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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광규 시인 / 책의 용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3.
김광규 시인 / 책의 용도

김광규 시인 / 책의 용도

 

 

이십팔 년간 사용해온 연구실 비워주려니

지나간 세기의 고전 양서들

천여 권이 쏟아져 나옵니다

집의 서재도 발 디딜 틈 없이 책이 쌓여

옮겨갈 곳도 없습니다

책 욕심 많고 책 사랑 깊던 젊은 날의 흔적들

한 권 한 권 책갈피마다 남아 있어

선뜻 내 손으로 버릴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인터넷 검색에 열중할 뿐

오래된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져가지도 않지요

정년퇴임을 맞은 백면서생이 어찌할 바 모르고

돌아서서 창밖의 교정만 바라볼 때

청소원 아줌마와 수위 아저씨가 나타나

순식간에 책더미를 치워줍니다

근으로 달아서 파지로 팔면

용돈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김광규 시인 /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조카들까지 모여서

모처럼 생일잔치 벌여준 날

70년 전에 내가 태어난 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어머니 젖꼭지에 댓진을 발라

네 살짜리 막내아들

젖을 뗀 날

밤새도록 계속된 폭격이 겨우 멈춘 뒤

방공호에서 기어 나와

오래된 기와집 폭삭

주저앉은 꼴 믿을 수 없던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머리가 허옇게 세고

눈물주머니가 아래로 처져

깜짝 놀라게 늙은 모습

거울 속에서 발견한 날

36년간 다닌 직장에서 등 떠밀려

퇴직하고

산길 내려오다가 넘어져

깁스를 한 채 목발 짚고

절뚝거리던 날

20년 동안 피우던 담배 끊고

다시 30년이 지나 마침내 술까지

끊게 된 날

심장혈관 전문의 진단을 받고

달라트렌 정과 아스트릭스 캅셀 매일 먹기

시작한 날

오늘이 그날이다

평생 써온 일기장에 먹칠을 하고

온 가족을 오래도록 괴롭히다가

마지막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세상 떠나는 날

내일이 내게서 사라져버리는 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김광규 시인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및 同 대학원 독문과 졸업. 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하여 등단. 1983 <귄터 아이히 연구> 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대장간의 유혹』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 등. 오늘의 작가상, 녹원 문학상, 김수영 문학상, 편운 문학상, 대산 문학상, 이산 문학상, 시와 시학 작품상 수상. 이미륵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