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장유정 시인 / 구름의 저작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30.
장유정 시인 / 구름의 저작권

장유정 시인 / 구름의 저작권

 

 

구름이 피뢰침 들고

무겁고 둔중한 빗소리 뱉어 내고 있다

눈 밖의 연주

창문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팔분음표가 된다

가끔 피뢰침 휘두를 때마다

창문으로 우르르 몰려드는 청중들

구름 지휘자는 악보에 대한 저작권이 없다

 

지구는 거대한 도체導體다

국경도 없기 때문에 이역을 기웃거리다가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하였다

 

지휘자의 범위는 피뢰침 끝에서 지상으로 그은

수직선을 축으로 한 원뿔 내의 영역

끊임없이 음을 조율하고 있지만

접지저항이 없어 여기저기 떠돌다가 말 것이라는 추측의 화음

독특한 음역을 주장할 어떠한 조항도 없다

 

눈꺼풀들은 시간을 깜빡이고

온음표나 도돌이표 같은 이슬이 뭉쳐서 구름이 된다는 정도

우리는 불가능성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뿐

 

내내 불편한 조건은 마찬가지다

 

적란운이 지향하는 세계는 지상의 뾰족한 모서리에 떨어지기 쉽다

 

유리창은 검은빛,

음이 투명하지 않는 순간으로 깨지면 빗방울은 달라진다

화음이 고르지 않고 낙뢰처럼 이탈할 확률이 높다는 것

그리하여 합창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장유정 시인 / 노을

 

 

노을강 저녁 능선을 넘을 때

고요한 적막이 빛살에 어린다

 

넘어가는 노을 결에

거목의 포플러 나무

 

까만 열매 달랑달랑

바람 쓸어안고 한들 거리고

 

낙동강 겨울  윤슬로  반짝일 때

저녁노을 강물에 잠긴다

 

태고의 자연아

쉼 없이 반복하는 일상이지만

그래도 늘 꿈꾸는 희망을 안긴다

 

 


 

 

장유정 시인 / 늙은 책

 

 

사방의 공중에 고목체로 집필하고 있다.

서지를 관장하는 나무 그늘이 손수 필사를 한다.

걸어가거나 뛰어가는 날들을 견디느라 늙었을 마을 어귀엔

고문서로 읽히는 한 그루 느티나무가 있다.

제본마다 푸른 점을 찍고

잎맥들은 혈통에 바람을 불러들인다.

 

색인처럼 진열되어 있는 이파리

칸칸 파릇한 글자들이 인쇄되고 있다.

 

곰팡이처럼 부식되어 가는 이끼들

필적에 오르지 못하고 더부살이로 나무를 덮기도 한다.

 

바닥을 움켜쥐듯한 내용엔

뿌리를 닮은 추측이 오르막을 모른다.

 

휘어진 연로年老는 늙은 충복 거느리듯 축대에 의지하고 있다.

원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종지처럼

그 가게를 찾아 올라간다면

책의 내용은 앞으로만 읽게 되어 있는 형상일 것이다.

 

잎들은 바람의 단행본으로 본색을 쫓아간다.

혀에 침 묻혀 방대한 잎의 두께를 책처럼 넘긴다.

마을에는 책장을 넘기는 바람의 손이 있어

느티나무 계보학 같은 주석이 달릴 것이다.

 

 


 

 

[제19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장유정 시인 / 누에

 

 

수백 년 전 누에의 분묘가 발굴되었다

모서리죽임 같이 흙으로 쌓아올린 사각기둥

장유정 시인

실을 짓던 시간들이 뭉쳐있었다

무한한 옷 한 벌 품은 실들이 껍질 속에 있었다

집을 바라는 열의의 모형처럼 타임캡슐엔 우주에 관련한 보고서도 발견되었다

 

집 한 채 따로 들고 나앉듯

방안에는 숨을 뽑아 날개를 만들고 있었다

좁은 침낭 속에 들어 잠을 자는 듯 죽어있는 누에고치

 

자기만의 중심축으로

한곳에 치우침 없이

부드러운 곡선 속에 계속 굴러가는 방향지시등처럼 마찰계수가 작았을 것이다

뾰족한 끝이 보이고

자꾸만 균형 잃고 흔들릴 때

세상과 닿는 유연한 포장

쉼 없이 돌고 도는 지구의 자전처럼 모서리가 둥글다

 

잠자는 머리를 어느 쪽으로 돌리지 않은 것들은 화려한 변태를 겪을 수 있다는 듯

 

미사일저장고를 개조하듯

우주선 캡슐에 건전지 넣는다

긴급 피난형 집처럼 누에가 고치를 짓고 있다

우화등선처럼 손끝에는

하얀 벌레가 한 마리씩 꿈틀거렸다

 

 


 

 

장유정 시인 / 여러 번 말했지만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사탕처럼 혀를 굴렸어요

걸리는 건 침이 아니라 말이지만

아프리카 사람들 소 목덜미 구멍 뚫어

피 빨아 마신 후 소똥으로 덮는지

끝나지 않고 둘러붙는지

혀를 쏙 내밀고*

홍합처럼 까맣게 다문 밤을 벌려요

 

들리나요 혀끝에 매달린 심장

가리고 막혀 앞뒤로 한 발

서울이 무섭다니까 남태령부터 기는

천국과 지옥을 두드리는 혀들

낭떠러지는 어디만큼 가팔라서

아득한 천길만길로, 아슬아슬 위험해!

 

노을을

씹어 삼켜도 그만이지만

뱉을 수도 없이 더 밀지 마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절벽

바람이 살점을 떼듯 혀는 왜 붉은 것인지

 

달그락거리는 소름과

씨가 있는 딸기의 혓바늘

이렇다 저렇다 반을 갈라

기가 막힘이 횡설수설 언제 혀를 끌끌 차는지

 

지금까지 한 말 다 지워버리고

누가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리겠어요?

 

*핸드릭 릴랑가

 

 


 

 

장유정 시인 / 담쟁이

 

 

언덕 위의 집처럼

숨 턱턱 차는 가파른 비탈길 오른다

구름과 숨바꼭질하다 들킨 한낮,

바람은 늘 제멋대로였다

 

잠을 못 자 눈 밑이 검은 그 여자도 그랬지

엎드리거나 기대 사는 사람들

움켜쥐는 버릇 때문에

가슴 펄 생각마저 들지 않는다지

 

바람과의 내통은

매일매일 그 타령이지

벽은 가로막힘이 아니라 뻗침이라지

 

바람과 구름은 근친상간이라 그 가계의 풍향계가 돌아가면

슬픔의 질량을 달아도 부피도 솟구치는 것인지

언제나 벽은 그녀 앞에 가로놓였다

 

주름살투성인 쪼그라든 손목

가는 허리와 등뼈 감춘 곡예사처럼

그녀가 벽에 기대 울고 있다

 

 


 

 

장유정 시인 / 문 앞에 서다

 

 

 누구든 대문 앞에 서면 잠깐의 타인이 된다.

 그것은 문의 취향일 수도 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바깥의 타인

 인터폰 안에 살고 있는 순간의 타인들이 바라보는 얇은 암전

 기척이 살고 있는 목소리의 방식

 

 마음대로 상대를 선택하는 것 같지만 우리는 찬 바람일 수 있고 배달 된 음식일 수 있고 적의를 품은 의심일 수도 있다.

 

 빈집을 바라본다.

 바람이 창에 스미면 모든 경계가 닫히고

 충혈된 눈알처럼 창문에 바람이 매달린다.

 누군가 집의 창문 앞에 와서 손톱으로 유리를 긁는다.

 

 창문은 잠시 놓인 시간이기도 하지만 이쪽에 없는 영원한 공간, 생을 의심하며 귀를 대본다.

 뚜껑을 따듯 눈을 치켜뜨거나 소리의 무게로 귀를 종긋 대거나 스치는 후각으로 코를 벌름거리고 입을 벌리면 열리는 것인가?

 

 수세기를 걸쳐 허공에 서 있다 라는 말은 문을 흔들고 있다는 말이다.

 

 몸은 육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스스로의 내부에 방을 만들고 시간 속으로 침몰해 가는지 귀는 자물통 되어 안에 갇히고 스스로 빗장을 걸기도 하는 것이다.

 

 집처럼 낡아가는, 단순한 평면인 우리는 모두 타인

 문을 열자 한곳을 바라보던 눈동자는 바로 침몰하는 어둠처럼 흩어져 날아간다.

 

 


 

장유정 시인

1962년 경기도 평택 출생.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졸업.  동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수료, 2007년 경기사이버문학상 입선. 201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그늘이 말을 걸다』. 2015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제19회 수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