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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의사에서 수도자로 부활한 김태형 수사

by 파스칼바이런 2011. 5. 6.

 

의사에서 수도자로 부활한 김태형 수사

세속 가치 버리고 주님 가치 따라 주님의 길 행복의 길



 
   
혹자는 미쳤다고 했다. 정말이냐고, 진심이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그랬다.

 흰 가운을 벗고 황토색 수단을 입겠다고 했을 때 세상은 그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의사'와 '수사', 같은 '사'자 계열 직업(?)이지만,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안정된 직업을 때려치운 치기 정도로 여기는 이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무덤덤하다. 12일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만난 예수의꽃동네형제회 김태형(야고보) 수사는 세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는 불과 3년 전만해도 경상대병원 안과 임상조교수였다. 김 수사는 "직업을 바꾼 건 별 대단한 얘기도 아닌데 그 속내를 풀어놓으려니 쑥쓰럽다"며 말문을 열었다.


 

▲ 오랜 사순시기를 끝내고 지금에야 인생의 참다운 부활을 맞이한 것 같다는 김태형 수사. 흰 의사 가운을 벗고 황토색 수단을 입은 그에게서 진정한 행복이, 부활의 기쁨이 절로 전해지는 듯하다.


  

주님 부르심에 응답한 의사

 

   김 수사는 워낙에 '범생이'였다. 어린시절에는 로켓이 좋아 과학자를 꿈꿨지만 소아과 전문의였던 아버지 권유로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반항 한 번 못해보고 컸어요. 물 흐르듯 살았죠. 부모님께서 집 근처 의대에 진학하면 좋겠다고 하셔서 진주에 있는 경상대 의대에 진학했고, 의사가 됐어요. 그 후 전공으로 안과를 선택한 것도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외과나 내과 같은 이른바 메이저과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거든요."

 여느 동료 의사들처럼 안정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던 그는 세상 사람들 사는 방식에 따라 그렇게 살아가려 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 화목한 가정을 꾸려 사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뜻하지 않은 때 그에게 나타났다. 2003~2005년 경남 고성의 한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던 그는 개인적인 시련에 부닥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고 털어놨다. 김 수사는 말할 준비가 덜 돼있는 듯했다.

 "당시에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어요. 그 전까지 주일미사만 겨우 나가던 제가 '과연 주님이 현존하시는가'하는 고민을 하게 될 정도의 시련이었지요. 어려움을 이기려 매일미사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주님을 찾았죠."

 평일미사에 매일 참례하는 그를 눈여겨본 본당 신부의 권유로 주일학교 교사직을 맡고, 젊은이 기도회 봉사자로도 활동하게 되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보건소에서 만나던 환자 대다수는 어렵게 사시는 홀몸 어르신이 많았어요.

사정이 그렇다 보니 대체로 행색이 남루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환자들을 대할 때 저도 모르게 짜증섞인 태도로 대하곤 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설명도 건성으로 하기 일쑤였죠. 그런데 차츰 저도 모르게 환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더라고요."

 김 수사는 기도회에 나가 찬양을 하고, 기도를 바치며 '주님께서 아프고 힘든 병자들을 통해 내게 자신의 현존을 증거하시려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제 능력이 잘나서 의사가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지…. 의사라는 직업도 주님이 주신 것이고, 주님이 임의대로 허락하신 것이니 언제라도 다시 빼앗아 가셔도 할 말이 없겠더라고요. 그러면서 마음을 비우게 됐지요."

 2007년 꽃동네에서 열린 피정에 참가한 김 수사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봉헌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혼인'이었다. 김 수사는 "물론 결혼을 하고도 아픈 이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주님이 제1순위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그런 연유로 남들처럼 결혼해 평범하게 살겠다는 꿈을 내려놓는 대신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솔직히 쉽지는 않았어요. 주님 뜻을 최우선으로 따르게 해달라고 늘 기도했고, 또 그 뜻이 무엇인지도 깨달았지만 그 전과는 너무 다른 길이라 망설여졌어요. 수도회 입회 신청서를 쓰러 가는 길이 얼마나 멀게 느껴지던지요."

 하지만 그에게는 뜻을 굳힐 수 있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 선배가 있었다. 예수의꽃동네형제회 원장 신상현 수사다. 신 수사 또한 내과 의사 출신의 수도자다. "제가 어떻게 해야할까요?"하는 김 수사 질문에 신 수사는 "뭘 어떡해? 투신해야지!"하는 명쾌한 말로 그의 결정을 도왔다.

 "정답이었어요. 투신하면 되는데…. 그냥 뛰어들면 되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뜨겁게 나를 부르시는데 뭐가 두려워 망설였는지. 한 순간 '아! 그렇구나'하는 탄성이 나오더라고요."

 결심이 선 그는 누가 이끈 것도 아닌데 홀로 꽃동네 안에 있는 인곡자애병원을 찾아가 둘러봤다.

그곳에서 마주친 중증환자들을 보며 '정말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여기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 길로 마음을 굳혔다.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호하게.

 김 수사의 갑작스런 결정에도 부모님은 따뜻한 지지를 보냈다. 김 수사는 "부모님께서 선뜻 동의해주신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며 "아마도 10년 전 먼저 수도자의 길에 들어선 여동생(김태희 데레시아 수녀, 성바로오딸수도회) 덕에 충격이 덜 하셨던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그렇게 의사에서 수사가 됐다.
 

 

오랜 사순을 끝내고 부활로

 

 

▲ 환자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김태형 수사. 지금 이 순간 그는 수사도, 의사도 아닌 어렵고 아픈 이를 진정으로 위로하는 주님의 충실한 아들이다.

 

 

 2월 1일 첫 서원을 한 김 수사는 요즘 꽃동네에서 1인 3역을 하느라 바쁘다. 꽃동네 인곡자애병원 부원장으로 첫 소임을 맡아 행려인과 수용자들의 눈 건강을 위해 애쓰고 있다. 꽃동네 가족들은 "안과 선생님이 생겨 든든하다"며 좋아한다.

 "그간 꽃동네에 안과의가 없었어요. 어르신 환자 중 녹내장이나 저시력으로 고생하는 분이 많아 안과 의사가 필요했는데 다행이죠. 일주일에 두 차례씩 진료를 보며 의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네요."

 하지만 김 수사는 요즘 다른 소임으로 더 바빠졌다. 꽃동네형제회ㆍ자매회로 이뤄진 '꽃동네수도자 찬미단'에 스카우트돼 2집 앨범 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수사가 되기 전 청년 기도회에서 찬양을 하면서 음악으로 주님을 찬미하는 것에 큰 감동을 느꼈었어요. 당시에 틈틈이 작곡도 하곤 했는데, 별 반응이 없었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꽃동네에 들어오고 난 뒤로는 제 음악실력을 인정을 받고 있어요. 이것도 주님의 은총이겠죠?"

 김 수사는 '알렐루야''주님이 내 마음에' 등 4곡을 작사ㆍ작곡해 이번 앨범에 넣었다. 특히 '주님이 내 마음에'는 자신의 성소와 열망을 표현한 곡이라서 더 눈길이 간다.

 "주님이 내 마음에 불을 지르셨네/ 불꽃처럼 살라 하시네/ 주님이 내 마음에 불을 지르셨네/ 성령이 나를 태우시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불/ 고통과 죽음 대신하는 불/ 주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열망의 불/ 성령의 불이 나를 태우네"

 인터뷰 내내 평온하고 맑은 미소로 답하던 김 수사에게 "이번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하고 넌지시 물었다. 그는 큰 웃음으로 화답하며 말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 순간부터가 제겐 부활이에요. 그 전까지의 삶은 사순시기였고요. 물론 사람들이 '도대체 왜 지금이 더 행복하냐'고 물어볼 수 있겠죠. 저 또한 예전과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면 이렇게 살 수 없었을 겁니다. 못 살죠. 하지만 지금의 제겐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순간이에요. 이런 게 부활의 기쁨인가요?"

 그는 입회하기 전 갖고 있던 재산과 자동차를 지인들에게 나눠주고나니 '속이 후련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는 흰 가운보다 황토색 수단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서연 기자
kitty@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