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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라인지역의 데보라 힐데가르트 수녀의 영성

by 파스칼바이런 2009. 4. 26.

 

라인지역의 데보라 힐데가르트 수녀의 영성

(1)

정홍규 신부(대구대교구)

 

 

살아 있던 시기에 이미 「라인지역의 시빌」, 「라인지역의 데보라」라고 알려졌던 12세기 중부 라인강변의 한 도시, 빙엔의 한 베네딕도회 수녀! 아직까지 성인으로 시성되지도 않았고 교회학자로 인정되지도 않았지만 독일어권 안에서는 공식적으로 축일을 기리고 성인으로 널리 공경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유해를 모시고 공경하는 독특한 위치에 있는 이!

어려서부터 허약하고 자주 병으로 고생하였지만 81세가 되도록 장수하면서 넓은 분야에 걸쳐 많은 글을 남겼다.

중세의 어떤 여성도 자신의 이름으로 이만큼 많은 공적인 글을 남기고 공적으로 활동하였던 이, 그리고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렇게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는 없었다.

 

어려서부터 비전을 보았으나 43세에 『보고 들은 것을 글로 쓰라』는 천상의 소리를 듣고 비전을 기록하기 시작하여 81세까지 3권의 신학저술과 2권의 자연학 및 치료에 관한 책, 그 안에 57곡의 노래와 음악극, 70여 편의 시와 성 디지보트, 성 루페르트, 성 마르틴의 전기, 성 베네딕도 규율 및 성 아타나시오의 삼위일체에 대한 글 설명, 복음서 주해, 38가지 신학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 등의 글과 수 백 통의 서신을 남겼다.

 

49세 때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가 그녀의 비전을 믿을 만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전 유럽으로 이름이 알려진 후 '하느님의 소리'에 권위를 두고 수녀원의 생활 및 운영으로부터 세상 정치적인 일들에까지 자신이 보고 들은 비전을 관철해나갔다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나는 종말론적인 시기라는 신학적인 흐름이 거세게 일던 때, 대립과 깊은 변화의 시기에 당시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과 능력, 교회와 국가의 권력자들에 대해 기꺼이 맞서고자 했던 그녀의 용기는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다.

13세기, 신비적인 것보다는 이성적으로 묻고 논증하고 결정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스콜라 철학과 엄격한 대학 중심의 교육이 자리 잡으면서 이러한 틀을 벗어난 힐데가르트의 자연과학적인 저술과 신학-우주론적인 비전의 저술들은 곧 관심을 잃었다.

오히려 전체 저술과 신학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라 예언자적인 역할로서 교회의 부패와 카타르 종파의 활동 등 당시의 새로운 종교상황과 운동들에 대해 보낸 서한들만을 발췌하여 힐데가르트 사후 태동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꼬 수도회의 두 탁발 수도회에 대한 기존 수도회와 재속 사제들의 반감을 확증해주는 예언으로 각색해서 다시 쓰여진 글들이 널리 전해져서 힐데가르트의 비전에 대한 불신과 오해를 낳게 하였다.

 

- 성 힐데가르트 수도원 성당 전경

 

힐데가르트가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꼬 수도회를 적그리스도로 보았다는 일방적인 해석과 그의 글에 대한 각색으로 힐데가르트의 비전이 오히려 악마의 영향이라고 주장하는 대립적인 흐름도 강했다.

 

당시 있었던 시성추진 움직임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마인쯔 교구에서 계속 추진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이렇게 당시 대학의 신학, 철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고 보여 진다.

 

15세기, 고대의 문화에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인문주의 시대에 들어서서야 힐데가르트에 대한 관심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해서 그 지역 성인으로 공경 받기 시작하였고, 19~20세기에 들어서면서 지역을 넘어서서, 그리고 1940년에는 로마 전례 성성에서 허락하여 독일 전체에서 축일을 지내게 되었고 1971년에는 전 독일어권에서 축일을 지내게 되었다.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다양한 분야에서 빙엔의 힐데가르트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위대한 독일인』으로 『첫 번째 위대한 여성 신학자』로 나아가서는 『12세기 학문의 전위(前衛)』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힐데가르트에 대한 관심이 보편화되고 대중화되면서, 13세기 탁발 수도원에 대한 해석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라 특정한 관심에 따라 텍스트 일부만을 떼어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나 상업주의적인 붐으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면서 신학과 영성적으로, 또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힐데가르트의 원래 의도를 좀 더 정확히 보는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98년 탄생 900주년을 경축하면서 이렇게 축적된 연구의 성과들이 출간되고 개별적, 지역적 연구들을 종합하고 묶는 인터넷 연결망이 구성되었다.

힐데가르트의 영성과 저술은 그 삶의 자리, 그가 살았던 시대, 지역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새로운 연구 성과의 기반 위에서 생애와 영성을 살펴보고 이런 영성적인 면을 담고 오늘날 적용되고 있는 힐데가르트 치료법에 대해 살펴본다.

 


 

 

라인지역의 데보라 힐데가르트 수녀의 영성

(2) 생애 (상)

교회 쇄신의 변혁기에 활동, 어린 나이에 청빈과 금욕생활 시작

 

 

    - 성 힐데가르트 수도원 성당 내부.

1098년에서 1179년까지 힐데가르트가 살았던 시기는 날카로운 대립의 시기였으며 이전과 이후의 시대를 갈라주는 깊은 변화의 시기였다.

황제권과 교황권이 대립하여 분리되고 동서 교회가 나뉘고 세속의 지배세력에 교회가 의존하고 종속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수도원 운동 및 갖가지 평신도 운동이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고 이끌었으며 1, 2차 십자군전쟁이 있었다.

정치, 사회적인 혼란과 대립 속에서 라인지역의 기근으로 많은 이들이 굶주리기도 했던 때여서 다가오는 천년 왕국을 위해 현세를 멀리하고 철저한 금욕과 고난을 강조하는 종교운동이 나타나고 이들을 적그리스도로 단죄하는 종말론적인 신학이 영향을 미치는 시기이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 문화가 많이 전해졌는데, 특히 1차 십자군 전쟁 때는 어린이와 농노, 일용노동자들로 구성된 십자군도 있어서 넓은 층이 이슬람 문화에 접하게 되었다.

한편 문화 학술적으로는 대학교육의 기초가 되는 스콜라식 학교교육으로 "12세기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이전의 학문들을 집대성하여 편찬하는 시기였다. 많은 이들, 많은 것들과의 지적인 교류를 통해서 학문이 확대 심화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힐데가르트가 지냈던 지역의 특징과 상징적인 의미들이 그 생애와 저술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빙엔의 힐데가르트'라고 하지만 빙엔에 위치한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에선 29년, 그 이전에 글란강과 나에강 어구에 위치한 디지보덴베르크에서 10여년이 더 긴 38년을 살았다.

하지만 비전을 인정받은 후 또한 비전에 의거해서 힐데가르트 스스로 수녀원을 옮기기로 결정했고, 또한 이 곳에서 효과적으로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인 영향력을 펼쳐간 곳이 루페르츠베르크이므로 '빙엔의 힐데가르트'라 알려진 대로 이 지역이 차지하는 의미가 힐데가르트의 사상에 더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힐데가르트의 생애를 살펴보며 이런 연관성을 좀 더 깊이 알아본다.

 

힐데가르트는 귀족의 가문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은수 생활을 하기로 결정한 6살 위인 슈폰하임의 유타에게로 보내졌다.

당시 수도원은 여성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리고 생존이 위협을 받는 그 시기에 어린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에게는 수녀원이 건강과 삶을 보장해주는 곳으로 고향의 집보다 더 안전한 곳이었다.

유타도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3년 정도 당시 유타의 교육을 맡았던 귀족 출신의 과부 우다에게서 함께 교육을 받았다.

아마도 자신의 교육을 맡은 우다의 영향과 가족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개혁 수도원의 영향으로 12세기의 종교개혁이라 일컬어지는 당시 종교운동의 영향을 깊이 받은 유타는 평생을 순교자와 같은 고난의 순례(peregrinatio)를 하려 했다.

11세기부터 평신도들이 다양한 형태로 수도생활이나 은수 생활과 비슷한 종교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시작했다.

삶의 모든 영역이 이 흔들리는 변화의 시기에 특히 많은 여성들이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해서 초기 공동체 이후 처음으로 서구 라틴 교회 내에서 여성들이 큰 중요성을 차지하게 되었다.

힐데가르트가 14세 때에 유타와 함께 베네딕트 수도회 수녀로서 허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일반적인 경향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타가 원했던 그런 종교생활방식은 여성에겐 아주 드문 형태였다.

 

유타는 디지보덴베르크의 남자 수도원 옆에 유거지를 정하고 힐데가르트와 다른 한 소녀와 함께 세상과 격리되어 청빈과 극단적으로 엄격한 금욕생활로 자신을 성화하는 은수생활을 시작한다.

 

후에 루페르츠베르크로 수녀원을 옮긴 후에 힐데가르트가 저술한 성 디지보트와 성 루페르트에 대한 전기에서 두 성인의 특징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디지보덴베르크는 그의 자기성화를 추구하는 엄격한 생활방식에 대한 반대자들의 거센 반발에 주교직을 내놓고 완전한 자기성화를 추구하며 이방인들에게로 고난의 순례길을 가다가 이 곳에 정착하여 수도회를 세우고 홀로 숲에서 지내며 엄격한 고난의 수행을 계속했던 아일랜드 출신의 은수자 디지보트의 삶을 모범으로 삼아 지내던 곳이었다.

디지보트 성인이 이 곳에 정착한 이유가 있듯이 디지보덴베르크는 교통의 줄기인 강변이 아니라 숲에 위치한 곳으로 위치나 교통 상으로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외진 곳이었다.

이 곳에서 힐데가르트는 유타와 한 방에서 생활하면서 베네딕트 성인의 규율대로 매일 일곱 번의 시간경을 바치고 신구약 성서와 옛 교부들의 가르침을 읽고 들으며, 자신들의 먹거리에 필요한 야채와 향신료 겸 약초를 재배할 수 있는 텃밭을 재배하며 지냈다.

이렇게 매일의 기도와 전례를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과 라틴어를 익히고 매일의 생활 모든 것을 성서의 말씀, 표현으로 담고 살았다.

 


 

 

라인지역의 데보라 힐데가르트 수녀의 영성

(3) 생애 (중)

43세때 예언가로 부르심 받아 극단적 금욕의 폐해 지적

 

 

  - 성서를 읽고있는 힐데가르트 수녀.

디지보덴베르크의 생활이 형태상으로 이렇게 세상과 격리된 것이었지만 세상의 소식과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당시의 수도원은 여행자들이 묵는 곳이어서 남자 수도원에 오가는 귀족들을 통해서 소식이 전해지기도 하고, 또한 35년간 계속된 남자 수도원의 성전 건축을 위해 오가는 건축기술자들을 통해서도 많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라인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온 이들도 꽤 있었다.

 

유타는 마치 신탁(神託)을 찾듯이 삶의 기로에서 예언적인 말씀을 찾는 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일과 축일에도 몸에 고난의 사슬을 감고 지낼 정도로 혹독한 고난과 단식, 기도로 자기성화의 길을 걸었다.

반면 모태에서부터 비전의 은총을 받았다고 하는 힐데가르트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이런 혹독한 자기수련은 견뎌낼 수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힐데가르트는 오히려 「몸과 영혼이 하나」라는 신념을 더 굳혔다.

후에 자신의 비전에서 힐데가르트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창조하신 것이므로 몸도 하느님의 선물이며 영혼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이 살찌도록 돕는 것』이라고 하며 『그러므로 몸을 잘 돌보는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덕인데 지나치게 몸을 학대하는 극단적인 금욕은 오히려 창조주가 주신 덕을 유지하는 힘, 겸손과 사랑을 잃게 하고 평화로운 모습보다 분노에 싸인 모습을 보이게 한다』고 밝힌다.

 

힐데가르트가 어려서부터 비전을 경험했던 것을 함께 지내는 유타에게 감출 수 없었지만 극단적인 고행으로 자기성화의 길을 추구하는 유타는 힐데가르트가 받은 비전의 은총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유타만이 아니라 디지보덴베르크 수도원의 수도자들도 대부분 같은 입장이었다.

 

유타의 사후 5년이 지나서 힐데가르트가 43살이 되었을 때 『보고 들은 것을 글로 쓰라』는 천상의 소리, 곧 저술가로서, 예언가로서의 부르심을 듣는다.

힐데가르트가 첫 저술 「길의 조명(照明)」(Scivias)의 서문에 기록하였듯이 이 부르심은 그녀를 뒤흔들어 놓았다.

처음에 힐데가르트는 이를 거부했다. 감히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이 될까봐 두려웠다.

내적인 갈등과 분열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힐데가르트는 이 상태를 수도원장의 대리이자 그녀의 스승이며 고해사제인 폴마르에게 말했다.

 

그녀가 비전을 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폴마르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르도록 고무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직무를 이행하기로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면서 병이 나았다.

그녀가 글을 쓰면 폴마르가 내용이 바뀌지 않는 한에서 다듬어주기로 했다.

첫 저작 「Scivias」를 완성하기까지는 10년의 시간이 걸렸으나 이렇게 자신이 보고 쓴 것을 외부에 알리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그녀는 클레르보의 베른하르트(Bernhard von Clairvaux)에게 자신의 글을 평해주도록 청했다.

힐데가르트의 글이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하다는 인정을 받는 이후의 행로(行路)에 이 한 걸음이 아주 중요한 행보(行步)가 되었다.

 

1147년 트리어 시노드에서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가 힐데가르트의 비전을 믿을 만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그녀의 이름이 전 유럽으로 알려졌다.

교황이 그의 비전을 인정한 후 많은 이들이 힐데가르트를 「라인지역의 데보라」로 여겼고 힐데가르트 자신도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했다

그러나 디지보덴베르크라는 외진 곳에 갇혀서는 비전의 빛을 비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리적으로 남자 수도원에 종속된 상황에서 남자 수도원에서는 여성 공동체를 계속 엄격한 금욕적 규율을 따르는 은수자 공동체로 유지하려 하였는데, 남자 수도원에서 모범으로 보는 그러한 순교에 가까운 극단적인 고행을 통한 자기성화의 방식은 비전의 은총을 입고 세상에 예언자적인 역할을 하고자 하는 힐데가르트의 기본관점과 일치될 수 없었다.

 

힐데가르트는 「내적인 조명」에서 새로운 수녀원이 서 있는 장소를 보았던 곳, 루페르츠베르크로 수녀원을 옮기기로 했다.

쿠노원장이 그녀의 이 소망에 반대했지만 고위귀족인 공동체 수녀들의 가족들의 지원으로 마인쯔 대주교를 움직여 루페르츠베르크에 수녀원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거의 2년에 걸친 이 대립기간에 힐데가르트는 중병을 앓았다.

수도원장의 지시와 「내적인 빛」의 지시 사이에서 마비된 상태로 바위덩어리처럼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쿠노원장이 루페르츠베르크로 수녀원 이주를 허락한 다음에야 그녀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1150년 루페르츠베르크로 이주했다. 루페르츠베르크로 떠나면서 힐데가르트는 디지보트 성인으로 대표되는 디지보덴베르크에서의 종교적 관점과 생활상, 곧 세상을 떠나 고행으로 자기성화의 길을 찾는 은수자로서의 상을 완전히 벗었다.

 


 

 

라인지역의 데보라 힐데가르트 수녀의 영성

(4) 생애 (하)

‘창조된 모든 것은 선하다’는 전제아래 통합적인 창조영성 구현

 

 

루페르츠베르크에서 힐데가르트가 저술한 성 루페르트의 전기를 보면 그곳으로 수녀원을 옮긴 의미가 잘 나타난다.

영주의 가계인 성 루페르트는 한 때 고행의 순례길을 떠났으나 이러한 뜻을 내재화하여 삶 속에 구현하리라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당시 교통의 연결점이며 많은 이들의 교류지인 나에강 어구 루페르츠베르크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건물들과 성전을 짓고 자비로 이 지역을 다스려 문화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였다.

일찍 과부가 된 성 루페르트의 어머니 마르타가 자신의 출신을 생각지 않고 청빈한 삶을 택해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고 기도와 단식으로 생활하며 모범을 보임으로써 아들에게 그러한 신앙을 새겨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루페르츠베르크로 수녀원을 옮긴 의의는 곧 교류의 중심지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자선과 덕으로 생활하는 독립적인 수녀회로서 자리매김하며 비전에 충실하게 자신의 예언자적인 소명을 이루어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의 빙엔과 루페르츠베르크는 중세 중심도시들을 이어주는 교통로였던 라인강과 나에강이 만나는 곳, 그리고 중부 라인으로부터 각 지역으로 연결되는 육로가 교차되는 곳. 라인강의 지형적 조건으로 육로와 수로를 바꾸는 중간 정류지가 되는 곳이었다.

힐데가르트가 옮길 당시 루페르츠베르크는 폐허가 된 상태였으나 빙엔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적인 도시이고 특히 무역이 발달한 곳이었다.

반면에 힐데가르트가 옮기기까지는 종교공동체들은 적은 편이었다.

남자수도원에 속한 여성공동체가 몇 있었을 뿐 독립된 여성 수도원은 없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의 수녀원이 옮기는 시기가 수녀회가 많이 설립되던 시기여서 그 즈음에 이 부근에 9개의 수녀원이 설립됐다.

대부분 아우구스티노회 소속이었다. 그 중에는 오래 유지되는 곳도 있고 쇠퇴하는 곳도 있어서 힐데가르트는 1165년 라인 강 건너 편 아이빙엔의 옛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 건물에 제 2의 수녀원을 세웠다.

이전의 수녀원이 귀족출신들만 받아들였던 데에 비해 이 곳은 귀족출신이 아닌 다른 이들도 받아들였다.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은 당시 귀족들과 고위성직자들의 방문지이고 묵어가는 곳이었다.

그 중에는 고위 정치가들만이 아니라 오랜 기간 오리엔트를 여행하고 아라비아 의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던 세네카(Ceneca)와 콘스탄틴 아프리카노(Konstantinus Africanus)도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이들을 통해 세상을 보고 듣고 또 비전에 근거해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전했다.

'하느님의 소리'에 자신의 권위를 두고, 곧 '하느님의 나팔소리'에 근거해서 교황과 황제, 주교들과 백작들, 남녀 수도원장들, 그리고 동료 수녀들과 수사들에게 서신으로 때론 설교여행으로 직접 들은 말씀을 전했다.

어느 누가 감히 천상의 소리에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힐데가르트는 정치적인 사건들에 관여하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교황과 사제권의 우선에, 자신의 권력만을 믿는 황제에게 반대해서, 신분구분을 무시하고 평등화하려는 개혁수도원에 반대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그러나 또 한 편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도 나섰다. 수 백 통의 서신을 보냈다.

 

- 힐데가르트의 염원을 담고 유유히 흐르고 있는 라인강.

 

수도원과 관련해서 갈등이 있을 때에도 서신과 함께 오고 가는 사람들을 전달자로 해서 더 구체적으로 의견을 전하도록 하여 관철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수녀원인 루페르트 수녀원에 당시 통용하던 수도원 재산 관리인을 두도록 하는 것에 반대하여 예외적으로 마인쯔 주교의 보호하에 들어가도록 했고 1178년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 수녀원안에 교회에서 파문당한 청년을 묻어준 것과 관련해서 마인쯔 교구에서 성무제한조치가 내렸을 때에도 결국 대주교 스스로 그 조치를 해제하도록 관철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은 무엇이나 선함이 깃들어 있다는 전제하에 우주와 자연, 인간 모든 창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으며, 몸과 영혼도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자신의 신학에 따라 몸과 영혼, 자연과 사회 어느 것에도 관심을 제한하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심과 질문에 대화하고 소화하고 답하면서 지식의 폭을 넓히고 깊게 했다.

또한 이런 폭과 깊이가 그녀의 비전에 다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일요일에 수녀들이 신부처럼 긴 비단옷에 머리를 풀고 황금관을 쓰고 제단에 나아가도록 하기도 했다.

당시 새로이 대두하던 '그리스도의 신부론'의 구현형태였다.

노래 외에 성악극을 작곡하여 수녀원에서 공연하게 했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새끼들을 낳아 키우는 동물의 세계를 깊이 관찰, 분석하며 여성과 남성의 성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1179년 9월 17일, 비전에 바탕을 두었던 특별한 삶과 같이 둘러선 수녀들에게 특별한 표징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라인지역의 데보라 힐데가르트 수녀의 영성

(5) 영성

인간과 우주의 상호의존성 일깨워, '죄'보다 창조의 '사랑' 강조

 

 

지구 생태계의 위기가 나타나면서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영적으로 새로운 방향과 창조적 비전을 찾으려는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긍정적인 점은 이 지구가 정보 하이웨이 인터넷을 통해서 지구 전체를 "외적으로" 신경화하면 할수록 떼이야르 샤르뎅 신부님의 비전처럼 사람들은 더욱 더 "내적으로" 영성화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사회와 생태와 인간의 삶을 연결시킬 수 있는 전일적인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시대적 징표나 변화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그다지 중요하게 보지 않았던 시대, 중세에 대한 관심 특히 12세기 힐데가르트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오늘날 상당히 높아졌다.

 

힐데가르트가 살았던 그 당시 중세는 시대를 가르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감겨 있었고, 힐데가르트의 영성은 그 이후의 주된 흐름에서 밀려있었을 뿐만 아니라 힐데가르트의 많은 글과 노래와 그림이 거의 8세기 동안 응달에 묻혀 있었다.

늦게나마 다양하고 풍부하게 오늘날 그녀의 영성을 우리의 실제 삶에 끌어 당겨 보려 한다.  물론 많은 부분이 21세기의 현대인에겐 낯선 12세기의 세계와 가치관을 담고 있고, 또 그와 결합된 상징과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 영성과 접근법이 현대의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는 관건이 되고 있다.

 

현재에 시사하는 영성적인 틀과 내용들을 살펴본다.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통합

 

힐데가르트 영성의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으로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를 모든 것을 주재하는 초월적인 하느님, 그러나 창조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 안에서 서로 연대하여 이어가도록 일깨우는 잠재력, 사랑으로 작용함을 전하는 사랑의 영성, 사랑의 신학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면서 그 분이 이 세상 삶에서 겪은 고통과 수난을 강조하게 되고, 그것이 우선적으로 이 세상을 죄악시하였던 경향, 그리고 인간의 죄과 때문에 그 구원을 위하여 수난을 당했다는 것이 또한 경건한 신앙생활에서 '개인적인 죄과'를 몰아치는 경향에 대비해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한 분이 창조에 담아준 사랑을 강조한다.

 

삼위일체의 신앙에 근거해서 영과 초월적인 것만이 아니라 창조의 모든 것, 온 우주 안에 당신의 숨결, 신성이 잠재해 있음을 전한다.

 

삼위가 하나이듯이 모든 것이 홀로 떨어져 머물지 않고 서로 일치하여 작용하기를 열정적으로 바라는 사랑, 한 처음에 창조의 근원이었고 또 육화의 원인으로 사랑을 구현하였던 이 사랑은 또한 다양한 형태로 만물 안에서 작용하며 전체 안에서 개별 창조물이, 또한 창조 전체가 완성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창조의 완성을 향하는 것이 도덕적인 의무나 보속이 아니라 대화이며 기쁨이다.

그리고 어떤 상태에서도 사랑으로 다시 일깨워지는 것, 이성으로만이 아니라 감각으로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다양한 형태로 이렇게 잠재되어 있는 신성을 깨닫고 작용하도록 일깨워지는 것이 곧 은총이다.

 

창조의 내적 연대성

 

이 사랑의 영성은 그러므로 창조의 세계에 대한 경외감과 긍정을 포함하며 창조의 세계가, 모든 창조물이 하나로 규정된 질서 안에서 서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주적인 연대성을 일깨운다.

소우주-대우주의 원리에서처럼 모든 창조물이 공통의 기본요소로 이루어졌고 인간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우주와 결합되어 있다. 유사성을 지녔다는 것을 넘어서서 상호의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영혼과 육체의 조화로운 합일

 

인간의 몸과 영혼의 관계에서 볼 때 이는 창조의 세계를 경외하듯 영혼만이 아니라 몸을 경외하고 긍정하도록 한다.

힐데가르트는 특히 하느님 육화의 신비로부터 연결하여 몸의 귀함을 더욱 강조한다.

하느님의 육화가 인간의 원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원으로부터 정해진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살을 뜨겁게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몸과 영혼 또한 서로 받쳐주고 조화되는 관계이며 이렇게 조화롭게 일치할 때에 창조의 완성을 향하여 기쁨으로 최상의 녹을 받는다.

 

창조의 뜻, 소우주

 

창조를 통해서 창조주를 볼 수 있고, 영혼, 이성만이 아니라 몸의 감각을 통해서 창조주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을 힐데가르트는 실제로 색과 소리와 상징으로 통찰하고 설명했다.

 

인간과 우주, 이 모든 세계에 공통되게 맥이 뛰게 하는 것이 녹색의 생명력(viriditas)이다.

 

태양으로부터 생성되는 푸르름이 태양빛과 수분을 담아 색을 바꾸어가며 열매를 맺듯이 하느님의 사랑의 힘이 배어있는 이 푸르름은 자연과 인간의 몸과 영혼 모두에서 생명을 낳고 키우고 열매 맺게 한다.

이것은 곧 창조주의 사랑으로 정해 준 전체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고 인정하며 전체와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힐데가르트에게선 덕(德)도 푸르다.

덕은 단순히 도덕적인 면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서 전체와의 연결, 전체 창조를 완성하는 구원과 관련된다.

그래서 이렇게 전체 질서와 내적인 질서를 연결하고 균형 있게 유지하도록 세고 재고 달아서 적당한 정도를 찾는 것과 이를 지혜롭게 구분하는 식별이 가장 중요한 덕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하고 적당한 정도를 찾아 푸른 생명력에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곧 건강이다.

 

창조는 「조화의 교향곡」이라는 것이 모든 창조물이 원 음향인 창조주의 숨길을 나누어 받았고 교향곡을 이루는 하나의 음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서 각자 고유의 음을 알아내고 스스로 울려 전체 화음에 자리 잡도록 하는 것, 음악은 이 원래의 근원을 기억해서 영혼을 울려 이 전체 안에서 자신을 쇄신하도록 함으로써 영혼을 치유하고 몸을 치유한다.

 


 

 

라인지역의 데보라 힐데가르트 수녀의 영성

(6) 영성

하느님 신비 담긴 세상은 긍정적, 모든 창조물은 서로 연계돼

 

 

건강, 전체 창조질서 안에서의 조화

 

힐데가르트가 건강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도 이런 영성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체 질서 안에서의 흐름에 개방적이고 깨어 있으며 귀 기울이는 것이 건강함의 특징이다.  건강한 이는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고 깨어 준비하면서 기다린다.

힐데가르트에게서 병은, 정도를 잃은 생활방식으로 전체 창조물을 하나의 생명 질서로 연결해 준 전체 질서에 내적인 질서가 균형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증상의 치료만이 아니라 전체 질서와의 관련하에서 몸과 영혼이 이 전체 질서에 있는 녹색 생명력, viriditas에 다시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사랑 : 창조의 힘, 창조를 이어가고 완성하도록 하는 근원

 

힐데가르트에게 있어서 세상을 창조하고 또 그 창조의 뜻을 완성하도록 이어가고 구원하는 원리, 근원은 사랑이다.

 

사랑의 근본은 삼위일체의 신비로 규정 된다 : 아버지이신 원 음향(原音響) 안에, 아들이신 말씀의 음(音) 안에, 그리고 불타는 이성이신 하느님의 숨결 안에서. 사랑은 모든 것에 넘쳐  흐른다.

 

사랑은 『아버지의 심장을 호흡하는 가장 내적인 힘』이며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오시는 구원의 열매로써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랑의 물줄기는 모든 존재에 넘쳐흐른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모든 자연에, 사랑의 불, 불과 같은 정신이 부어진다.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가장 밝은 별에까지』사랑이 서로 조화롭게 일치되도록 끓어오르게 한다.

 

사랑은 이렇게 물이고 불이고 또한 입김이다. 모든 것이 치유되고 구원되길 바라는 창조주의 사랑이 온 세상에 불어 넣어준 「성스러운 영의 입김」이고, 창조의 세계, 각 창조물의 중심에서 세고 달고 지어서 전체를 질서지운 창조주, 지혜를 전달하는 이성이며 또한 관계를 이루고, 조화로운 일치를 이루고 생명을 배태하도록 이끄는 원초적인 힘이다.

 

사랑은 창조와 구원의 원리이다. 사랑이 바로 창조 작업의 첫 번째 근원이며 육화의 근원이다.

이 원초적인 사랑의 힘으로만 창조가, 모든 관계를 이루고 생명(존재)을 배태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

사랑은 홀로 머물지 않는다. 사랑은 날개를 얻는다.

사랑은 거룩한 생명(vita integra)으로부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구원하도록 몰아쳐져서 조화롭게 규정된 세상의 노래에 흘러 들어가는 불타는 이성이 되었다.

불타는 이성의 근원에서 정신이 꽃피고 세상이 변화한다.

 

2. 우주론 : 모든 창조의 내적 연대성

 

현대에 크고 중요하게 부각되는 부분이 모든 창조에 배어 있고 완성으로 이끄는 사랑의 영성에 수반하는 우주론적인 시각이다.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창조 전체로 확대되는 사랑의 관계가 전체 창조 질서 안에서 세계 모든 것이, 인간과 세계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힐데가르트는 강조한다.

 

a. 소우주 - 대우주

 

우주, 세계의 생성이 인간 신체와 유기적인 연관하에서, 그리고 시간(달)과의 유기적인 연관 하에서 인간 삶의 단계가 전개된다.

대우주는 인간 안에 작은 우주와 상응한다. 우주와 사람은 같은 질서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앎으로써만 세상을 알 수 있고 사람은 자신이 우주와 연계되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자신 내면의 신비를 엿볼 수 있다.

달이 태양으로부터 빛과 광채를 받아 빛을 비추듯이 인간 또한 자신을 펼쳐가기 위해 태양빛이 필요하다.

 

이 소우주-대우주의 사고에 따르면 인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주와 결합되어 있다.

유사성을 지녔다는 것을 넘어서서 상호의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모든 창조물은 서로 다른 것들과 연계되어 있다. 모든 존재는 서로 다른 존재를 통해 유지된다'(LDO 53).

어느 것도 고립해서 존재하지 않고 다른 것과 연결해서 작용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식물, 심지어 광물까지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창조는 서로 의존하고 연결하며 각각의 요구에 따라 응답하듯 대화하며 살아 있는 전체이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서로 응답한다.」(LDO 94).

 

b. 세상에 대한 긍정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저술에서 이 모티브, 「세상에의 긍정」을 아주 집중적으로 강하게 언급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은 그 분의 광채로 빛난다.

어떤 창조물에나 하느님의 광채가 담겨 있고 창조를 통해 그 분을 볼 수 있다.

세상을 보고 땅을 관찰하고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이 열린다.

 

육체를 지니고 인간은 땅위에, 눈에 보이는 세계에 살며 거기에 뿌리내리고 있다.

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이 세상을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힐데가르트는 이 생각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현한다.

인간은 세상에 주어졌다. 세상에서 떼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멀리하고 돌보지 않아도 안 된다.

이런 것들을 통해 인간은 삶의 발판을 얻고 하느님의 선함과 치유의 손길, 가까움을 경험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세상을 멀리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는 창조주 앞에서 멀리하는 것이다.

 

중세에 이렇게 분명하고 단호하게 「인간이 땅에 주어졌음」을 말한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에게 육체와 세상에 대해 긍정할 것을 촉구한다.

이것이 인간의 특별한 생존을 구성하며 이를 부정하거나 경시하면 벌 받지 않을 수 없다.

 


 

 

라인지역의 데보라 힐데가르트 수녀의 영성

(7) 영성

‘영혼-육신은 하나’ 조화 통해 기쁨 느껴, 모든 창조물은 더불어 함께 살아야

 

 

3. 몸의 영성

 

인간이 되신 하느님, 하느님의 육화가 육체에 대한 힐데가르트의 사상을 결정적으로 규정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힐데가르트는 하느님의 육화를 인간 원죄의 결과로 보지 않고 영원으로부터 결정된 것이라고 본다.

 

인간이 되신 분이 자신의 육체를 그렇게 사랑하였듯이 인간의 영혼 또한 자신의 육체를 그렇게 사랑하며 그린다. 창조의 세계 모든 것에 하느님의 숨결이 닿아 있어 하느님의 모습을 비추어 주듯이 육체는 영혼을 비추어 준다.

 

중세에 빈번이 인용되던 성 아우구스티노의 위계적인 이분법. 곧 '육체-지상(현세)적인 원리'와 「영적-천상의 원리」를 구분하고 후자를 우위에 두면서 현대엔 입증할 수 없는 근거로 이를 성에까지 적용해서 남성을 여성의 우위에 두었던 내용: 『태초에 하느님의 뜻이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시고 영적인 창조물을 육적인 창조물보다,

이성적인 것을 비이성적인 것보다, 천상의 것을 지상의 것보다, 남성을 여성보다, 부유한 이들을 필요한 이들보다 우위에 두셨다』 힐데가르트도 이 흐름에 따라 영혼을 우위에 두기는 하였지만 힐데가르트에게선 몸과 영혼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혼은 수분이 온 나무에 젖어 흐르듯이 온 몸에 젖어 흐른다. 수액(樹液)이 나무를 푸르게 하고 꽃피우게 하고 열매 맺게 하듯이…』(Sci. 133).

 

『영혼은 육체를 생기 있게 하지만 육체는 영혼을 생기 있게 하므로 영혼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또한 육체를 필요로 한다…전반적으로 영혼은 자신과 함께 일하는 육체를 사랑하여 품어 안는다』(LDO 168).

 

그리고 힐데가르트는 최후의 심판 때에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에서도 육신의 귀함을 인정하는 표현을 본다.

영혼이 육신을 그리워한다는 표현으로. 『영혼이 자기가 사랑했던 옷, 육신의 옷을 벗기웠기 때문이다』 이 결합에 상응해서 질서 지워진 생활의 지침 하에서도 육신이 멍에를 지지 않는다. 영혼과 조화있는 관계이다.

『영혼과 육신이 진정 서로 일치하여 지내면 그들은 단결된 기쁨 안에서 최고의 삯을 받는다』(LDO 80).

 

영혼과 육신이 하나라는 힐데가르트의 강조는 실제로 자신이 이전에 겪은 심리적 신체질환에서 새겨져서 더 나아가 근대적인 그리스도교의 틀 안에서 육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도록 하는 연결점으로서 기여한다.

 

인간의 육체에는 성(性)도 포함된다.

생식행위를 통해 원죄가 이어진다는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 힐데가르트에게 부담이 되었지만 힐데가르트에게선 하느님께서 이성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이 몸 전체에도 관련이 된다.

『성기에서도 이성의 선물이 꽃핌으로써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행위에서 기쁨도 느낄 수 있다』(LDO 63).

전체 우주는 생명을 주는 「녹색 생명력」으로 맥이 뛴다.

힐데가르트는 이로부터 유추해서 「생식행위에 있어서의 녹색 생명력」 또한 알았다.

 

인간의 고유한 특성과 소명은 몸에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면에서 포괄적인 인간의 위대함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몸을 잘 관찰하여야 한다.

 

4. 녹색 생명력(viriditas)

 

녹색 생명력은 대우주 자연과 소우주 인간에게 함께 작용하여 생명을 주는 단일한 힘, 우주 전체의 맥을 뛰게 하는 것이다.

힐데가르트가 이 말을 사용하는 경우를 몇 들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녹색 생명력은 원래 식물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몸과 영에도 작용한다.

 

『오, 푸른 물오르는 새싹이여』

 

성 디지보트를 기리는 노래에 있는 『오, 푸르름이여, 하느님 손길에서 나온 녹색의 생명력이여!』, 그리고 이와 같이 모든 것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녹색 손가락」.

 

「아버지의 사랑, 그 마음의 녹색 빛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행하신 것들은 녹색 생명력이라고 표현한다.

성령은 영성적인 녹색 생명력의 담지자이시며 행위자이라 하고 세계의 원 안에 초록의 겉옷을 입고 있는 하느님의 여성적인 형상, 지혜와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초록중의 초록인 동정녀 마리아, 그로부터 연한 녹색, 곧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나오셨다 하고 모든 창조력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서도 녹색 생명력이 활동했다고 한다.

 

이처럼 「천상 신비에 담긴 마음, 사랑의 힘」, 하느님이 만드시고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힘, 생명을 낳고 키우고 열매맺게 하는 모든 힘이 여기에 있다. 비유적으로 식물과 동물, 모든 남성과 여성의 합일에 작용한다.

 

건강은 녹색 생명력 곧 초록에 다시 연결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육체적으로 자연과, 곧 땅과 우주와 대화하고 이를 지키고 완성하도록 하는 소우주이고 자연은 자신의 대우주 창조를 완성하도록 인간과 함께 연대하며 작용한다.

소우주 인간이 전체 질서와 내적인 질서의 조화를 이루어 내적으로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건강이므로 이를 위해 적당한 정도를 찾을 수 있게 판단하고 구분할 수 있는 덕이 필요하다.

 

5. 조화의 교향곡

 

세계는 음향으로 이루어졌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 고유의 음을 지니고 있고 삶은 무엇보다도 그 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며 울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누구나 각자 자신의 내부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여 자신의 특별한 음, 자기 고유의 「기본음」을 알아내야 한다.

 

귀 기울여 자기 고유한 음의 형태를 알게 되면 이들이 각자 일정 자리에 배치되어 울리는 전체 협주, 더 큰 전체의 질서에 자리 잡을 수 있다.

어떤 음이나 고립해서 홀로 머물지 않고 다른 음들과 조화롭게 함께 울리는 화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힐데가르트는 우주를 형성하는 근본요소들의 「기본음악」을 깊이 생각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귀 기울여 들었다.

세계가 소리를 지닌 창조, 음을 울리는 창조라는 것을 자주 언급했다.

힐데가르트의 시각적인 비전의 선물이 이렇게 분명하게 청각적인 능력으로 보충되었다.

 

힐데가르트에 따르면 창조된 것들은 모두 각자 웅장한 창조의 교향곡을 울리게 하는데 기여하는 자기 고유의 음을 지니고 있다.

이로써 구원은 눈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귀로 들을 수도 있게 된다.

이런 요소들만이 자신의 특정한 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자기 고유의 음향을 지닌다.

 

『인간의 영혼은 내부에 듣기 좋은 음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소리는 스스로 울린다』하느님의 소리가 전하기를 『나는 모든 창조물에 찬미하며 울리는 하모니(조화)로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리고 세계는 생동하는 균형을 유지한다. 상호보완적인 긴장으로서 함께 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힐데가르트의 이해에 따르면 이렇게 세상은 조화를 이루는, 하모니를 이루는 전체이다.

어떤 소리도 홀로 자신만을 위해 머물지 않는다. 다른 소리와의 합일을 깊이 바라고 메아리, 반향이 있기를 바란다.

서로 대화하는 이런 기본구조와 법칙은 태초에 하느님이 이 세상에 부여한 것이다.

 

『나는 천둥소리와 같은 소리를 지녔다. 이 소리로 온 세상이 모든 창조물의 살아있는 소리로, 살아있는 음으로 움직이게 하였다』(LDO 169). 게다가 인간에겐 특히 음악적인 과제가 주어져 있다.

 

『인간의 심장은 교향곡처럼 정해져 있다. 교향곡처럼 울리는 인간 정신의 소리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엔 달고 아름답다』그러나 이것을 혼자서만 누려선 안 된다.

 

『다른 모든 창조된 존재들과 함께 웅장한 울림이 되도록 불어가게 해야 한다』사람이 노래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그러므로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천상 화음의 반향」이다. 인간 영혼은 하나하나를 천상 하모니 전체 안에서, 전체에 연관해서 세운 창조 계획안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이 음악의 일부를 스스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울려 노래해야 한다.

 

한편 음악은 치료효과도 갖는다.

 

『노래는 완고한 마음을 부드럽게 해 준다. 회한의 눈물이 흘러나오도록 하고 성령이 옆에 오시도록 부른다』(Sci. 356)원래의 근원을 기억해서 영혼을 울려 이 전체 안에서 자신을 쇄신하도록 함으로써,『자기 집의 닫힌 문 앞에서 헛되이 문을 두드리고 있던 영혼 안에서 정신이 작용할 수 있도록 그의 뒤엉킨 상태를 정리해준다. 이제 음악이 강제로 힘을 가하지 않고도 아주 조용하게 영혼의 문을 연다』

 

6. 생기 불어 넣는 조력자

 

'덕'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신적인 힘,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이다. 곧 하느님의 선물이자 인간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건조한 덕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삶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생동하는 형태이다.

 

힐데가르트에게 있어서 식별(diskretio)이 전체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고 내적인 창조의 질서를 찾는 '모든 덕의 어머니'(서한집 99, Sci. 252)이다.

베네딕도 수녀회 규율에서 깊이 새겨진 부분이기도 하다.

 

식별의 기능은 알갱이와 쭉정이를 세세하게 철저히 살펴서 알찬 것은 고르고 속 빈 것은 버리도록 하는 것과 같은 기능인데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으로 현명한 판단, 태도로서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식별은 하느님 자비의 밝게 빛나는 구름으로부터 인간 정신으로 불어가 그 안에서 식별하도록 하고 밝혀주는 하느님 선하심의 밝은 불꽃』(Sci. 261)이다.

 

이 식별을 통하여 삶에서 과도함을 피하고 전체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고 내적인 창조의 질서를 찾는 적당한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하느님이 수없이 다양한 창조물간의 관계를 바르게 고려하며 일하듯이 인간도 식별의 힘으로 자신의 모든 행위를 충분히 잘 재어야 한다』(Sci. 262).

여기서 적당한 「정도」는 이론적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생활세계에서 읽어 알아내도록 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누구나 내면을 귀담아 듣고 더 큰 전체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인지함으로써 「자신의 정도」를 알 수 있다.

 

힐데가르트는 몸과 영혼의 치료를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식별은 당연히 육체적인 욕구를 제대로 충족하도록 돌보기도 한다.

『인간이 자신의 몸에 적절히 영양을 주면 그 행동도 밝아지고 다른 이들과 잘 교류한다…. 자신의 몸을 분별없이 과도한 금욕으로 해치게 되면 그는 늘 분노를 보인다. 이 모든 것에서 너는 「좋은 땅」이어라』

 

힐데가르트의 저작과 또한 서신에서도 식별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구체적인 예가 늘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음식은 심신이 상쾌해질 정도로 적당히 섭취해야 한다. 그로써 영혼이 기쁨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먹고 마실 때에 어떻게 식별이 관리하도록 하는가, 그래서 다른 이와의 친교에서도 이 덕이 필요하다.

『일상생활의 틀 안에서 모든 경우에서처럼 서로의 대화에서 친절하고 정감 있게 말함으로써 이웃에게 인간적인 것을 줄 수 있다』

 


 

축일 9월 17일 성녀 힐데가르트(Hildeg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