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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십자가의 성 요한

by 파스칼바이런 2010. 5. 29.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십자가의 성 요한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엘리사벳·선교사

 

(1) 눈비 들이치는 방에 살며 완전한 가난 실천

 

16세기에는 소위 종교 분열의 시기로, 이단과 이교가 난립했다. 그래서 신앙이 약한 많은 이들이 참 진리를 버리고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이 시기는 영광의 시기이기도 했다. 진정한 종교 개혁자인 교회 성인들이 많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교회 내부를 쇄신하는 한편, 가톨릭 영성을 더욱 심화하고, 전교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St. Joannes de Cruce, 축일 12.14)이다.

 

요한은 1542년 6월 24일 스페인의 가스티아 주 폰티베로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래 명문 귀족 집안이었지만, 요한이 태어날 당시는 가세가 기울어 매우 가난한 상태였다.

 

이름이 요한이 된 것은, 태어난 날이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일과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요한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생활고에 쪼들리던 어머니는 요한을 처음엔 목수의 조수, 다음은 양복점과 조각가의 제자로 보냈으나 요한은 도무지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요한은 이후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채용되었으며, 쉬는 시간을 이용해 인근에 예수회가 경영하는 신학교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하느님의 섭리로 신학교 수료 후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한다.

'십자가의 요한'이라는 이름은 가르멜 수도회에서 착의식 때 수도명으로 정한 것으로, 이는 그의 고난의 삶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가르멜 수도회는 퇴폐한 시대 사조의 영향을 받아 완덕에 대한 열망이 거의 없었다.

수도원내 분위기도 매우 어수선했다.

이 시점에 테레사 성녀는 자신이 속한 가르멜 수녀회의 개혁에 착수했으며, 남자 수도회의 개혁은 십자가의 요한에게 청했다.

 

이에 요한은 뜻을 같이하는 안토니오라는 수사와 함께 개혁에 본격 나서게 된다. 완전한 가난을 실천하며 엄격한 금욕 및 극기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들의 방은 너무 좁아서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천장은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낮았다.

눈이나 비가 오면 그대로 방안으로 들이쳤다.

그럼에도 이들은 조금도 싫은 내색을 않고 오직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생활했다.

그리고 맨발로 다니며 사람들에게 회개를 권고하고 죄악을 경고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많은 이들이 찾아와 함께 생활하기를 원했고, 그 지원자 수는 날로 늘어갔다.

요한은 그들 모두를 반갑게 맞으며,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기존의 냉랭하고 타성에 젖은 수도생활을 이어가던 수사들은 이러한 요한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모함하고 수도생활을 방해했다.

가르멜 총회가 열렸고, 총장은 요한을 수도원의 동굴 지하실에 감금토록 했다.

요한은 그곳에서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지만 모든 시련을 묵묵히 이겨냈다. 항변하거나 저항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오히려 덕을 쌓게 하는 감사한 은인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탁월한 성덕은 가만히 있어도 드러나게 된다.

곧 요한의 결백함이 드러나게 됐고, 교황 비오 5세 및 그레고리오 13세는 요한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을 특수한 가르멜회로 공인, 비준했다.

 

이제 요한에 대한 모든 오해는 완전히 해소됐다.

요한은 명상에 잠겼고, 하느님을 체험했으며, 그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그는 삶 안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하느님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인간의 소명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았다.

또 모든 영혼들을 인도하기 위해 영적인 가르침들을 펴고자 했다.

 

그러던 1591년 6월이었다.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향하던 그는 열병에 걸려 스페인에 남게 됐고, 9월 우베다 수도원으로 옮겨진 후 4개월만에 눈을 감았다.

 

그의 삶은 이후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받았으며, 결국 1675년에 시복되었고, 1726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신비 신학의 명저에 나타나는 초자연적 지식으로 1926년에는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언됐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3년 스페인 언어권의 모든 시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23년간의 개혁 가르멜회 생활을 통해 가르멜회 회원들에게 영성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예언자 엘리야보다 훨씬 더 많은 영성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 삶 안에서의 십자가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그 가르침은 「어둔밤」과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 등 보석같은 저술들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2) 아빌라의 테레사 만나 새로운 인생 시작

 

신비신학의 대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친분 돈독하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보다는 27살 아래다.

그는 테레사 성녀와 함께 교회에 새로운 영적 바람을 일으켰으며, 하느님을 따르는 삶의 모범을 보여줬다.

그가 어떻게 형성적인 삶을 살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어린 시절은 비참했다.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난 그는 경제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 우연히 한 은인의 도움으로 병원 간호사로 일할 수 있었으며, 신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

 

요한이 병원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은총이었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돌보면서 고통 받으시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고통에 직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기 마련이다.

병자들도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그래서 애원하고, 매달리게 된다. 자연스레 하느님과 가까이 하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고통받는 환자들의 모습 속에서 살아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후 요한은 수도회에 입회하게 되는데, 가르멜회였다.

그리고 25세가 되던 해, 사제품을 받게 되고, 또 그 해에 아빌라의 테레사도 만난다.

이 점에서 요한에게는 25세의 나이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테레사는 52세로 완전한 하느님의 딸이자 배필로 살고 있을 때였다.

요한은 테레사로부터 인간이 무엇인지, 또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눈뜨게 된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어떻게 하느님을 따라야 할지,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야 할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확신에 가득찬 요한은 진정한 수도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26세때 남자 개혁 가르멜 수도회를 연다.

 

그런데 선각적인 행동은 늘 걸림돌을 만나기 마련이다.

문제는 기존 가르멜회 수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수도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래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을 끌어 내리려는 경향이 있다.

하향 평준화가 많은 이들의 마음을 혹하게 만드는 이유도 그래서다.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 진다.

가르멜회 회원들도 그래서 요한의 개혁 가르멜회를 험담하고 모함했다.

 

요한은 결국 감옥에 갇혔다. 비참했다. 요한이 생활하는 방은 가로 1.8m, 세로 3m 였다. 그 좁은 방에 대소변을 처리할 양동이 하나가 있었다.

사람들은 요한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이 양동이를 며칠씩 치우지 않았다.

게다가 요한의 방 바로 옆에는 공용 화장실이 있어서 악취가 심했다.

햇빛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곰팡이와 더러운 오물로 가득한 이런 방에 오랜 기간 갇혀서 살다보면 건강한 사람도 병이 나기 마련이다.

요한의 체중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번민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 참담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요한은 암흑의 구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홀로 철저하게 내버려졌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선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번민에 덧붙여 욕망과 욕정이 함께 일어났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래전에 스스로 억눌러 없애 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요한은 수많은 욕망과 욕정들이 자신을 질질 끌어다 암흑 속에 내동댕이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요한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요한의 육체와 정신을 향한 가혹한 채찍질은 끝없이 계속됐다.

 

그러던 1758년 5월의 어느 날 요한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온다.

간수가 바뀌었다.

이 간수는 그동안 심장이 찢어지고, 오장육부가 흩어지는 그러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평온한 모습으로 기도에 열심인 요한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간수는 이제 남모르게 새 옷도 넣어주고, 음식도 보충해 주는 등 성심껏 편의를 봐주게 된다.

하지만 요한이 정작 원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요한은 간수에게 노트와 필기도구를 구해 달라고 말한다.

간수는 종이와 필기도구를 구해 주었다.

 

그런데 감옥에는 빛이 없었다. 2인치(5~6㎝) 구멍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전부였다.

그 구멍도 요한의 키보다 높은 곳에 나 있었다.

요한은 바닥에 물건을 놓고 그 위에 올라가 그 가느다란 빛에 의지해 글을 썼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신비 신학의 대작, 「어둔 밤」이다.

 

(3) '능동적 정화의 삶' 노력해야

 

육신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내면의 모든 차원들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그러한 고통 속에서 요한은 굳게 일어선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기도 안에서 그 모든 고통을 이겨냈다.

이후 하느님으로부터의 격려와 은총을 통해 감옥 탈출에 성공한 요한은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에 피신할 수 있었다.

그때 요한의 나이 36세였다.

이후 요한은 놀라운 열정으로 책 집필에 나서게 되는데,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도 이렇게 탄생했다.

 

여기선 차가운 감옥의 2인치(5∼6㎝) 구멍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 줄기에 의지해 집필한 신비 신학의 대작, 「어둔 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내용이 좀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찬찬히 따라 읽다보면 영성의 참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둔 밤」을 보면, 인간 삶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뉜다.

하나는 '능동적 정화의 삶'이고 또 다른 하나는 '수동적 정화의 삶'이다.

이 중 능동적 정화의 삶과 수동적 정화의 삶은 또다시 '감각적 정화'와 '영혼의 정화'로 나뉜다.

 

감각적 정화란 쉽게 말해서 우리가 가진 이 몸뚱어리의 감각에 관한 것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는 것을 말한다.

그 감각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감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이 감각을 통해서 반형성적인 것들이 즉 잘못된 요소들이 내 안에 많이 들어올 수 있다.

우선 욕심을 들 수 있다.

몸이 편해지기 위해 많이 먹으려고 하고, 돈을 벌려고 하고, 좋은 집에서 살려고 한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편해지기 위해 많은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에 매여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욕심에 의해 나의 의지는 나쁜 방향으로 움직여 질 수 있다.

감각적으로 나쁜 것이 들어와서 그것이 판단을 잘못 내리게 하고, 잘못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혼 또한 망가지게 된다.

감각의 문제가 영혼의 문제로 확장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감각을 정화함으로써 영혼, 즉 이성 기억 의지 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참고로 이성의 정화는 신앙 즉 믿음으로 가능하고, 기억의 정화는 희망으로, 의지에 정화는 사랑으로 가능해진다.

 

앞서서 설명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영혼의 성' 원리와 연결시켜 보자면, 감각적 차원에서의 능동적 정화는 1궁방과 2궁방과 관련된 것이고, 영혼 차원에서의 정화는 3궁방 내지 4궁방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벌레와 독충이 들끓는 1궁방에서 벗어나 우리는 2, 3, 4궁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감각적인 요소들을 빼내야 한다. 그래서 좋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 불편하더라도 성경을 많이 읽고,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기 싫어도(감각이 거부하더라도 그 정화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감각이 싫어하는 것들을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감각적으로 편한 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망가트리는 것이다.

 

영적 초심자는 이렇게 부단한 노력을 통해 감각의 정화를 성취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의 눈과 귀와 입과 손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 변화와 동시에 이성적 차원의 변화가 오고, 동시에 나쁜 것들은 사라진다.

 

육신이 변화가 되면 그 다음에 육신의 작용의 하나인 이성이 변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기억도 변하고, 의지도 바뀌고, 결과적으로는 행동과 삶 자체도 좋은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1~4궁방까지는 나 자신의 능동적인 힘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능동적 정화의 삶이다.

나 자신의 노력으로 정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5궁방으로 접어들게 되면 지금까지의 능동적 정화의 삶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동적 정화의 삶으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수동적이라는 말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이 곳에서는 참으로 거룩한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수동적이라는 말은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게 된다는 의미다.

하느님의 손에 내맡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 자신이 나의 변화를 주도했다면 더 높은 단계에선 하느님께서 직접 나 자신을 변형시켜 주신다.

그 놀라우신 섭리 앞에서 우리는 그저 묵묵히 경외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 '수동적 정화의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4) 캄캄한 '어둔 밤' 신앙의 작은 빛 찾기

 

신앙을 모르고 교회를 모를 때, 교회 밖에서 생활할 때는 하느님을 볼 수 없고 느끼기도 힘들다. 캄캄한 밤이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며 참 신앙의 소중함을 알고 그 참 신앙을 위해 조금씩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서서히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때 만나는 빛은 온전한 빛이 아니라 아직은 희미한 빛이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를 깨닫기에는 아직도 어둡다. 과거의 습관에 아직 너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을 통해 능동적으로 자신을 정화시키는 삶을 성취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산다고 해서 그것이 영성의 최고 단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됐다. 그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다.

그것이 바로 '수동적인 정화의 삶'이다.

 

수동적 정화의 삶은 하느님께서 직접 조종을 해 주시는 것이다.

직접 변형을 시켜주시는 것이다.

하느님에 의해 감각이 변형되면 보는 눈이 바뀌고, 말하는 입이 달라지고, 만지는 모든 물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눈을 맘대로 딴 곳으로 돌리지 못하고, 입을 마음대로 벌리지 못하고, 손을 함부로 쓰지 않게 된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완전하시고 빛나시는 분인지 알게 되면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함부로 눈 돌리지 못한다.

내가 하는 눈짓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짓이고,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는 말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사물 하나를 보더라도 영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눈으로 보셨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세상 만물에 담겨 있는 형성하는 신적 신비의 섭리를 보았다.

자연과 이야기했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하느님에 의해 수동적인 정화를 거치게 되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달도 내 누이가 되고, 꽃 한 송이도 형제가 된다.

이는 인간이 가진 능력에 의해서, 능동적인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해석할 수밖에 없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신비적 차원의 경지다.

 

이렇게 감각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변화되면, 자연히 이성도 하느님께서 판단하시는 그러한 형태로 바뀌게 된다.

기억도 바뀌고, 의지도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러한 의지대로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완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카르멜의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테레사 성녀가 말한 '영혼의 성'과 연관지어 설명하자면 1~4궁방은 능동적 정화의 삶이었고, 5~7궁방은 수동적 정화의 삶이다.

물론 5~7궁방에서도 감각이 중요하다.

인간은 감각적 동물이기에 감각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본 것이 있어야, 느낀 것이 있어야, 들은 것이 있어야 판단과 기억, 의지도 변화된다.

그런데 5~7궁방에서의 감각의 변화는 나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수동적인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합치를 이루는 관상의 단계는 특정한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다. 누구나 그 단계에 들어설 수 있고, 또 들어가야 한다.

물론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시기 때문에, 그 합치의 단계에 들어서는 상황과 여건은 다를 수 있지만, 합치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주어진 처지에서 처음에는 스스로의 피땀 어린 노력을 기울이고, 그 다음 단계에서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누구나 7궁방의 완전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다.

변형일치의 기도의 단계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의 성 요한은 수동적 정화의 단계를 설명하며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치의 삶을 요청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 「어둔 밤」은 워낙 심오하기에, 영성가들마다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둔 밤」을 이상과 같이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한 번에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없다. 단지 조금씩 깨달아 나갈 수 있을 따름이다. 1궁방에서 7궁방까지, 기도의 1단계에서 7단계까지, 능동적 정화에서 수동적 정화의 단계까지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길은 누구나 걸어갈 수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모범을 본받아,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치의 경지까지, 황홀한 관상의 경지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축일 12월 14일 십자가의 성 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