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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미량 시인 / 꿈이 흐려서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30.
김미량 시인 / 꿈이 흐려서

김미량 시인 / 꿈이 흐려서

​램프를 켜놓고 잠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램프와 눈이 마주친다

우리는 서로 깜짝 놀란다

불을 켜고 마주앉아 먼저 말을 꺼낸다

꿈속은 여름이었고

꿈같은 여름이었고

예쁜 버섯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축축해서

장화를 버렸는데

두고 온 것은 장화뿐인데

눈이 퉁퉁 부었다 나는 어디를 다녀왔을까

버릴 게 많은데

미처 버리지 못한 것들은

귀가 되고

귀고리가 되어 걸리고

머리핀이 되고

커다란 모자가 되어 나를 장식한다

당신은 겨울에 떠난 사람

당신의 무덤은 당신 것

내게 떠민 미처 지우지 못한 기억까지도

살아서 지켜야 하는 나도

엎드려 울고 있는 무덤이다

곁에 당신이 있다고 치자

손이 나타나 가만히 덮어주는 이불

그래, 가만히 덮고 늙어가는 마음

꾸짖는 당신을 놓친

꿈이 흐려서 비가 내린다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달아실, 2023)

 

 


 

 

김미량 시인 / 가을장마

 

 

 후둑후둑, 우산 아래서 어울리지 않는 소리끼리 어울리지 않는 내기를 합니다 자박자박, 지루한 이야기는 몰아서, 이야기가 떨어지면 지는 게임입니다 한여름은 미리 얼려둔 한 봉지의 얼음과 다정합니다 각진 소리가 나지요 한 커플이 녹아 한 숟가락의 아이스크림으로 얼룩지는 여름을 지났습니다 끈적끈적한 긴 이야기가 끝나면 기념품으로 받은 우산을 버리고 내기도 잊지요 한 숟가락의 아이스크림과 다정한 커플의 이야기도 버려집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김미량 시인 / 꿈에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 수천 마리

긴 발톱으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간다

고양이 목에 채워진 낯설지 않은,

어릴 적 내 목에 채워져 있던 저것,

내 어미가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다 툭 끊어버린 저것,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간 어미고양이 탁자 밑으로 기어간다

살아남은 눈들이 일제히 나를 본다

꼬리를 빳빳하게 세운 한 놈이 달려와 가슴팍을 할퀴고 나뒹군다

구더기 떼가 어미고양이 등을 막무가내로 덮어버린 것은,

말도 안 되는 농담 같은 것,

거꾸로 고양이를 들고 탁, 탁 털어준다

머리에서 하얀 꽃잎이 내려온다

손금이 열린다

검은 털에 하얀색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

당신에게 앙앙대며 안기는 것은 전생의 귀여운 버릇 같은 것

빼앗긴 왕관을 찾으러 오래전에 이곳을 지나간 기록을 읽는다

멀리서 총소리 들려온다

어둠속을 히죽히죽 맨발로 달려간다

유감스럽게도, 네 발로 기어 다닐 확률이 줄어들었다

고양이를 위한 통곡의 시간을 지나

몸 바꾸러 밤마다 숲으로 간다

햐, 꿈속에서만 자라는 이 부드러운 수염을 어쩌나

 

계간 『시인동네』 2013, 봄호

 

 


 

 

김미량 시인 / 꿈이 흐려서 비가 내렸다

 

 

램프를 켜 놓고 잠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램프랑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깜짝 놀란다

불을 켜고 마주 앉아 먼저 말을 꺼낸다

꿈속은 여름이었고

꿈같은 여름이었고

예쁜 버섯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축축해서 장화를 버렸다

버릴 게 많은데 미처 버리지 못한 것들은

귀가 되고

귀고리로 걸리고

머리핀이 되고

커다란 모자가 되어 나를 장식한다

겨울에 떠난 사람이 생각났다

미처 지우지 못한 기억이 있어도

당신의 무덤은 당신 것.

살아서 지켜야 하는 나도 무덤이다

엎드려 울고 있는 내 곁에 당신이 있다고 치자

가만히 덮어주는 이불

가만히 이불을 쓰고

가만히 이불을 덮어쓰고

가만히 늙어가는 마음을 꾸짖는 당신을

꿈속에서 놓쳤다

 

 


 

 

김미량 시인 / 물집

여름에 도착한 사람 이야기입니다

​뜨거운 세계

​숨을 곳이 필요한

​따가운 시선을 피해

​건축 설계에 없는 그늘을 준비하는 동안

​빠르게 부풀려 완성한 집

​소문처럼 비웃는 집

​얼음처럼 서늘한 말

​그늘을 빌려 쓴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이야깁니다

​그이가 창문을 깨고 나가면

​소독이 필요한 집

​걸어가는 눈물과 떨어지는 빗물뿐인

​나를

​견디는 당신의 이야깁니다

​​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달아실, 2023)

 

 


 

 

김미량 시인 /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꽃은 세상에 오기 전

작은 색종이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저녁이면 신과 함께

형형색색 꽃을 접었다

말없이 동그란 탁자에 마주 앉아

보라색을 좋아하는 나를

맨 처음 제비꽃으로 접어주셨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신의 무릎에 앉을 수 있었다

(당신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떠나오던 날

신은 분홍색 분꽃을 접어 손바닥에 올려주셨다.

어른이 되어

누군가의 손바닥에 분꽃을 올려놓으면

그 사람은 겨울에 죽는단다

신의 부탁으로

사람들에게 꽃을 알리러 세상에 왔다

걸어오는 꽃은 고백처럼 잘 보이고

쓰러진 꽃들은 기도처럼 일어났다

목마른 꽃을 위해 빗소리를 틀어 두었다

방향을 잃은 꽃들은 새로운 기억으로 더 붉어지고

어젯밤 꿈에

신의 무릎에 앉아 그날처럼 제비꽃 오백 장을 접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전생은

믿거나 말거나 다 끝난 이야기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저녁에 잠든 꽃을 찾아갔다

너는 알고 있지?

그때 나는 주황색이었니 보라색이었니

그때 나는 살았니 죽었니

가까이하면 불행해진다는 분꽃을 잊고 살다가

가을에 나를 부르는 꽃이 수상해

당신에게 그 꽃을 따다 주었다

신의 예언처럼 크리스마스에 죽은 사람

꽃과 나와

신의 거리가 분간되지 않는다

 

 


 

 

김미량 시인 / 집 구합니다

 

 

전봇대에 나열된 집의 문패를 읽는다

오를 대로 오른 집의 몸을 잡고 까치발 딛고서면

거기, 높은 혈압 외부로 노출한

집주인 연락처 당당하게 걸려있다

호주머니 속으로 낱장의 주인 떼어내 구겨 넣는다

전세 행 왕복으로 예매해둔 설움

꼬깃꼬깃 접어 둔 주머니 속 몆 번씩 안전을 확인한다

노란색 위험금지 구역에 불법으로 세운 집

원룸 투룸 쓰리룸 켜켜이 떡시루 닮았다

뜨겁게 아랫목을 달구고 지나가는 사람 부르며

한참을 서성거려도 콩고물 떨어지지 않는 집

바람 앞에도 물러서지 않는 종이 집

어느 날 비라도 들이치면 원룸 하나 선뜻 내어주기도 하는,

저 집에 들어 집 한 채 찜 하고 미친 척 살아보면 안되나

미처 떼어내지 못한 창문 한 짝

팔랑팔랑 바람과 맞서는 위태로운 집

대출금 앞에 위태로운 게 어디 내 심장 뿐이가

오르다 끝내는 하늘에 닿을

저 늘어난 집의 목에 깁스 채울 날 오리라

전봇대 없는 집 없는 자의 전용 자석 광고판

지붕도 없는 하얀 집이 입춘 지나도록 눈 맞고 있다

철컥철컥 내 눈이 먼저 붙어 버리는

저기, 저 대기 중인 집 한 채

 

 


 

 

김미량 시인 / 개불을 씹다

 

 

토막 난 개불이 꿈틀거린다

젖가락을 타고 오르다가

입에 닿는 순간 오므라들며 굳어간다

우리는 토막 난 바다에 둘러앉아 부지런히

고통을 덜어주는 의식을 치른다

초장을 듬뿍 찍어 개불의 비명을 지우고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면

매끄럽게 나를 통과하는 쫄깃한 주검의 맛

나는 한때 깊고 어두운 길을 통과해야 했다

정체모를 점액질 흥건한 거리를 질척거리다

공연히 혓바닥을 깨물며

오랫동안 습기를 따라 돌아 다녔다

태양앞으로 불려가는

단 한번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그늘 아래 축축한 몸을 말렸다

상처가 또다를 상처를 향해 문을 연다

빈 접시에 누군가 나를 씹다가 뱉어낸다

 

 


 

 

김미량 시인 / 불량에서 미량 그리고 다시, 미량까지

 

 

 십수 년 전 동학사 그늘에서 처음 그 여자를 만났다. 손목에 네잎클로버 문신을 한 여자는 명랑하게 말을 더듬었다. 시 시를 쓰 쓴다고 했다. 아 아직은 부 불량이라고 했다. 독을 숨긴 유혈목이 같았다. 가시를 숨긴 찔레 같았다. 십수 년이 지나서 기억이 흐려지고 동학사 그늘마저 흐려질 때쯤 우연과 필연의 중간쯤에서 그 여자를 다시 만났다. 네잎클로버 문신은 여전했고, 명랑하게 말을 더듬는 것도 여전했지만, 그 사이 여자의 배는 만삭이 되어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묻자 그 사이 부 불량을 건너 미 미량에 다 다다랐다고 했다. 내 아 아이들을 꺼 꺼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더 이상 유 유산할 수는 없다고. 피할 도리가 없었다. 여자의 자궁을 뚫고 마침내 세상에 나온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자 그제야 여자는 새끼들을 쳐다보며 웃었다. 미량에서 다시, 미량까지 그것은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처방전이었다.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에서

 

 


 

김미량 시인

1970년 대전 출생, 2009년 《시인시각(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젊은시인들>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