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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현대 영성의 현장 / 마더 데레사와 인도 캘커타

by 파스칼바이런 2010. 8. 5.

현대 영성의 현장 · 마더 데레사와 인도 캘커타

(1)

환상과 현실의 엄청난 거리를 넘어서

오장균 가브리엘(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

 

 

 

사랑의 혁명 그 시작

 

1948년, 캘커타의 로레토 수녀원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유고슬라비아의 농가 출신인 수녀 데레사는 아름다운 정원, 발랄한 여학생들, 친근한 동료 그리고 안정된 생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인도에 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부르심을 받아 떠나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로레토 수녀원을 떠난다는 것은 그녀가 수녀가 되기 위하여 가족과 조국을 떠났던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수녀원에서 누렸던 물질적 안정에 대한 기억들아 그녀를 괴롭혔다. 그때 데레사 수녀는 이렇게 기도했다.

 

“오 주여, 저는 자유로운 선택과 당신의 사랑으로 여기 머물며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의 이웃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안전은 저의 안전이며, 그들의 건강 또한 저의 건강입니다. 저의 집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이며, 저의 집은 붙잡힐까 봐 두려워서, 먼지가 두려워서, 병균과 온갖 질병이 뒤범벅이 되어 아무도 접근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입을 옷이 없어서 집을 나서지 못하여 기도하러 갈 수조차 없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더 이상 기운이 없어 아무 것도 먹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들 주위를 왔다갔다 하건만 아무런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이재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어 울지 못하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천한 사람들의 집입니다.”

 

그리고 데레사 수녀는 캘커타의 가장 비참한 동네의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들 속에 뛰어들어 그곳에 버려진 아이들을 품에 안음으로써 그녀가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그리스도를 만나기 시작한다.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실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것은 불평등과 무관심, 불의와 폐쇄 사회였던 ‘문제의 땅’ 인도 전역을 뒤흔든 ‘사랑의 충격’이었다. 아니 온 세상을 놀라게 한 가장 크고, 가장 어려운 혁명, ‘사랑의 혁명’의 시작이었다.

 

인도인들조차 모르겠다는 인도

 

‘천의 얼굴을 가진 불가사의한 땅’, 인도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말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인도인들은 상류계급, 상위 카스트 출신으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의 모든 이익을 움켜쥐고 있는 이들이다. 이런 선전에 기초한 외부인이 지극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인도를 이해하고 심지어 동경하게 됨은 당연하다 하겠다. 인도 인구는 현재 10억에 이르고 있다. 인구의 절대 다수, 85퍼센트는 힌두교인이다. 그 외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무수한 군소 종교 집단이 있고 그리스도교 신자는 인구의 1.2퍼센트 정도뿐이다. 여기에 문맹률이 70퍼센트, 절대 빈곤의 생활을 해야만 하는 인구가 30퍼센트를 차지한다. 인도에서는 정확한 통계가 불가능하고 이러한 통계에 대하여 식자층 또는 상위 계급의 사람들일수록 애써 축소하려 한다.

 

인도에서 상류 계급은 절대 다수인 무지한 힌두인들의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다수의 횡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현상의 민주주의가 나타난다. 이 와중에 더욱 고통 받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뿐이다. 그들은 전생의 업 때문에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그들 스스로 믿고 그렇게 훈련되어왔다. 자신들의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뿌리 깊은 종교 의식, 사회 문화의 견고한 제한 때문이다. 실례로 그들은 하고 저축을 싶어도 통장조차 만들 수 없다. 은행은 보증 없이는 구좌를 열어 주지도 않는다. 인도에서 가난이란 죽음보다 더한 저주, 그것이다.

 

일반인들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관심이라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힌두에서 정의, 도덕, 평등이란 우리의 개념과 엄청난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정의란 자신이 타고난 운명, 직업에 순명함(Dharma)이며, 평등이란 자신들의 업(karma)에 따라 자신들이 있게 된 것이라는 체념이고, 도덕이란 곧 다르마와 카르마에 충실함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마더 데레사의 활동

 

데레사 수녀가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 전재산은 5루피였다. 5루피는 지금 우리 돈으로 약 150원 정도로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이 빵 한 조각으로 두 끼는 때울 수 있는 돈이다. 데레사 수녀는 도시 근교 빈민촌의 어떤 거리에서부터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어린이와 병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학령기가 지났지만 전혀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 아니 어느 학교에서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그런 아이들에게 뱅갈리 문자와 알파벳, 그리고 어떻게 몸을 씻는 것인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며칠 뒤 데레사 수녀가 가르치던 로레토 수녀원 고등학교에서 두세 명의 소녀가, 또 며칠 뒤에는 소문을 듣고 로레토 수녀원에서 교사 몇 사람이 찾아와 돌보는 일을 거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녀의 공동체는 지금 인도의 캘커타뿐만 아니라 전세계 68개국에 퍼져 있고 수많은 수녀, 수사, 자원 봉사자들이 70여 개의 어린이들을 위한 ‘빈민 학교’와 2백 60개의 병원과 진료소, 58개의 ‘나환자 수용소’, 32개의 ‘죽음을 기다리는 집’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원 봉사자 가운데는 인도 여행 때 캘커타의 상황에 충격을 받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에 헌신하고 있는 의사,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저는 예수님의 몸을 만졌습니다”

 

막 대학을 마치고 온 한 자매가 있었다.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규칙(사랑의 선교회)에 따라 선교회에 입회한 바로 다음날 ‘죽음을 기다리는 집’으로 가게 되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집’(Home for Dying Destitues) 또는 ‘임종의 집’은 캘커타를 비롯 인도 전역에 버려져 돌보는 이 없이 죽어 가는 이들을 데려다 어머니처럼 돌보아 평안히 임종하도록 해주는 곳이다. 3시간쯤 지난 후 돌아온 그 자매가 얼굴에 미소를 함빡 머금은 채 마더 데레사의 방으로 들어왔다. “3시간 동안 저는 예수님의 몸을 만졌답니다.” 데레사 수녀가 물었다. “무엇을?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녀는 대답했다. “사람들이 길에서 한 남자를 데려왔는데, 온몸에 구더기가 들끓었습니다. 그의 몸을 만지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지만, 저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계속했다. “등살이 그대로 땅에 떨어져 등에 있는 뼈가 다 떨어져 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거리에서 데려온 한 남자를 소독하고 씻겼을 때, 그때만큼 그리스도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랑의 선교 - 가난 곧 자유

 

마더 데레사와 그녀의 동료들은 가난한 삶을 갈망한다. 그들에게 가난이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정 가난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가난’(여기서 가난이란 인간의 기본적 품위마저 유지할 수 없는 절대적 빈곤, 비참함을 의미한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의 선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왜 가난이 자유와 용기를 주는 원천인지를 이해하게 한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즉 그리스도의 가난함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도움과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배고프신 그리스도, 버려진 그리스도, 외로운 그리스도, 말벗이 필요한 그리스도, 사랑에 굶주린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데레사 수녀는 늘 강조하여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진정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인도 땅 캘커타였을까?

 

왜 하필 인도 땅 캘커타였을까? 그녀의 혁명이 시작된 곳이. 그것은 인도가 안고 있는 무수한 문제 때문일 것이다. 인도는 카스트 제도에 기인한 뿌리 깊은 계급 의식, 계급간의 갈등과 적대감, 언어 문제, 인종간의 갈등, 종교 신앙간의 충돌, 지역간의 분쟁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로 인해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은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데레사 수녀의 할 일. 그래서 사랑의 혁명은 인도 땅 캘커타에서 필요했다.

 

그녀로 인하여 인도 땅 안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수많은 일들이 이루어졌다. 인디라 간디 수상마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그런 일들을 데레사 수녀는 해냈다.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뿌리 깊은 종교적 타성마저 뛰어넘어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거대한 힌두 문화를 그 근본 뿌리에서부터 흔들고 있는 것이다. 단지 사랑의 실천 하나만으로. 그렇다. 이 시대의 성인이란 토마스 머튼의 말처럼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 삶으로 진정 소중한 무엇을 깨닫게 하여 보여 주는 이”, 바로 인도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이다. [경향잡지, 1994년 5월호]

 


 

 

 

현대 영성의 현장 · 마더 데레사와 인도 캘커타

(2)

 

묵묵히 실천함으로써 모든 것을 말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러고 감동적이다.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숙연해지고 눈시울이 몇 번씩 뜨거워지는 감격을 만난다. 그녀의 삶 자체가 메아리로 울려오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 선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묵묵히 그녀의 길을 걸어 갈 뿐이다. 데레사 수녀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영신적인 힘과 용기의 원천인 미사에서는 물론, 치료를 받아야 할 고통 중의 모든 영혼 안에서……. 제대 위의 예수와 길가의 벗들, 그들은 바로 똑같은 주님으로 데레사 수녀에게 자리한다.

 

데레사 수녀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계명은 구별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계명이다. 그녀에게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게 하는 열쇠는 결코 형이상학적 윤리적 설명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결코 사회사업가가 아니다

 

마더 데레사와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는 그들의 일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업은 그분의 방법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확산하기 때문이다. 어느 힌두교인이 그들의 사회 사업과 사랑의 선교회가 실천하는 봉사가 똑같이 같은 사회 사업이라고 했을 때, 데레사 수녀는 분명히 이 둘을 구분하였다. 데레사 수녀는 자신들의 일이 사회 사업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동료들에게 말한다. 그녀의 말처럼 선교회의 일원이 되려면 ‘명랑한 고난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라 기꺼이 고통받기를 선택한 것이다. “항상 웃으면서 살아갑시다. 일을 위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있었던가?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 안에서…… 종교와 종교의 벽을 넘어 사랑의 일치 안에서 한 줄의 글, 한마디의 설교도 없이 그리스도를 이렇게 증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직접 그녀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인이다. 우리는 사회 사업가도, 교사도 간호사도 의사도 아니다. 우리는 신앙의 자매들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 계시는 예수께 봉사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목숨까지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자 한다. 그분 없이는 우리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설명해 주신다. 그분은 우리 삶의 이유요 의미다. 우리의 전부다.”

 

와서 보라!

 

마더 데레사와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형편없는 초상화를 억지로 그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마더 데레사 스스로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이 아무런 설명이나 말없이 침묵 속에서 다만 밝은 얼굴로 그들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깊은 웅변인가를 될 느끼게 것이다. 그들의 일은 너무나 분명하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일이 결코 자선이나 도움의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사랑의 실천이냐고 묻는다면 더욱 침묵하리라. 그들은 지금 배고픈, 상처받은, 죽어가는 문둥이로 가면을 쓰고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뿐이다. “말은 거의 하지 마십시오. 침묵 속에서 행하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빗자루를 들고 남의 집 앞을 청소해 보십시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마더 데레사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을 기쁘게 주는 사람”이다. 또한 “타인의 고통을 - 그가 우리와 다른 신앙, 가치, 문화를 갖고 있는 전혀 별개의 사람들일지라도 - 함께하는 이”를 의미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진정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또한 용서받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왜 우리가 용서받아야 한단 말인가? 세상의 수많은 고통과 아픔의 원인은 곧 우리들이가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 가야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보살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나누어 주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우리가 한 조각의 빵을 나누어 주고 한 벌의 옷을 제공해야 하는 하느님 구원의 손으로서 사랑의 도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평화를 위하여 대포나 폭탄이 결코 필요하지 않다. 매일 우리가 간청하는 사랑과 자비가, 기쁨과 기쁨이 가져다 주는 ‘이해 깊은 사랑’이 요청될 뿐이다. 이 사랑은 또한 겸손을 요구한다. 우리가 겸손하게 살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함께 나누는 고통”, 데레사 수녀는 이것을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데레사 수녀에게 고통이란 더욱 위대한 사랑과 더욱더 큰 관용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고통이 없다면 그들의 일은 단순한 사회 사업 혹은 단순한 선행이나 도움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통은 함께 받아들이고 함께 참아 낸다면 바로 기쁨인 것이다.”

 

교회는 바로 당신과 나

 

“예수님이 교회의 주님이라면, 교회는 더 모범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묻는 물음에 데레사는 되묻는다. “그러나 교회는 누구입니까? 당신과 나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궁전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만이 궁전을 필요로 합니다.” 그녀의 태도는 분명하고 단호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입니다. 각 사람 하나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이시고, 그 순간에 그 한 사람은 오직 그 한 분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특별한 성소

 

“부자들에게 관대한 수도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들의 특별한 성소는 한 사람 한 사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실재가 된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대중을 보살피지 않습니다. 더 큰일에 봉사하는 성소는 다른 이들에게 유보되어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완벽한 지시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자발적으로 한 사람 한사람에게 봉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사회 구조를 개조하라고 요구하신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하느님 사이의 문제일 뿐. 우리는 명목이야 어떻든 한 사람 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일은 사회 조직에 관한 일도 아니며, 무엇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가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

 

‘총체적 부패 구조’라고 말해지는 우리 사회! 우리 사회에도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가? 물질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영혼의 굶주림으로, 삶의 좌표를 상실하고, 자식들로부터 버려진 우리들의 어버이들, 부모들로부터 버려져 울고 있는 어린 생명들. 그러나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가난한 이들에게 교회는 사치스러운 호텔, 백화점, 고급 레스토랑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너무나 많은 신자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서부터 회의적이다. 정직한 영혼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정치 사회적 어두움 그 자체였던 불우했던 1970~80년대보다 더한 도전이 우리 앞에 있건만 교회는 문제를 제대로 인식이라도 하고 있는가? 도덕과 양심을 운운하는 것은 이 땅의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위선을 덮씌우는 상처일 뿐이다.

 

말하라! 다만 행함으로! 설천으로! 함께 나누어라! 기꺼이 빚투성이가 될지라도. 죽기까지 다 내어 주셨던 그분처럼. 설천 속에서만이 우리가 그토록 목말라 하는 ‘영성’이 도대체 무엇인지 스스로 대답하리라. 보라! 누가 누구를 진정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상처가 이토록 깊다. 영혼들이 바라는 단 하나 침묵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 진정 가난한 교회이다. 말 그대로 교회는 가난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본연의 영성에 눈을 떠야 할 때다. 이 길만이 교회가 이 시대에 정확히 응답하는 하나의 모습이다.

 

“가난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이 시대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만이라도 진정 가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이 땅의 젊은이 그 누구도 설교에, 명언에 더 이상 감명되지 않는다.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한단 말인가? 모든 것이 교육될 수 있는지 몰라도 사랑만은 가르쳐지지 않는다. 사랑은 오직 삶으로만 대답될 뿐이다. 성직자마저 또 하나의 거짓말쟁이가 된다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필요한 이에게는 기꺼이 다 내주어야 한다. 그분이 그러하셨듯이. 말없이 사랑하는 것만이 이 시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잣대이다.

 

“사랑하십시오. 사람들 속에 있는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들 속에 있는 예수께 봉사하십시오. 희생될 때까지 사랑하십시오. 예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의 증거로써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면,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소박하게 살아가십시오. 진정 가난하게 살아가십시오.”

 


 

축일 9월 5일 복녀 마더 데레사 (Mother Tere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