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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생애

by 파스칼바이런 2011. 4. 26.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생애

(축일 8월 14일)

 

 

 

성모님의 성화 앞에서 기도하던 한 소년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러자 소년은 성모님께 “성모님, 저에게 뭘 주시겠어요?”라고 청합니다.

성모님은 흰 꽃이 그려진 왕관과 붉은 꽃이 그려진 왕관을 보여주시며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고민하던 소년은 결국 “두 개 다 주세요.”라고 욕심스럽게 답합니다.

이렇게 어릴 적 욕심처럼 순결의 흰 왕관과 순교의 붉은 왕관 모두를 쓰신 성인이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ia Kolbe) 신부입니다.

 

콜베 신부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인 부부 율리오 콜베와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직후 ‘라이문도’라는 세례명을 받은 콜베는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강한 성모님 신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1911년 18세에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형 프란체스코와 함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막시밀리아노라는 새로운 이름의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1912년에는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학업 중인 1917년 로마에서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성모기사회를 창설합니다.

1918년 사제서품을 받고, 다음 해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 해 9월에 폴란드로 귀국하여 교수생활을 하다가, 10월에는 본격적인 ‘성모기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922년 1월에 콜베 성인은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1935년 70만부 발행, 1949년 100만부 발행)’를 창간하였으며, 1927년 10월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마을(니에포칼라누프)’를 건설하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일본 학생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콜베 신부는 동양 선교에 대해 사명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1929년 12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이듬해 4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성모의 기사’를 발행했으며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6년 후, 콜베 신부는 폴란드에 있는 성모의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귀국했습니다.

이즈음은 나치 독일의 침략 야욕이 가시화되던 시기였기에 그는 전쟁으로 인한 심한 박해와 시련, 특히 자신의 고난을 자주 예고했다고 합니다.

결국 1939년 9월 나치 독일 군대는 폴란드를 점령했으며, 콜베 신부는 1941년 2월 17일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사실 체포된 실질적인 이유는 그가 100만부에 이르는 잡지 발행자로서 폴란드 국민에게 커다란 영향력과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5월 28일 그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던 ’오센침(아우슈비츠)’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콜베 신부는 사제이기에 더욱더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결코 평온함을 잃지 않았으며 자신이 더 어려우면서도 오히려 절망하고 있는 주위의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습니다.

또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설교와 면담을 해줌으로써 수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심어 주는 데 전력하였습니다.

그러다 때로는 발각되어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몸이 망가져 갔지만, 수용소 안에서도 그의 사제직무 수행은 불굴의 의지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는 훗날 순교로 꽃을 피웠습니다.

 

수용소에서 한 죄수가 탈출에 성공하는 일이 발생하자 화가 난 수용소장은 자신이 세운 규칙을 내세우며 탈출한 사람이 속한 감방의 수감자 중 10명을 굶겨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무작위로 선택된 10명 중 한 사람,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소리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감자 중 한 사람이 대열에서 나와 그 사람 대신 굶어 죽겠다고 자원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콜베 신부였습니다.

 

콜베 신부는 인간이 세운 가장 사악한 곳 중 하나인 아사 감방을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9명의 수감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수감자들은 굶주림 속에 고통당하면서도 콜베 신부와 함께 죽음의 자리를 찬미의 자리로 바꾸었으며, 콜베 신부의 병자성사와 함께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마침내 콜베 신부를 포함한 4명만 남게 되었을 때 나치는 독약 주사를 투약하였습니다.

이렇게 콜베 신부는 4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그 날은 1941년 8월 14일이었고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는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어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시복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으며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수감자들의 주보성인입니다.

 


 

축일 8월 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