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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성례 시인 / 분홍의 뒷모습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0.
한성례 시인 / 분홍의 뒷모습

한성례 시인 / 분홍의 뒷모습

 

 

옆구리를 찢고 나온 꽃의 뒷모습은 어둡다

 

애인의 그림자를 달고 봄은 사춘기의 어둠이다

 

길바닥으로 쓰러지는 꽃잎을 흉내 내며

 

분홍 걸음들이 빠르다

 

거리는 꽃의 방향에 따라 늘어나고

 

분홍을 움켜잡은 가로등 날개가 돋는 중이다

 

연인들은 분홍에 박힌 신음을 배회하는데

 

봄이 돌아눕는다

 

꽃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가에 매달려 빈 가지를 들여다본다

 

분홍을 갉아 먹은 불빛이 하수구로 기울어진다

 

-시집 『나는 당신 몸에 숨는다』 중에서

 

 


 

 

한성례 시인 / 들판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햇살은 나비의 눈물같이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한성례 시인 / 만개한 벚꽃 아래 남근석은

 

 

새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닿는 봄날 오후

대학캠퍼스의 박물관 정원

촘촘히 늘어선 석상 위로 벚꽃이 떨어져 내린다

음기가 센 땅이라 다수의 남근석을 옮겨놓았다던가

하긴 원래 여자대학이었으니

 

‘한순간’이라는 빗장이 풀린 벚꽃은

절정을 향해 숨을 몰아쉰다

 

누군가의 것을 흉내 내어 만들었을

누군가의 쾌락의 도구였을

누군가의 정염의 징표였을

남근석들이 만개한 벚꽃 아래 환하게 빛난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이 만끽을 위해

 

검자주색 꽃으로 뒤덮인 조릿대밭

평생에 단 한번 꽃을 피우고서

동반 자살하듯 일제히 말라죽는 키 작은 조릿대꽃

 

십 년을 넘게 자라야 꽃이 피는 용설란꽃

백 년 만에 꽃이 핀다 해서 세기의 꽃이라고도 하지만

단 한 번 꽃을 피우고선 장렬히 고사하는 키 큰 용설란꽃

 

벚꽃도 조릿대꽃도 용설란꽃도

대지를 향해 은밀히 인사를 나누고

새로이 태어날 남근을 향해 손을 흔든다

 

지금 피어난 꽃들은 다 사라지고

남근 돌비석만 남아

한참을 더 꽃잎의 진한 눈물을 받아 마실 것이다

 

수액으로 짠 주문을 외우며

가랑잎처럼 가벼운 고양이의 두개골들은

시간의 부재 대신 나뒹굴고

재생의 기회를 기다리며

먼지로 내려앉는 마른 꽃향기로 가슴을 채울 것이다

 

남근석 위로 하염없이 벚꽃이 떨어져 내린다

 

-계간 『시와 표현』 2014년 여름호 발표

 

 


 

 

한성례 시인 / 부장품 여자

 

 

묘실에는 표박된 공기

켜켜이 쌓인 먼지만이 똬리를 틀었고

목관에 새겨진 순장의 기억

애증과 지옥을 되새김질한다

 

순장으로 바쳐진

고분의 부장품 여자

 

한 남자와 두 여자

경주 황남대총 쌍무덤 남분에는

순장 당한 소녀와 함께 왕이 누워 있고

나중에 죽은 왕비는 북문에 혼자 누워 있다.

이 생에서 뜻대로 살았던 자가

몇 명이나 될까마는

죽어서 조차 얽히고 설킨 복잡한 영혼들이다

 

고대 발칸반도의 한 부족에서도

남편이 죽으면

여러 아내 중 가장 사랑받은 아내를 뽑아

가까운 친족들의 손에 살해당해

남편과 함께 매장했다는데

 

남은 아내들은 선택을 받지 못했음을

가장 끔찍한 치욕이라 여겼다는데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그 속담은 개한테나 던져줄까

 

밀폐된 사랑은 늘 불편하여

어깨를 구부리고 잠든 수많은 밤들

늘 그래 왔듯이 내일이 오늘을 끌고 갈 뿐이다 흔적 없는 오늘 또 내일

 

새 한 마리

쌍무덤 고분 위에 홀로 앉아

사심 없는 눈빛으로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한성례 시인 / 도둑고양이가 우는 밤

 

 

 도둑고양이가 응애 응애 운다. 떼거리로 몰려와 울어 댄다. 갓난아이 영혼을 하나씩 삼키고 목청을 돋운다. 배고픈 새끼 고양이가 울고, 음식을 빼앗고, 연적과 싸우고, 교미를 하고, 그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울음소리로 집약된다. 슬프게도 애달프게도 청승맞게도 처량하게도 들리고 심지어 청아하게 들릴 때도 있다.

 

 한밤중에 갓난아이가 느닷없이 우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무언가의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안간힘, 가끔은 지구자기장이 요동치고 땅속 하부 맨틀의 느린 움직임마저 힘을 가해 오고 세상의 온갖 힘에 맞서려는 몸부림이다.

 

 구순이 다 된 어머니는 버섯이란 버섯은 죄다 입에 대지도 않는다. 물컹물컹한 버섯이 아기들의 살점 같다며 씹지 못한다. 어렸을 때 할머니를 따라 옆 마을로 마실 갈 때면 커다란 당산나무를 지나가곤 했는데 나무에 매달아 놓은 아기 시체에서 뚝뚝 썩은 물이 떨어지더라는 것이다. 아이가 죽으면 늑대 같은 짐승들에게 먹히지 않게 땅에 묻지 않고 높은 나무에 매달아 놓는 관습의 그 남쪽 지방에서는 유독 아이를 매달아 놓은 당산나무 아래 통통 살찐 버섯이 지천이었다고 한다.

 

 한밤중 도둑고양이 떼가 울어댄다. 허겁지겁 저 생으로 돌아간 아이 영혼을 하나씩 삼키고, 맑은 영혼은 꼭 그렇게 울었을 법한 갓난아기 울음소리를 낸다. 비유가 아니라 세상을 다 아는 늙어 빠진 입으로 운다.

 

 


 

 

한성례 시인 / 탑은 솟아서

 

 

옥개를 타고 올라온 바람은

해일치는 맞은편에서

돌 빛을 익힌다.

풍화를 품는다.

까맣게 이끼로 끼이면

한 그루 탑은

석화된 나무를 닮는다.

모발 같은 구름을 물고 가는

물가에

얼비치는 몸

어둠이 타는 대석 위

탑은 솟아서

짙푸른 바람을 친다.

 

 


 

 

한성례 시인 / 하얀 나비 한 마리

 

 

 쓰러지자마자 한순간에 숨을 거둔 57세의 아들, 다섯 달 전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슬로모션으로 반추해 보이듯 87세의 어머니 는 중환자실에 누워 하루하루 끈질기게 생을 붙잡고 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 견디게 보고 싶은 날이면 아들을 만나러 그 강가까지 나갔다가 돌아오고 다시 나가기를 반복한다.

 

 아들의 죽음을 알리지도 않았는데, 인사하러 왔더라며 죽었냐고 묻고는 하루를 목 놓아 울고 나서 언어능력도 지각 능력도 놓 아 버리고, 이제 곡기마저 받아들이지 못한 지 며칠.

 초점을 잃은 눈을 깜빡이는 것 외에는 움직일 수도 없지만 의식만은 나비처럼 가벼워 팔랑팔랑 그 강가까지 날아다닌다.

 오늘도 아들을 만나지도 그 강을 건너지도 못한 채 돌아온 모양이다.

 길을 잃지 않고 둥지를 찾아 돌아온 하얀 나비

 한 마리

 

 


 

한성례(韓成禮) 시인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세종대학교 일문과와 同 대학 정책과학대학원 국제지역학과(일본 전공) 석사 졸업. 1986년《시와 의식》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실험실의 미인』,  일본어 시집 『감색치마폭의 하늘은』 『빛의 드라마』 등. 번역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1리터의 눈물』 『달에 울다』 『파도를 기다리다』 등. ‘허난설헌문학상’과 일본에서 ‘시토소조상’ 수상.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