갔을까

지금쯤 어디서 향기롭게 피어 있을까

간이역에 걸어 둔 그 꽃잎

 

한국시인협회 2021. 사화집 《역驛》

 

 


 

 

나고음 시인 / 식은태

 

 

뜨거운 가마에서 갑자기 꺼낸 도자기

놀란 도자기가 피시식 비명을 지르며

허연 연기와 함께

몸에 상처를 남긴다,

식은태.

 

성급히 드러내려다 생긴 상처

내게도 있다

설익은 아픔이 남긴 상처, 균열의 흔적

삶의 무늬로 남은 내 몸의 식은태.

 

 


 

 

나고음 시인 / 트라피스트 수도원 오후

 

 

 공기가 맑아서인지 볕이 더 따가운 유월의 정오, 폭염에 달궈진 문고리가 고개 숙인 고요, 닫힌 듯 열려있는 문을 들어서니 서늘함이 밀물처럼 다가오며 정갈한 흑백사진을 펼친다

 침묵만이 살아서 말이 되는 곳 저마다 감추어진 혹은 잘 정돈된 속내를 안고 한 점 그늘에라도 숨고 싶은 사람들 그림자처럼 움직인다

 열려진 창 너머로 들어오는 초록 물결 눈을 내리깔고 발꿈치를 든다

 언젠가 무작정 찾아 왔던 그때처럼 쥐똥나무 숲으로 자란 푸른 침묵의 늪으로 바람도 햇볕도 무게를 버리고 온다

 20년 전 심은 묘목 작은 측백나무 숲을 이루는 동안 트라피스트 수도원 원장 수녀님 이마에 걸린 흰 머리카락, 시간의 흔적되어 한 줄 바람에 흔들린다

 복도 끝 서가에 서서 노동과 기도와 절제가 주는 숨소리를 듣으며 유물처럼 갈무리된 그들만의 지혜와 질서의 책장을 넘겨 본다

 안애서 보는 눈을 찌르는 초록, 세상을 보는 자리에 따라 이렇게 낯설기도 한 것을

 말이 허락되는 침묵 한 덩이, 나를 따라 오고 있다

 

 


 

 

나고음 시인 / 신작 발표

 

 

미나리를 무친다

싱싱한 것을 골라 다듬고 씻고 데치고

혹시 거머리라는 놈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살피며

갖은 양념 조물조물하여 맛있는 나물을 만들었다

 

반찬 하나 만들기가 이리 어려운데

나는 계절마다 잘 차려진 성찬을 선물로 받는다

때로는 다달이 받기도 한다

 

오늘, 그 성찬 중에 내가 만든 반찬 하나가 있더라고

맛있더라고,

음식 전문가인 친구가 축하 전화를 해 왔다

씩 웃으며,

나는 멋쩍은 고래가 된다

 

신선한 재료로

조미료 쓰지 않고 손맛을 살린

맛있는 반찬으로 성찬을 빛내고 싶다

 

 


 

 

나고음 시인 / 안단테 칸타빌레 풍으로

 

 

은빛 바퀴에 햇살과 고요 가득 싣고

서해 도비도항港을 간다

 

마을엔 사람 흔적 하나 없어도

붉게 핀 영산홍 저들끼리 행복하다

인디언핑크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키 낮은 꽃잔디들

담도 없는 마당에 가지런히 파 놓은 흙덩이까지

곳곳에 손길 머문 흔적 역력한데

있는 듯 없는 듯

바다는 파도로 집을 지킨다

 

페달에서 내려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노래하듯 흐르는

안단테 칸타빌레,느린 선율에 전이되어

박동치던 숨소리도

낮고 느린 파장으로 물결친다

 

있는 듯 없는 듯

내 안의 그대

잔물결로 출렁인다

 

 


 

나고음 시인

경남 마산 출생. 서울교육대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졸업. 2002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불꽃가마』 『저, 끌림』 『페르시안 블루, 꿈을 꾸는 흙』 『그랑드 자트 섬의 오후로 간다』. 미술저서 『유아미술교육학』, 『마음을 여는 미술활동』. 공저와 에세이 『26&62』, 동시 『사이사이 동시집』 편저. 2015년 서울시문학상 수상. 숲속의 시인상, 제11회 바움작품상, 한국시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