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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by 파스칼바이런 2010. 7. 7.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Saint Catherine of Sienna

Saint Catherine of Siena, Doctor

축일  4월29일

 

 

1347년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완덕의 길을 추구하고자 하여 아직 소녀 시절에 도미니꼬회의 제3회에 입회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도시들 간에 평화와 화목의 씨를 뿌렸다.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끊임없이 방어했고 수도 생활의 쇄신에 큰 기여를 했다.

건전한 교리와 깊은 영성에 찬 글을 남겼다.

1380년에 세상을 떠났다.

 


 

 

 

가타리나는 '순수한’이란 뜻이다.

가타리나가 자신의 짧은 인생에서 중심으로 삼았고, 또 자신의 모든 생활 체험에서 분명하고도 끊임없이 확신한 가치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가장 인상적인 점은 그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을 배운 점이다.

 

그녀는 야고보 베닌카사의 스물세 번째 아이로서 영리하고 명랑하고 깊은 신앙을 지닌 사람으로 자랐다.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이 오히려 부모에게는 걱정거리이지만 가타리나는 남편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외모를 가꾸어야 한다고 지나치게 간섭하는 어머니에 대한 반발로 머리를 잘라 버림으로써 어머니를 실망시켰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 아내에게 그녀를 편안히 지내게 해주라고 명령했으며, 기도와 묵상을 하도록 그녀에게 방을 마련해 주었다.

 

그녀는 16세에 도미니코 제 3회에 들어가 그 후 3년 동안 격리되어 기도와 엄격한 생활을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 무리의 추종자들-남자, 여자, 사제, 수도자들-이 그녀의 주의에 모여들었다.

그녀의 관상생활로부터 공적이고 활동적인 사도직이 성장해 나왔다.

그녀의 편지 대부분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준 영적 교훈과 격려였지만 점차 공적인 일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두려움 없이 세상일에 참여하고 완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한사람의 솔직함과 권위를 가지고 말함에 따라 그녀를 반대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녀는 1374년 도미니코회 총회에서 모든 책임을 벗어 버렸다.

 

그녀의 공적 영향력은 그녀의 뚜렷한 성덕과 도미니코회 회원이라는 점, 그리고 교황에게 준 깊은 인상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힘이 미쳤다.

그녀는 터키 인들에 대한 십자군과 풀로렌스와 교황 사이의 평화를 위해서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1378년에 대분열이 일어나 처음에는 두 명, 나중에는 세 명의 교황들이 그리스도교세계의 일치와 충성을 지리멸렬하게 만들고 성인들까지도 적대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가타리나는 마지막 생애의 2년을 로마에서 교황 우르바노 6세와 교회의 일치를 위한 기도와 탄원으로 보냈다.

그녀는 고통 중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그녀는 그녀의 영적 '자녀들’에게 둘러싸여 운명하였다.

1461년 4월 29일 에 시성되었고, 1939년에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주보성인으로 공인되었다.

그리고 1970년 10월 4일에 바오로 6세는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가타리나는 교회의 영적 저술가와 신비가들 가운데서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그녀가 남긴 영적 증언은 '대화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우리 시대와는 아주 다른 영성과 신앙체험 가운데서 살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생활 안에 육화되어 오시는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산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생애는 우리를 움츠러들게도 하고 웃음 짓게도 하며 때로는 따분하게 만드는 사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즉 여섯 살 때에 겪은 신비체험, 그리스도와의 어린이다운 약혼, 엄격한 금욕 생활 이야기, 잦은 탈혼 상태에서의 환시 등이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유동적이고 급변하는 20세기에 산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타리나의 일생이 주는 가치는 일생을 통해 추구해야 하는 목표로서 성덕을 인식했다는 데 있다.

 

가타리나의 '대화집’에는 네 가지 논술이 들어 있다.

영적세계에 대한 신앙의 증언이다.

"그 누구도 자기가 크나큰 참회를 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다른 사람보다 육신의 절제를 지나칠 만큼 잘한다고 해서, 그것이 덕도 되지 않고 공로도 되지 않는 한 더욱더 큰 완덕을 얻었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어떤 합당한 이유 때문에 현재 참회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악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공로라는 것은 참된 분별력에 비추어 맛들인 사랑의 덕에만 있는 것으로서 그것이 없다면 영혼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이 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대화집」에서

(4,13: ed. latina, Ingolstadii 1583, ff.19v-20)

 

사랑의 유대

 

내 감미로운 주님이시여,

자비로운 당신의 눈을 당신 백성에게, 특히 당신 신비체인 교회에게 너그러이 돌리소서.

당신 엄위를 그렇게도 많이 거스른 비참한 나 자신만 용서하시기보다 무수한 당신 피조물을 용서해 주신다면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더 큰 영광이 돌아가리이다.

당신의 백성이 죽음 안에 앉아 있고 나 홀로 생명을 누린다면 내가 어떻게 위안을 느끼겠습니까?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신부인 교회 안에 나의 잘못과 다른 피조물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죄의 어둠을 볼 때 어떻게 내가 위안을 느끼겠습니까?  

주여, 특별한 은총을 당신께 비오니, 당신 모상과 유사성으로 사람을 지어 내시려 쏟으신 그 사랑을 사람에게서 거두지 마소서.

무엇 때문에 또는 누구 때문에 사람을 그렇게도 높은 품위에다 두셨습니까?

이는 당신 안에 반사되어 있는 피조물을 보실 때 당신을 매혹시킨 피조물에 대한 당신의 꺼짐 없는 사랑-그 하나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주님께서 올려 주신 그 품위를 죄의 탓으로 인해 응당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나는 밝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같은 사랑으로 충동되시어 무상으로 인류를 주님과 화해시키시고자 당신 외아드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드님께서는 우리와 주님 사이에 중재자가 되시고 우리의 불의와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징벌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이것은 아드님이 당신께서 우리 인성을 취하라고 명하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하신 것입니다.

 

오, 헤아릴 수 없는 심원한 사랑이여! 높고도 높은 지존께서 더할 수 없이 비천한 인간 상태의 최하위까지 내리시는 것을 볼 때 부서지지 않고 돌처럼 남아 있을 심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비참하고도 병든 아담의 육체 안에 당신의 영원한 신성을 묻으실 때, 사랑 안에 실현하신 그 일치의 공덕으로 인해 우리는 당신의 모상이 되고 당신은 우리의 모상이 되셨습니다.

 

주여,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표현 할 수 없는 당신의 사랑 때문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이 사랑에 의지하면서 나는 내 영혼의 모든 힘을 다하여 겸손되이 당신의 엄위께 비오니, 이 비천한 주님의 피조물들에게 너그러이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홈에서)

 


 

 

 

이 젊은 성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이태리의 주보성인인데, 그 이유는 이태리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종교적, 정치적인 공동의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빛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가타리나 베닌카사는 16세의 나이에 도미니코회의 제3회원이 되었으며, 자신의 글에서도 증명되는바와 같이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그녀의 주변에는 친구들로 이루어진 정신적인 작은 한 가정이 형성되었다.

특별히 혼란스러웠던 그 시대에 그녀는 끊임없이 평화에로 모든 사람들을 소환하였으며, 교황님을 아비뇽으로부터 로마로 되돌아오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교회의 개혁을 위한 씨앗을 던졌다.

성녀는 이 모든 것을 일치와 사랑을 위해 행하였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온 교회에, 성녀의 저서들 중에 포함되어 있는 교의를 공포하며, 교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인 '교회박사'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가타리나의 모범은 개혁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혁은 반동의 결실이 아니라, 사랑의 결실이며, 교회를 자극하는 인간적인 노력의 결실임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개혁이든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하느님의 왕국을 항상, 더욱더 적합하게 건설할 수 있도록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생애는 성 바오로사도께서 기록한 대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 25) 하신 말씀의 좋은 예(例)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가타리나는 많은 공부도 하지 않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당시의 문란하던 교회를 바로잡는데 누구보다도 위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1347년 주님 탄생 예고 축일(3월25일)에 염색(染色)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베난카사 가문의 스물 세 번 째 자녀로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본시 신심이 두터웠던 양친은 생활도 넉넉했으므로 많은 자녀들을 아무 어려움 없이 충분한 교육을 받게 할 수 있었으나 유난히도 명랑한 자라 불리던 가타리나는 다른 형제, 자매와는 일찍부터 달라 예수님과 그 외의 발현을 보기도하고 탈혼 상태에 빠지기도 하여 하느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자란 것을 모든 이들이 알게 되었다.

 

이처럼 풍부한 영적 은총을 받고 있던 가타리나였으므로 겨우 7세에 이르자 평생 동정 서원을 발하게 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양친은 후에 이 미모의 딸을 출가시키려고 하던 무렵 뜻밖에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여 그녀를 하녀처럼 혹사시켰다.

그러나 가타리나는 다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에 힘을 얻어 이러한 학대를 3년간이나 참았다.

그러던 중에 양친도 가타리나가 하느님께 특별히 선택된 자라는 것을 깨닫고 그 후부터는 그녀의 결심을 방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참으로 참기 어려운 마음의 번민을 당하게 된 것은 오히려 그 후부터이다.

어찌된 일인지 정결치 못한 생각이나 상상이 자꾸 일어나 이틀에 반시간만 자며 고행과 기도를 통해, 그리고 믿음 안에서 화살기도를 수시로 바치고 예수님을 외치면서 해도 도저히 물리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의 시련에 불과했다.

어느 날, 가타리나가 사랑과 고통으로 인해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불렀을 때 예수님께서 그녀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

 

-가타리나: 나의 주님, 악마들이 그 숱한 음란함을 통해 내 마음을 괴롭혔을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주님: 나는 네 마음 안에 있었다.

-가타리나: 오! 주님, 친히 진리이신 당신 앞에 나는 엎드려 말씀드립니다.

내 마음은 혐오스럽고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어떻게 당신께서 거기 계실 수 있었는지요?

-주님: 그러한 생각과 유혹들이 네 마음 안에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즐거움이었느냐, 고통이었느냐, 기쁨이었느냐, 슬픔이었느냐?

-가타리나: 큰 고통과 갈등이었습니다.

-주님: 네 마음 중심에 숨어 있는 내가 아니라면 누가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겠느냐.

내가 거기에서 현존하지 않았더라면 음란한 생각이 가득 찼을 때 너는 쾌락에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네가 원수들로부터 유혹 당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너의 구원을 위해 숨어서 아무 흔들림 없도록 너를 보호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나는 네게 더 친밀하게, 더 자주 나를 드러내 보이리라.

가타리나는 이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느끼면서 이후에는 어떠한 유혹의 폭풍우가 닥쳐와도 용감히 일어나 확고한 신념으로 훌륭히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가타리나는 3년간 기도, 묵상, 노동을 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준비를 하고 18세 때에 비로소 성 도미니코의 제3회에 들어갔다.

이 회의 회원은 수도원에 들어가서 동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고 세속에 있으면서 성 도미니코의 정신을 따라 가능한 복음의 권고를 실천하며 영혼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회이다.

 

그러므로 가타리나도 입회한 후에는 읍내를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 모두를 나누어 주고, 때로는 그들을 위해서 자선을 모으기도 하고, 병자들에게는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하고, 특히 나병, 흑사병 같은 무서운 전염병에 걸린 자들도 정성껏 간호해 주며, 그 외 남의 집 청소까지 맡아서 해 주는 등, 손발이 닳도록 활약한 모습은 실로 감탄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심이란 고약해서 이 같은 가타리나에 대해서도 모함과 악담을 하며 그녀의 명예를 손상시키려는 이가 없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유암(乳癌)을 앓고 있던 한 부인은 전부터 가타리나에게 많은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이웃 사람들에게 근거도 없는 모함을 했으나 그녀는 조금도 나쁜 기색을 하지 않고 더욱 더 그 부인을 위해 친절한 간호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것을 못 마땅히 생각하고 나무라자 가타리나는 "예수께서는 배은망덕한 유다인들이 당신을 저주하며 모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성스러운 사업을 결코 중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도 겨우 두세 번 악담을 들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명하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덕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점잖게 대답했다고 한다.

 

가타리나는 종종 주님의 발현을 뵙는 것과 먹지 않고 마시는 것으로만 생명을 유지하는 특은도 받고 있었다.

하루는 예수께서 한 손에는 황금관(冠)을, 다른 한 손에는 가시관을 들고 나타나셔서 "나의 딸아, 어느 것이든지 하나를 선택하여라."고 말씀하셨다.

가타리나는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가시관을 잡아 머리에 쓰며 "저는 황송하옵게도 주님의 배필로 선택된 자로서 주님과 같은 고통의 가시관이야말로 적합합니다."라고 말씀드리며 용감하게도 주님을 본받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결심을 명백히 했다.

 

이 같은 예븐 마음씨가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셨음인지 1374년 주님께서 재차 발현하셔서 그의 몸에 5상을 박아 주셨다.

그 상처는 눈에 띄지 않았으나 고통은 극히 심해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주님께서 더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게 지식과 웅변의 은혜를 줄 것이니 여러 나라를 다니며 위정자와 지도자들에게 내 소망을 전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따라 가타리나는 사방 각처를 여행하며 왕후(王候)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들을 방문하고 평화를 도모할 것을 역설하고, 서한이나 저서 등으로 도리를 권고하고,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노력을 다했다.

 

그뿐 아니라 그 당시 교황 영토 내에 두 도시의 시민이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를 배반해 황제에게 추방당하려는 것을 중개도 해주고, 70년 전부터 교황이 프랑스의 아비뇽 시에 체재하고 있는 성좌를 다시 로마로 복귀하도록 동분서주하는 등 그러한 방면에도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그녀의 사명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사치 생활로 기울어지는 폐풍이 있었으므로 가타리나는 이를 크게 염려하며 거리낌 없이 그 개혁 방법을 교황에게 올렸다.

이 권고는 다음 교황 우르바노 6세에 의해 실행되었으나 불행히도 그 방법이 지나치게 격렬해 몇몇 추기경은 불만을 품고 교회를 떠나 다른 교황을 하나 더 세웠다.

 

가타리나는 이런 불미스러운 상태를 타개하려고 그들에게 어떤 때는 서한을 보내고, 어떤 때는 직접 찾아가서 간청하기도 하며 얼마나 그 조정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그녀는 뭇사람에게 악한 모범이 되었던 이 사람들이 마침내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하느님께 묵시를 받고 이를 세상 사람들에게도 예언한 바 있으나 그녀 자신은 이 기쁨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만 되었다.

일생을 희생으로 주님께 바친 그녀의 육신이 고행과 병고로 쇠약해져 "성혈, 성혈, 성혈"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때는 1380년 4월 29일이었다.

1461년 6월 28일 교황 비오 2세는 가타리나를 성녀로 시성하셨고, 1866년 4월 1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로마의 수호자로 반포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0년 5월 15일 가타리나를 이탈리아의 첫 수호자로 공포하고, 1943년 9월 15일 그녀를 모든 간호사의 수호자로 삼으셨다.

1970년 4월 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가타리나를 아빌라의 대 데레사와 함께 교회 학자로 세우셨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영적인 부모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참으로 뛰어난 여성이었다.

그는 문맹이나 다름없었음에도 네 개의 논문을 구술하였고, 그 공로로 현재 교회 안에서 셋밖에 없는 여성 교회박사 중의 한 명으로 인정되었다.

 

그는 거의 75년 간 아비뇽에 유폐되어 있던 교황권을 로마로 되돌림으로써 교회의 역사를 바꾸었으며,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흑사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았다.

 

가타리나는 아이들이 25명이나 되는 대가족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태어난 가정보다도 더 큰 가정을 이루었다.

그의 거룩함이 주변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많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모여들어 영적인 권고와 지혜를 구했던 것이다.

가타리나는 그들을 가족이라고 불렀고, 그들은 그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만일 당신이 부모가 아니라면, 아니 친자녀와 돌볼 가족이 있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영적인 부모가 되어 보자.

우리의 경험과 영적인 통찰력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성취하도록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자녀가 자신의 능력과 숨은 바람을 찾아내어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영적인 부모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갖고 있는가?

혹은 영적인 자녀를 두었는가?

나의 잠재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의 잠재력을 발견해야 한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축일  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