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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완호 시인 / 시인의 근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4.
박완호 시인 / 시인의 근친

박완호 시인 / 시인의 근친

 

 

바람과 새는 한 족보를 가졌다

근친을 향한 설렘일까 바람은

새의 비행을 순순히 용납한다

가계의 뿌리에 발 묶인 나무는

목울대를 새한테 넘겨준 바람의

짙푸른 우울이 다 가실 때까지

반벙어리로 양팔을 흔들어댄다

나뭇잎이 여름 내 푸르렀던 건

새가 목울대를 돌려주는 대신

바람의 속내를 잘못 건드린 탓이다

가시를 피해 밟듯 나뭇가지를 타는

새들의 조그만 발자국 사이에는

바람의 유전자가 티눈처럼 박혀있다

새의 방식으로 꿈꾸고

나무의 방식으로 살기,

허공에 찍히는 발자국을 짚어가며

길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시인은 바람과 새의 또 다른 근친이다

 

 


 

 

박완호 시인 / 고양이의 변주

 

 

 잿빛 구름이 고양이 한 마리를 지상에 내려놓고 간다.

 

 울음소리보다 먼저 바닥에 내려앉는 맨발들,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것들이

 맨, 이라는 접두사를 앞세우고

 본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들에게까지

 날렵한 고양이의 수사를 안겨준다.

 

 고양이 하나가 그늘 쪽으로 파고들자

 다른 고양이가 그 자리에 내려앉는다.

 

 고양이에 고양이,

 고양이와 고양이,

 고양이들의 그림자를 몰고 가는 구름

 

 어디서 붉게 타는 속울음을 가라앉히며 저녁놀 끓는점을 지나고 있을 맨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무거워진 공기에 눌린 풀잎이 아래쪽으로 꺾일 무렵,

 

 앞서가는 고양이의 꼬리를 물고 밀려드는 검은 그림자들, 고양이 울음소리가 어둠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박완호 시인 / 달동네 집 찾기

 

 

그녀의 거처는 달동네 어디쯤이다.

 

달의 주소록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

희미한 반점들,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어둠의 줄기를 따라 늘어선

밤의 뒷골목 어딘가에 그녀가 머물고 있다.

 

선산 중턱에 걸린 반달 빈자리,

아카시아 뿌리를 움켜쥐고는

한사코 거기 머물고 싶어 하던

그녀는 언제부터 저곳에 집을 짓고 있었을까?

 

툭하면 번지수를 놓치는 무허가 판자촌 같은

달의 모서리 어딘가에 있을 집을 찾아 나선다.

 

어둠 속을 서성이는 어린 별을 만나면

아직 그녀의 집을 찾고 있느냐고

너무 슬프지 않은 얼굴로 물어다오.

 

달동네의 옆구리가 시큰거릴 때마다

번지수 없는 집이 조금씩 기울어간다.

 

더는 그녀의 주소지를 물을 데가 없다.

 

-《노작》 2023년 가을호 발표

 

 


 

 

박완호 시인 / 막차

 

 

 점이 가까워지면 바퀴는 집요하게 달라붙은 흙덩이를 투덜투덜 털어내기 시작한다. 공회전의 타이어에 튕겨나가는 돌멩이들은 여태껏 말로 풀어내지 못한 울화.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 있던 반백의 사내가 취기 찌든 한쪽 발을 바닥에 마저 내려놓는 순간 내일과 어제 오늘이 복권 구슬처럼 한꺼번에 뒤섞인다. 숨 가쁘게 뛰어와선 고달픈 할당량을 들이밀던 작업복의 땀내와 손잡이에 매달려 한참을 졸아대던 긴 생머리, 짧은 눈인사와 함께 새빨간 구두코를 다짜고짜 올려놓던 파마머리와 방금 전 떠난 사내의 뒤통수가 식어가는 엔진소리를 따라 조금씩 흐릿해진다. 바퀴가 구르기 시작할 때마다 손을 흔들어대던 기사식당 옆 은행나무도 새벽녘까지는 지친 팔다리를 풀어놓고 있을 것이다.

 

 


 

 

박완호 시인 / 경계를 서성이는 동안

 

 

 이곳에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 당신이 서 있을

 

 그곳에도 눈이 내리고 있을까, 희고 깊은 생각에 잠겨서는

 

 갈피 없이 나부끼는 눈발 속으로 궁금증을 켜 들고 나설 때 나는

 

 이쪽과 저쪽, 어제와 내일, 눈물과 웃음, 밝거나 어둡다는 수식어 뒤에 따라붙는 것들 사이를 비껴가며

 

 당신 쪽으로 난 길을 가로막은 벽들을 하나씩 무너뜨리는 중이지, 말이라는

 

 무늬의 말들, 사랑이라는 발음을 가진 사랑들, 삶이라는 죽음이라는 빛깔을 지닌 순간들, 당신이라 불리는

 

 온갖 것들 쪽으로 투명하게 뻗은 길들의 어깨 너머를 꿈꾸지, 경계를 서성이는 동안

 

 자꾸 눈발 나부끼고 지워진 경계 너머 또 다른 경계가 생겨나도 그냥 말없이 반짝거릴 뿐이지

 

-시집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에서

 

 


 

 

박완호 시인 / 수식어

 

 

수식어라는 말 아시나요

 

아직 가까이 오지 않은 누군가를 위해

꽃 피지 않은 몸 그대로

나뭇잎 뒤에 숨어있다가

그가 불러주기만 하면 한걸음에 달려가

밑천까지 죄 털어주는 여자

 

사방이 벽뿐인 세상,

눈에 보이지 않는 벽까지 무너뜨리며

해골언덕을 오르는 사내의

왼쪽 가슴에서 둥둥 울리는 망치질소리

 

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를 게워냄으로써

마침내 스스로를 건져내는

 

저 빛나는 말씀,

더 이상 닳아질 것도 없는

맨 손이신 어머니

 

 


 

 

박완호 시인 / 배추벌레의 허공답보

 

 

 주름진 초록의 길, 엉성하게 포개진 배춧잎이 잔바람에 푸르르 떨린다

 

 배추벌레 하나 울퉁불퉁한 길바닥을 삼켜가며 공중을 걸어간다 한 발 한 발 배추벌레가 지나간 보폭만큼 허공의 부피가 자란다

 

 초록이 꺼진 자리에 숭숭 생겨나는 구멍들, 길 하나가 지워지고 다른 길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하나를 버리는 건 결국 또 다른 하나를 낳는 일, 나의 전부라고 여겼던 이가 지워진 자리에 시나브로 피어나던 사람처럼, 혹은 나 처럼

 

배추벌레가 사라진 자리에 날아드는 배추흰나비들, 그리고 나의 허공인 당신, 당신들

 

 


 

박완호 시인

충북 진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너무 많은 당신』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아내의 문신』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내 안의 흔들림』 등.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서쪽〉 동인. 현재 풍생고등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