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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훈 시인 / 너는 연민의 힘
다리가 부서지는 사람이 지구를 차려고 한다
열렬해지면 주전자에서 김이 빠진다 부엌이 소란스러워지면 그의 마음 또한 수군거린다 그는 너무 메말라 금방이고 비약할 것만 같다 그는 너무 길어서 반 토막이 되어 단명할 거 같다 그는 너무 대단해서 모조리 파생되는 사람으로 기억될 거 같다 내 둔전이 그에게로 향하면 나는 그의 종아리가 되어 결사를 두둔한다 그는 참 젊고 결코 강건하지 않아서 나를 대여해 주고 싶고 기꺼이 반납을 거부할 수도 있겠다 그의 하와이안 조명 덕에 가난한 밤의 거실에서 부유한 낮의 왕실로 당도할 수 있었다
성립되지 않는 연민도 나의 힘이다
정경훈 시인 / 마로니에 공원
비둘기가 고개를 둘러대고 있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고 그렇게 뒤를 돌아보면 비둘기는 백색이었다 날아오른다 말끔하게 바둑돌을 부리에 물고
다시 날아오른다 그 사람의 발길질 때문에
핫도그 가게 앞에만 서면 폭력의 재해가 맴돌았던 예술들이 매대에 놓여 있다 그 역사를 전범하는 희극이 소시지처럼 숨어 있다 이모, 설탕 묻혀주세요 케첩 이거 쓰면 되는 거죠 누군가는 밀고에 의해 누군가는 이모의 권력에 의해 핫도그를 사 먹는다
이토록 간단한 과정이었으나 씹히지 않는 대물림은 구역질을 일으키기에 내 옆과 나와 너는 핫도그를 겨우 사 먹어야 했던 가난한 자였으리라
날아갔던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고 그 발길질이 예술가였음을 빙자하였으니
예술이라는 건 무엇보다 무거운 탓에 내려놓지 못하는 것 가라는 건 가야 할 길을 잃어서 갈 곳이 없다는 것
이모, 요즘 들어 핫도그가 작아진 건 왜일까요
정경훈 시인 / 파리를 가지 못한 젊은이의 몽정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보도블록을 걷다가 엊그제 구두를 밟고 지나간 말라뮤트가 생각나서 괜히 울컥할 때가 있다 욕봤다 왜 하필 전봇대를 차 본다 있는 힘껏 디딤 발을 딛고 없는 힘껏 공을 상상한다 파리의 한옥과 도시의 몰락 가지 말자고 하면 가지 않았을 텐데 못 간다고 하면 너네들 죽여 패서라도 가야겠다는 태생의 객기 아, 나는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부르며 축구를 했던가 그라운드를 뛰어다닐 때 그리고 부조리가 끝난 후에 가시나를 위하여 바친 러브송은 몇 명의 귓밥을 휘둘렀는가 그 노래방 그 단칸방과 그 냉장고 그 매실과 그 목마름 밤과 달빛에 비치는 그이의 목젖 습관처럼 헤어져도 버릇이 들어 왕래하게 되는 이성의 항구 나는 많이도 버렸다 인사는 각별하게 하지만요 둘이 있으면 이별할 것 같은 사람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수십 개의 단톡과 잦은 모임 상하관계 상관없이 우리 친해요 말하지만 나는 아닌데요, 라고 자위하는 관계의 굴레 같은 것 어느 날 또는 매일 혼자 앉아 미래를 위하여 손 편지를 쓴다 쓱 쓱 싹 싹 사람들은 각자의 예지력으로 날개를 펼치고 부리를 벌린다 재는 시발년이 아니라 시발놈이구나 틀렸다 이건 비보야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 눈물을 숨기고 구두를 닦는 거라고
-시집 <아름답고 우아하기 짝이 없는>에서
정경훈 시인 / 백야
달이 가시고 당신에게도 아침이 왔다
축하해
보이지 않았던 것들과 보고 싶지 않았던 것들에서 우리는 굉장한 이유들을 발견했어
-시인시대 2024년 봄호
정경훈 시인 / 두 번째와 첫 번째 사이
두 다리 멀쩡한 것이 성에 차지 않았으니 모쪼록 발품을 팔아 새가 되었습니다 당신에게로 도달할 수 있는 지형이 평안해졌다는 것입니다
줄자를 길게 늘어뜨려 수평을 만들고 칠석의 달이 차오르면 견우와 직녀가 남기고 간 오작교가 떠오릅니다
깃털의 결을 다듬고 부리를 닦으며 매무새를 정돈해봅니다
당신을 견주니 당신도 모르게 보이는 당신의 자태 파동으로 인해 부서지는 나의 심장 그 안의 호수 이성의 박멸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밤하늘에서 가장 빛날 수 있는 행위를 고릅니다 나의 첫 번째 여행 두 개의 다리로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숨이 벅차면 자신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두 개뿐인 다리로 당신에게 가려는지요 오, 나의 superego.....
고백과 고백의 다리에서 천 마리의 학이 날아오릅니다
-시집 <아름답고 우아하기 짝이 없는>에서
정경훈 시인 / 연인과 응보 변기에 앉기까지 가시 돋은 입술에 담뱃재가 묻기까지 뒷간으로 달려갑니다 배수구가 막힌 욕실로 뛰어드는 구릿빛의 전투원들처럼 안간힘과 사투 눈물을 짜내며 변을 참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만나던 네가 기억하지 못한 영화는 절찬 상영 중입니다
된통 권태를 덮어쓴 사람처럼 변을 눌 때는 필히 담배를 피우고, 너는 언제나 대화를 시도합니다 누군가는 전염처럼 참는 병을 앓곤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등 뒤에서 자신의 가슴을 칠 뿐입니다 문을 열고 나가게 되면 너의 시도는 잘 그려진 화장기에서 시작될 것이고 병은 민낯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어젯밤 미련하게 먹다 미련하게 토를 하듯, 입가를 훔치며 편집점을 찾아 허우적입니다 뒤꿈치가 공중에서 떨리는 와중에 뒷간 밖은 무용과 풍악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꼭 외부에서만 허락된 금기 같습니다 좋으냐 하면 좋으다 부치고 싫으냐 해도 좋으다 부치고, 언젠가 우리는 마지막 관람객이었을 것입니다
연인과 응보에 맞서는 나의 변이입니다 혹시 모릅니다 떨고 있다는 건 떤지도 몰랐다는 것 변기물을 내리면 알 수 없는 미래와 알 수 없던 과거가 배설처럼 소실처럼 외부로부터 사라지고, 조용히 일어나 이 문을 열면? 혹시 혹시나 모르는 것입니다
정경훈 시인 / 음악이 있다면 영원히
그렇게나 예뻤던 가을에 낙엽처럼 울상이었던 사람
두르지 못한 살을 그리워하는 그 사람, 뼈만 걸치고는 춤을 춘다 그 사람이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그를 아끼고, 굵다가 앙상해진 어깨를 타고, 흘러 흘러 세계는 동질이 된다 그는 오래 삭힌 홍어를 씹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나는 짧게 들은 콧노래와 융합되어 그의 음악을 삼킨다 가을의 독서가 일제의 잔재라면 가을의 음악은 무엇의 제국이란 말인가 무엇의 의미를 찾다가 울상으로부터 일그러진다
낙엽의 짓거리는 파동이, 그 사람을 애쓰게 한다
-시집 <아름답고 우아하기 짝이 없는>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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