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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시인 / 책의 용도
이십팔 년간 사용해온 연구실 비워주려니 지나간 세기의 고전 양서들 천여 권이 쏟아져 나옵니다 집의 서재도 발 디딜 틈 없이 책이 쌓여 옮겨갈 곳도 없습니다 책 욕심 많고 책 사랑 깊던 젊은 날의 흔적들 한 권 한 권 책갈피마다 남아 있어 선뜻 내 손으로 버릴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인터넷 검색에 열중할 뿐 오래된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져가지도 않지요 정년퇴임을 맞은 백면서생이 어찌할 바 모르고 돌아서서 창밖의 교정만 바라볼 때 청소원 아줌마와 수위 아저씨가 나타나 순식간에 책더미를 치워줍니다 근으로 달아서 파지로 팔면 용돈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김광규 시인 /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조카들까지 모여서 모처럼 생일잔치 벌여준 날 70년 전에 내가 태어난 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어머니 젖꼭지에 댓진을 발라 네 살짜리 막내아들 젖을 뗀 날 밤새도록 계속된 폭격이 겨우 멈춘 뒤 방공호에서 기어 나와 오래된 기와집 폭삭 주저앉은 꼴 믿을 수 없던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머리가 허옇게 세고 눈물주머니가 아래로 처져 깜짝 놀라게 늙은 모습 거울 속에서 발견한 날 36년간 다닌 직장에서 등 떠밀려 퇴직하고 산길 내려오다가 넘어져 깁스를 한 채 목발 짚고 절뚝거리던 날 20년 동안 피우던 담배 끊고 다시 30년이 지나 마침내 술까지 끊게 된 날 심장혈관 전문의 진단을 받고 달라트렌 정과 아스트릭스 캅셀 매일 먹기 시작한 날 오늘이 그날이다 평생 써온 일기장에 먹칠을 하고 온 가족을 오래도록 괴롭히다가 마지막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세상 떠나는 날 내일이 내게서 사라져버리는 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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