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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가 본 5.18 광주사태

by 파스칼바이런 2010. 5. 29.

역사학자가 본 5.18 광주사태

 

I. 문제의 제기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인 E. H. Carr는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부단한 대화”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과거란 역사적 사실(史實)을 말하고 현재란 歷史家를 말한다. 부단한 대화란 역사란 자꾸 새로 쓰여진다는 의미다. 새로운 자료가 나오고 새로운 관점이 생겨서 새로운 해석이 나오므로 역사는 새로 써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지난 사실의 총합적 집합이 아니라 사료를 수집, 정리, 평가, 해석하는 작업을 거친 역사가들에 의해 평가, 해석된 다듬어진(料理된) 서술된 역사(written history)이다.

그렇다면, 원래의 5.l8이란 과거의 사건은 이미 시간속에 사라졌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5.18이란 역사가들이 5.18을 해석하고 서술한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에 5.18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가질 수 있는 주목해야할 두 종류의 서적이 발간되었다는 점에 주목을 요한다. 하나는 남한사람이며 보수논객인 지만원 박사가 쓴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과 북한사람인 탈북 군인들의 모임인 자유북한군인연합(대표 임천용)의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 그것들이다. 이 두 서적은 5.18이 민주화운동이란 점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시하면서 새로 해석해야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탈북자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당연히 5.18광주의 역사도 새로 써져야한다.

필자는 현대사전공 역사학자로서 평소부터 5.18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간직하고 있었다. 필자는 재작년 여름 KBS 전주방송에서 5.18에 대한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의혹 발언으로 5.18유관단체로부터 고발을 당하는 등 홍역을 치루기도 했다. 알아보니 여러 보수논객들이 고소고발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럴수록 5.18에 대한 의혹은 커져만 갔다.

첫 번째 의문점으로, 5.18을 ‘민주화운동’이란 용어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것이다. 원래 민주화운동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보면, “민주화를 위한 대의명분을 정강정책으로 결사조직체 내지 본부가 미리 결성되어 장기지속적인 사회운동을 하면서, 일종의 평화시위 내지 가두서명, 등 평화적인 의사표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키고 자유민주주의적 시장질서내에서 사회적 문제점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체제를 전복하거나 거사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 무장폭동으로 변질되는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3.1만세운동이 평화적으로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서 일제 식민지 상태를 고발한 것은 일종의 평화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난의 역사에 대한 용어도 세월의 희름에 따라 변했다. 처음에는 동학난-동학운동으로 기술했지만, 나중에 동학농민전쟁으로 바뀐 이유는 평화적 시위가 아니라 동학도들이 무장으로 봉기하여 관군이나 일본군과 유혈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5.18도 단순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무장항쟁내지 민중폭동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의문점은 5.18의 배후조종에서 북한의 개입여부, 시민군의 무기고와 교도소 습격동기, 장갑차를 몰고 시민군을 훈련시킨 복면인의 정체, 12-3구의 신원미상의 시체, 북한군 특수부대의 침투경로 등이 속시원하게 밝혀질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 이런 의혹은 그동안 국회의 광주사태 관련 5공청문회에서도 명쾌하게 밝혀지지 못한 의혹들이다.

필자의 이런 두 가지 의혹들은 이 글에서 전개될 5.18에 대한 상반된 역사적 해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화운동으로 파악한 정통주의 해석과 이에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는 수정주의 해석이 태동된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고 그런 주장의 근거를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독자들은 5.18이 단순한 국내정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다 복잡한 남북관계와 긴밀하게 연관된 성격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II. 정통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

 

1. 5.18에 대한 정통주의 해석: 민주화운동

 

5.18이 ‘민주화운동’이란 고상한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게 된 것은 마치 철근, 자갈, 모래와 석회석이 혼합되어 철근콘크리트로 굳어지듯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5.18이란 유혈이 낭자했던 사건이 민주화운동이란 고매한 타이틀을 얻기까지에는 5.18을 놓고 1980년의 법관들과 1996년의 법관들이 정반대의 판결을 내는 10여년의 우애곡절을 겪었던 것이다.

1980년, 한국의 법관들은 정승화에게 내란방조죄를 선고했다. 정승화가 김재규의 뜻에 따라 국방장관의 소관사항인 병력동원을 월권적으로 주도하면서까지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했다는 것이다. 1980년의 법관들은 김대중에게도 내란음모죄를 선고했다. 1980년 5월의 학원소요사태는 김대중이 10․26 이후의 국가권력 공백기를 악용하여 북한 측 불순분자들과의 연합을 통해 최규하 정권을 무너트리고 스스로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으킨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것이다. 5․18은 김대중으로부터 사주와 자금을 받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 등이 자금을 살포 선동하여 폭력시위를 유발하고, 홍남순, 김성용 등 반체제 인물들이 이에 편승하여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과도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폭도들을 더욱 선동하여 방화, 파괴, 살인, 강도 등의 행위를 저질러 광주를 무정부사태로 만들고 계엄군에 총격까지 가한 폭동이라는 것이다.

80년대초 5공시절의 5.18에 대한 판결은 전두환 군부세력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되는 시기와 함께 흐지부지되었고 정통주의 학설로 굳어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5공세력이 지식인그룹을 포섭·설득하는데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권력에 심취한 5공세력은 5.18에서 나타난 의혹을 철저하게 재수사하려는 의욕이 부족했기에 마타도어식 소문만 더욱 증폭되었고 언론통제와 힘으로 대중을 눌리기만 했다.

그러나 87년 6.29선언이 있었고, 80년대 판결을 정당화하는 검인정 교과서들이 나오기 전에 다시 5공의 업적을 부정하는 김영삼과 그 이후 좌파정권으로 세상이 바뀌면서 80년대초 5.18판결은 중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가 주도하여 1995년 12월 21일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그 이전에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천명하여 12.12와 5.18관련 군부세력에 대한 청산의지를 밝히면서 사법부에 영향력을 미쳤다. 그 정치적 동기는 노태우 비자금 문제를 비껴가면서 민심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는 苦肉之策이었다. 95년 10월 국회에서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이 폭로되었고, 얼마안가 중국에서 김대중총재가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는 양심고백을 했으니, 국민들은 자연히 김영삼 대통령에게 시선이 집중되었었다. 이제 5공세력, 전두환-노태우 군부세력은 5.18광주의 양민학살에 가장 부패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김영삼은 자신을 5공세력과 확실한 차별을 두면서 정국타개를 위해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러나 5.18특별법이 일시적으로 민심을 수습하는 단기처방전 노릇은 했지만, 그것은 ‘한 사건을 두 번 재판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다. 여기에서 5.18특별법의 위헌성 소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작년에 발간된 법학자 조문식씨의 <食人>란 책에는 5.18특별법의 위헌성과 법적인 문제점이 잘 기술되어 있다.

법원의 판사들은 시민단체와 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의 민주화 열기에 편승하여 1996년 법관들은 헌법이 명시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어기고 정승화, 김대중, 5.18광주사건 모두에 대해 재심절차 없이 다시 재판했다. 이들에 의해 김대중은 민주화의 化身으로 수정되었고, 전두환은 무력으로 국권을 찬탈한 반란수괴요 광주시민을 학살한 내란수괴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1997년 4월 17일(96도3376) 대법원은 이런 요지의 판결을 내었다. “5.18은 전두환 일당이 12.12군사반란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 최규하 대통령을 위합하여 권력을 행사하면서 내란을 목적으로 광주학살을 자행하였다.”

5.18광주사태는 1997년 5월 9일 대통령령 개정을 통해서 5.18민주화운동기념일로 지정되면서 민주화운동으로 정착되었다. 5.18단체의 긴급성명서(2006.12.21)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은 자유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적 투쟁에 의해 진실이 규명되었고, 그 진실에 기초하여 법적, 제도적으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5.18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고 국가권력을 강점했던 이른바 신군부세력들이 법정에 세워져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단죄됨으로써 사법적 판단까지 마무리되었다.” 즉 5.18은 불법적인 군사정권의 등장을 온 몸으로 막아내고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투쟁한 것으로, 국민적 저항권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5.18에 대한 正統主義 해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근 20년 동안 5.18광주문제는 ‘민주화운동’이라는 해석이 정통주의가 되고 化石처럼 굳어져서 각종 교과서와 근현대사 역사책에서 金科玉條처럼 무비판적으로 인정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었다.

90년대의 이런 법적인 제도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다음과 같은 5.18에 대한 인식이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12.12는 신군부와 하나회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불법쿠데타였으며, 이에 저항하는 민중민주세력을 탄압하기 위해서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무고한 학생과 시민들에게 폭압적 강경진압을 실시하여 무참하게 인명을 살상하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했다.” 보수적 성향의 교과서 포럼이 편찬한 『한국 현대사』(기파랑, 2008)의 기술에서조차도 5.18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정통주의는 그 뒤 감히 누구도 異意를 제기하지 못하는 ‘不可侵의 聖域’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5.18유관단체는 지부 등 전국적 조직망을 가지게 되면서 시민사회단체 중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단체로 급성장하였다. 만약 5.18을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이의를 제기하면, 누구든지 고소고발은 물론 일신상의 봉변이나 심하면 신체적 테러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지난 김대중-노무현 좌파정부하에서 벌어진 실상이었다. 과거 좌파정부 10년동안 온갖 별의별 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재심을 청구하면서 법적 보상과 역사뒤집기내지 재해석이 이루어졌지만, 5.18에 대한 재조사나 위원회가 없었던 것은 이미 김영상 정부시절에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聖域化되었기에 더 이상의 논의와 보상은 불필요했던 것이다.

김대중과 386운동권세력들과 같은 좌파가 권력을 장악한 근본 원인은 이들이 5.18이후 국민적 공감대와 대중성을 확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즉 민심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과 한나라당 집권여당은 5.18에서 무장하여 공권력에 극렬저항한 시민군이 정당하다는 점을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인정했기에, 이들이 제도권으로 순탄하게 진입하여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드디어 권력을 장악하는데 고속도로를 깔아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DJ 사망직전, YS가 자신과 DJ와의 관계를 ‘특수관계’라는 소회를 밝힌 점도 이런 연유에서 이해가 된다. 후일 YS는 또한 “탈당한 뒤 이회창은 절대로 대통령 안 시키겠다고 각오했다”고 언급하여, 결과적으로 YS정부가 ‘좌파宿主’였다고 하는 말이 맞다는 것을 YS가 인정한 셈이다(2010.2).

 

2. 5.18에 대한 수정주의 해석: 체제전복을 노린 민중봉기내지 민중항쟁

 

그런데 노무현 좌파정부의 등장이후 5.18에 대한 여론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2003년 5.18에 대한 여론조사(9.5-7,www.chosun.com)에 참가한 12,024명중에서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다’가 11,288명(93.88%), ‘민주화운동이다’가 548명(4.5%), 그리고 기타 188명(1.56%) 등으로 나타났다(지만원, II, p.11). 그 이유는 김대중 좌파정부 출범이후 급속히 진행되는 좌경화물결을 바라보면서 지각있는 국민들이 민주화투사들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속았다는 국민적 자각이 생겼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지켜보고 나중에서야 노벨평화상 수상이 4억5천달러의 현찰을 김정일에게 상납한 대가였다는 점이 백일하에 폭로되었을 때, 일말의 기대를 했었던 국민들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식으로 김대중에 대한 배신감과 그의 사상적 정체성에 대한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대중 정부의 노골적인 햇볕정책과 친북정책이 한국사회를 좌경화로 이끌고 나갔기 때문에 보수세력이 각성하고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보수는 좌익의 권력기반이 된 5.18광주사건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5.18에 대한 수정주의 해석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된다. 여기에 다가, 인터넷상에서 5.18의 의혹에 대한 자료들이 끊임없이 회자되어서 조금만 관심이 있는 인물이라면 5.18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5.18이 인터넷상에서 의혹을 가지게 한 것은 필명으로 활동하는 역사학도와 지만원 박사의 공헌이 크다. 그들은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5.18구역을 만들어서 부지런히 5.18에 대한 내용을 대중들에게 알렸다.

역사학도와 지만원 박사가 인터넷상에서 5.18유관단체와 외롭고도 힘든 투쟁을 하는 동안, 5.18의 정통주의 해석에 대한 의문의 장작불을 최초로 지핀 것은 국내의 탈북자들이었다. 2006년 12월 세실레스토랑에서 자유북한군인연합(임천용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5.18은 북한의 김정일과 군부의 계획대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증언하였다. “북한군 개입의 구체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개입 자체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어서 임천용은 5.18단체가 주장하는 “북한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 없다는 증거를 확실히 증명되어야한다고 말했다. 북한군 특수부대의 흔적과 의혹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자회견은 5.18에 대한 세인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탈북자들의 기자회견은 5.18을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보수논객들의 사기를 크게 높이는데 기여했다. 5.18에 대한 수정주의 해석의 신호탄은 지만원 박사의 저술,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전4권, 2009)의 발간으로 시작되었다. 지 박사는 특별히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공학박사답게 기존의 객관적인 수사기록과 판결문, 진압군과 무장시민군 쌍방의 수기 등을 재검토하여 자신의 주의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어쨌든 현대사전공자인 역사학자가 역사적 사실과 근거를 통해서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다”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보수논객이며 공학전공인 지만원 박사로부터 5.18에 대한 문제제기가 된 점에서 현대사연구 풍토에 헛점이 있다. 지 박사의 문제제기와 용기는 높이 평가를 받아야한다. 지만원 박사는 5.18을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위수김동’(위대한 김일성 수령 동지)를 외치고 김일성 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대한민국의 이단아 386주사파들이 북과 연계하여 일으킨 광란의 국가전복운동이었다고 확신한다.”고 결론지으면서(지만원, IV, p. 411) 기존의 5.18에 대한 정통주의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었다.

한편 북한군 특수부대의 연관성을 주장한 탈북자들은 “증거를 대라”는 5.18유관단체의 거센 항의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그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결과물이 바로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출간이었다. 이 책은 150명의 탈북자에게 북한에서 5.18에 관해 듣고 본 것을 소상히 기록하는 수기를 공모하여 그 중 엄선한 15편의 증언을 실은 것이다. 독자들의 반향은 매우 컸다. 작년 첫해에 2000부가 나갔고 이미 재판을 발간한 상태다. 그동안 5.18에서 명쾌하게 밝혀지지 못한 의혹들, 예를 들어 5.18의 배후조종, 시민군의 무기고와 교도소습격, 복면인의 정체, 10여구의 신원미상의 시체, 북한군 특수부대의 침투경로 등은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 그 의혹들을 거의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북한군 특수부대가 동료들의 사체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폭탄을 사용하여 몸을 가로로 만든 것이라든지, 80년 봄 무려 침투한 특수부대원들이 3개월에 걸쳐서 전남의 무기고에 대한 사전답사를 실시한 점, 장갑차를 몰고 나선 선두부대들의 얼굴은 북한에서 서로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는 증언, 북한에서 김대중을 매우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입장 등이 진솔하게 기록되어서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가히 메카톤급 충격을 주었다.

탈북자들의 증언의 중대성은 남한내부의 정파나 이해관계를 떠나서 발언하고 인식하는 그 객관성 자체에 있다. 목숨을 걸고 남한에 와서 정착했는데, 그런 폭로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무슨 이익이 있다고 자신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사안에 대해서 발언을 하려하겠는가? 탈북자들이 용감하게 증언하는 이유로 전 북한농촌관리위원회 부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좌파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무조건 나쁘고 광주시민들이 특별히 미워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같은 나쁜 놈들에게 더 이상 이용당하고 피해를 보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봐서는 안 되고 5.18광주사태가 바로 북한정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모세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김대중과 같은 친북세력들의 반국가적인 책동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는 대한민국 국민들 뿐만 아니라 탈북자인 우리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한다”(증언 14,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p.404).

 

이제 5.18해석을 놓고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해석에서 본격적인 격론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터넷상에서 치열한 진실공방전이 현재 벌어지고 있지만, 국내 현대사전공자들은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고 감히 발언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5.18유관단체와 좌파들의 대응책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① 협박과 고소고발 등의 법적 강경대응이다. 탈북자의 회견내용을 인용하여 문제를 제기한 지만원 박사, 역사학도와 이종윤 목사를 비롯한 보수우익논객들과 종교인들이 무더기로 5.18유관단체로부터 명예훼손죄로 고소고발을 당하는 불행한 사태가 지속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5.18유관단체가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의혹을 처음으로 밝힌 자유북한군인연합에 대해서 고소고발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② 5.18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영상매체를 통한 대중선동이다. 2007년에 광주사태를 주제로 선보인 영화 ‘화려한 휴가’는 관객 100만명을 돌파하였다. 그 내용은 5.18당시 시민들이 원인도 모르게 공수부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화였다. 그 영화를 본 5.18당시 진압군으로 참가했던 병사들은 영화가 “사실을 왜곡했다”고 비판했으며, 탈북자들도 그 영화에서 비상식적인 군인들의 만행을 보고 “너무 비현실적으로 묘사했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③ 5.18기록자료를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사업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5.18은 국제적으로 공인받게 되는 것이고, 5.18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보수-탈북자들과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작년 민주당의 김영진 의원 측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은 후대에 가치 있는 자료로서 2010년 5.18 30주년을 맞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유네스코 등재의 아이디어는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넬슨 만델라 형사재판 기록이나 필리핀 민주화운동 장면을 담은 영상물 등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점에서 착안했을 수 있다.

 

III. 결론

 

작년에 필자는 대불총이 주관하는 현대사 재조명 세미나에서 <5.18광주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란 주제로 네 차례에 걸쳐서 서울(용산 전쟁기념관)과 지방(대구, 대전, 부산) 등지에서 발표했다. 두 번의 발표문의 내용은 시스팀클럽의 지만원박사가 5년에 걸쳐 정리한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정리요약했으며, 작년 중반기에는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내용을 보완하여 발표에 첨가하였다. 청중들의 반응은 매우 컸으면 경악과 분노 그 차제였다.

1월 초 KBS 광주 보도국에서 연락이 와서 전화인터뷰를 했는데 기자는 “부산의 발표 동영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몇 가지를 질문했다. 필자는 한국현대사에서 수많은 사건을 재조사하는 위원회가 우후준순처럼 생겼는데, 유독 5.18광주사태만 재조사가 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5.18은 의혹이 해결된 것이 거의 없다. 교도소 습격과 전남지역 무기고 습격의 주체, 장갑차 운전병의 정체, 카빈총에 의해 후두부 관통 사망자 다수, 신원조회 불명의 12-3명의 시체 등 광주시민이 자행했다고 보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았다. 광주시민들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의혹이 분명하게 밝혀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5.18문제는 경인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많은 대중들이 대불총이 주관하는 현대사재조명 작업에 호응하면서 5.18에 숨겨진 진상을 알게 되었다. 하루빨리 5.18진상조사위원회가 재발족하여 의혹에 대한 자료발굴과 재조사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5.18에 대한 역사적 진실공방은 결국 북한측의 대남공작부서의 자료가 만천하에 공개되어야 북한군 특수부대의 개입의혹이 완전히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역사에 첩보작전은 문서로 남기는 것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자료수집이 용이하지 않고, 또 언제나 한반도가 자유통일방식으로 북한이 해방될지 과연 이런 시점이 올 것인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기밀문서가 공개되지 않은 시점에서라도 북한군 특수부대의 개입의혹 여부를 밝히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완전범죄가 없듯이, 노력만 한다면 북한군의 개입의 흔적과 단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 나타난 탈북자 15인의 증언록, 그 자체가 바로 중요한 흔적과 단서가 되는 것이다. 비록 1차 증언자가 아니라는 약점이 있지만.

역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만인이 共有하는 것’이지 특정집단의 독점물이 아니다. 역사는 만인이 공유하여 찬반 토론의 참여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더 바람직한 해석과 교훈의 결과를 이루어낸다. 전제왕조에서는 왕이 역사편찬에 관여하였고, 공산국가에서는 역사는 공산당이 독점한다. 자유민주국가에서 모든 역사는 모든 시민들이 공유하는 것으로 일개 특정 단체가 역사해석을 좌지우지해서는 안될 것이며 학문과 정보와 자료를 공개해서 토론하고 연구하여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인식에 도달하도록 상호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한다. 이 점에서 5.18에 대한 역사연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5.18에 대한 자유로운 학문적 연구와 활발한 토론이 선행되어야 대한민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민주국가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이주천 2010. 3. 25 / <한국논단> 2010. 5월호에 개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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