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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승 시인 / 자유의 식성
하이에나가 물소를 물고 가족으로 늘어진다 근친 따라가려 뒷다리에 무게중심 걸었지만 하이에나 새끼가 더 무거운지 잠시 끌려가다 이빨이 침 흘리는 사이 팽팽하게 정지된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발톱 정지 아니라 도착한 자세에서 소나기 다녀간다 이빨에 물소의 피가 스며들자 파래지는 눈 서너 마리가 금세 달라붙어 뒷다리를 허공에 걸쳐놓으니 산 채로 내장을 바닥에 흘리는 물소, 오장육부가 흙이 묻어도 버려둔 채 달아나려 하지만 자존심과 슬픔이 핏물로 쏟아지자 하애지고 만 오후, 뜯겨지는 옆구리와 가슴 제 눈으로 보고도 앞서간 바람을 따라가려는 물소의 다리 몸이 찢어져도 달려갈 곳을 잃지 않고 갈기갈기 물어 뜯겨도 가야할 곳이 있는 마침내 몸은 버려도 버릴 수 없는 버려지지 않는 데로 가야 하는 어미 물소, 다 뜯고서야 물소를 놓아주는 하이에나 하이에나도 허기에서 풀려나 널브러진 저녁 물소의 마지막 저항은 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눈이 깨지고 혓바닥이 빠져도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노을에 반짝이며 굵어지는 물방울 죽어서도 점점 단단해지는 자유가 풀잎에서 솟는다. -시집 <울음의 기원> 중에서
강태승 시인 / 낙화
김 시인은 신춘문예에 백 번 떨어졌다 장 시인은 삼백 번 떨어졌다 하고 최 시인은 웃으면서 오백 번 하면서 술잔을 돌리다가 한 잔 더 마신다
나는 속으로 천 번 떨어졌다고 하려다 문득 얼마나 무능하면! 핀잔 들을까 봐 가만히 웃으면서 연거푸 석 잔을 마시다가
에헤라 꽃이 많이 떨어졌으니 그만큼 열매도 맺히지 않을까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마다 타고난 시기에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다시 석 잔을 혼자서 마시니 뼛속마다 함빡 피었는지 볼이 붉다 아,또 떨어질 꽃잎이 많아 좋구나!
강태승 시인 / 선과 악의 결투?
햇빛이 비추자 말뚝에서 그림자가 걸어 나온다,를 쫓겨났다 물러났다 밀려났다 등장했다 발견했다 그 낱말들이 서로 밀고 당기느라 야단법석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고 반은 틀리고 반은 맞은,
아니면 전부 맞고 전부 틀린 전부 틀리면서 맞은 그림자가 길어지더라도 말뚝은 고요하다 짧아져도 가벼워지지 않는 말뚝에 매인 소를 풀면 말뚝은 단지 땅에 박혀 있는 나무,
그림자가 제 몸으로 다시 돌아오는 저녁이면 말뚝은 어디에 그림자를 간직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이 말뚝보다 깊이 어둠에 박히는 것이다 그 질문의 그림자도 어디에 숨었을까, 라는
말뚝을 품은 채 걸으면 그림자처럼 길어지는 따라오는 동행하는 멀어지는 말뚝의 힘 말뚝을 뽑으면 그림자도 뽑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질문을 밀고 들어와 가지를 벋는다
꽃이 슬슬 피는 것은 새로운 말뚝이 되는 것 선은 악으로 악은 선으로 뽑혀지지 않는가, 라는 거대한 말뚝을 박으니 비로소 고요해지는 말뚝에 불을 붙이자 그림자가 돌아오다 모두 타버린다.
강태승 시인 / 안부安否
벼가 잘 자라는지 논두렁 더듬으면 문득 내 등짝을 헤집는 손이 있다 줄기 잎사귀 밑동을 살피다가 뒤통수 어깨 팔다리를 읽는 햇빛,
지난밤 태풍에 쓰러진 놈 일으키고 흙 묻은 것 툭툭 털다보면 오장육부의 자세를 고쳐놓고 종아리 온도를 높이고 있는 햇빛,
꿋꿋이 실한 놈은 칭찬하고 거름기 부족한데는 비료를 뿌리며 비실비실 거리는 놈 걱정하는 동안 뼛속의 뼈에 차오르는 햇빛,
삽과 괭이로 다시 물길을 내고 낫으로 논두렁 정리하다보면 땀방울 흐른 길 따라 나보다 부지런히 도랑치는 햇빛,
내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읽는 햇빛은 서둘러 오지 않고 급하게 저물지 않는다 다만 논두렁에 앉으면 언제나 나를 다녀가는 햇빛이다.
강태승 시인 / 소와 즐겁게 쟁기질 하는 방법
풀잎마다 이슬방울, 소를 앞세우면 열리는 산길이다 앞도 뒤도 아닌 소와 동행하면 넓어지는 산길이다 개망초 강아지풀 토끼풀 슬슬 뜯는 늙은 소 때문에 구름 머뭇거리는 풍경으로 게을러지는 산길이다
담배 피고 멍에 메운 뒤 깊이도 아닌 얇게도 아니게 대면, 살 차오르는 이랑으로 까치가 벌레 잡는 밭이다 소가 칡넝쿨 호시탐탐 노리면 모르는척 오줌이나 싸고 막걸리 마시고 참나무 그림자로 가슴 누르는 것은
우울을 개울물에 섞이도록 내버려 둔다기보다 개울의 태양이 저승길도 비추도록 하는 요량이다 정오엔 숲으로 소를 풀어 놓으면 멀리도 가깝지도 않는데서, 되새김질 종일 하려는 수작으로 눕는 소
덩달아 낮잠 들면 산그림자 앞서는 저녁이 쉽게 온다 진달래 피면 진달래 먹이고 머루 잎도 나누다 보면 계집애처럼 개울 나풀나풀 건너다니는 늦가을이 밭 가장자리로 어어 하는 사이 마른 발목을 보인다
눈 내리면 외양간에서 퍼질러 두러 누운 소의 엉덩이 소일거리로 빗자루로 쓸어주면 주인인양 눈을 감는 소 군자君子보다 우자牛子로 살고픈 생각이 들면 좋은 농사꾼이겠다.
강태승 시인 / 울음의 기원
사자가 목을 물자 물소의 울음이 사자의 이빨에 물려 사자 핏속으로 섞여버렸다 발버둥 칠수록 물소의 설움 분노 억울함 물소의 살아온 내력과 살아갈 날의 시간 사자의 송곳니에 오도 가도 못 하다가 차라리 사자의 이빨을 타고 개울 건너 사자의 동족으로 걸어가고 있는 오후,
물소 목숨은 먹지 못하고 고기만 먹은 물소 추억과 사랑은 한 점 씹지 못하고 물소의 식은 뼈다귀만 물고 다니다가 하이에나가 나머지를 숲으로 달아나자 바람이 앞질러 엎어놓는 생토(生土)에 올바르게 싱싱해지는 줄기와 가지 끝 푸르른 하늘로 나무는 둥근 웃음 걸쳤고,
표범의 발톱에 남은 피를 햇빛은 말려도 날아오른 독수리가 폭력을 다시 펼치자 오히려 핏줄 선명하게 빛나는 바오밥나무 허기의 등불이 사자 오장육부에 켜지면 계곡 타고 솟아오르기 전에 고기를 물어야 꺼지는 불로, 나일강은 세상에서 긴 어둠으로 반짝인다
강태승 시인 / 벚나무를 보면서
나도 저 벚나무처럼 오지게 꽃을 피우고 싶다 손과 발 이마와 정수리에도 꽃을 달고 싶다 심장과 간 오장육부 어디든지 꽃 피우고 싶다 심지어 불안 우울 절망에도 꽃을 마구 달고 봄비 맞으면서 개울가에 당당히 선 나무처럼 나도 핏줄마다 뼛속 어디든 빈 곳 없이 피워 한나절이라도 벚나무처럼 환하게 서고 싶다
미치도록 꽃을 피우고도 올바르게 선 벚나무 환장하게 달고서도 한마디 말이 없는 나무 온몸이 부서질 듯 사지(四肢) 찢어질 듯이 보석 또는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수류탄처럼 제 안의 모든 것을 밖으로 던져버린 나무 나도 저렇게 하늘과 땅에 섰다가 가고 싶다 한나절이 아니라도 잠깐의 들숨과 날숨 사이,
개나리 진달래 목련 아니면 민들레 냉이꽃 논두렁 밭두렁이면 어떻고 외딴집이면 어떠랴 아무도 찾지 않는 암자 뒤뜰이래도 좋으니 제 꽃에 제 그림자도 맑게 빛나는 벚나무 그렇게 날 찾아오는 날이 오늘이면 좋겠다 아니 너도 이미 벚나무보다 많은 꽃을 달고 하늘과 마주친 천지를 맨발로 여행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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