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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고 이태석 신부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이태석 1막 1장 - 삶과 신앙

by 파스칼바이런 2011. 5. 12.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이태석 1막 1장 - 삶과 신앙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기에 … 내가 갑니다”

공부 음악 신앙생활 모두 ‘1등’

군 제대하며 성직자의 길 결심

너무 척박해 아무도 가지 않는 아프리카 남부 수단 톤즈에서 8년간 살며 한센병 환자 돌봐

발행일 : 2011-01-23 [제2731호, 13면]

 

 

 

 ▲초등학교 시절 이태석 신부.

 

 ▲중학교 시절 이태석 신부(맨 오른쪽).

 

 ▲고등학교 시절 이태석 신부(뒷줄 왼쪽 세번째).

 

 ▲대학 시절 첼로 연주를 하고 있는 이태석 신부.

 

 

‘못 하는 것이 없던 자랑스러운 내 아들’.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 신명남(안토니아·85)씨는 어린 시절의 이 신부를 이렇게 표현했다. 1962년 9월 19일 부산 출생 이태석 신부. 그는 공부, 음악, 신앙생활 등 못 하는 것이 없는 착하고 똑똑한 아들이었다. 다달이 상을 타와 상장으로 도배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갈치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10남매를 키운 홀어머니에겐 온 세상에 자랑해도 모자랄 아들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피아노 소리를 듣고 몹시 배우고 싶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을 잘 알고 있던 이 신부는 성당에 있는 오르간으로 피아노를 독학했다. 이뿐만 아니라 첼로, 색소폰, 클라리넷 등 듣도 보도 못한 악기도 독학으로 연주했다.

 

작곡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만든 ‘성탄’ ‘둥근 해’ ‘작은 별’ 등과, 중학교 3학년 시절 작곡한 ‘묵상’, 의대 재학시절 작곡한 ‘아리랑’ 등의 곡에서는 음악가로서의 그의 재능을 엿 볼 수 있다. 중학교 시절 부산시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작곡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악보로 남아있지 않다. 무엇인가 남겨 자랑하는 것을 싫어했던 이 신부의 성격 때문이었다.

 

1981년 부산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신부는 어머니의 반대로 신학교를 포기하고 인제대 의대로 진학한다. 그러나 아이들을 유난히도 사랑했던 그는 이미 돈보스코 성인과 닮아 있었다고 가족들은 회고한다. 어린 시절, 길을 걷다가도 고아원만 보면 그 앞을 기웃거렸던 그는 입버릇처럼 ‘나중에 커서 돈 벌면 고아원 차릴거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패션쇼, 마술쇼, 마이클 잭슨 춤 등을 선보이며 아이들과 함께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던 이 신부는 조카들에게도 인기 만점 삼촌이었다. 1987년 인제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90년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평생을 투신할 곳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영성의 수도회를 찾았다. 바로 청소년 교육을 카리스마로 삼고 있는 살레시오회였다.

 

1991년 살레시오회에 입회한 그는 1992년부터 광주 가톨릭대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997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2000년 6월 28일 로마에서 부제품을 받을 당시, 그는 이미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사제로서 살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2001년 6월 24일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고 같은 해 11월 “한국에도 어려운 벽지가 많은데 왜 꼭 아프리카로 가야만 하느냐”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라는 답을 남긴 채 그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전화를 하려면 헬리콥터로 4시간을 날아가야만 하는 오지 중의 오지 아프리카 남부 수단 톤즈. 전기도 없고, 내전의 총성이 그치지 않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곳에서 이 신부는 8년을 살았다.

 

그가 이처럼 톤즈에 자신을 투신한 것은 그의 ‘성소’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말씀과 중학교 1학년 무렵 성당에서 본 ‘다미안 신부’ 영화를 통해 성소를 느꼈기 때문이다. 다미안 신부는 19세기 말 하와이 칼라와오에서 한센병 환우들을 돌보다 결국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죽은 픽푸스수도회의 사제다.

 

수단의 ‘슈바이처’라 불렸던 이태석 신부의 삶과 한센병 환자들의 목수이자 벽돌공, 농부이자 제빵사, 의사이자 간호사였던 다미안 신부의 삶은 닮아있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었을까? 성당을 먼저 지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며 모든 기준을 예수님께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이 신부. 중학교 3학년 시절 십자가 앞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만들었던 노래 ‘묵상’의 가사처럼 그는 모든 것을 바쳐 이웃들을 사랑했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톤즈 사람들과의 이승에서의 사랑은 길지 않았다. 2008년 11월 휴가차 잠시 한국에 돌아온 이 신부는 생각지도 못한 말기암 판정을 받게 된다. 당시 검사결과를 전한 순천향대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유병욱 교수는 “당시 암 판정을 받은 신부님은 자신이 암에 걸린 것보다 그 때문에 아프리카에 남겨두고 온 일을 못하게 된 것을 속상해 했다”고 말했다. “우물을 파다 말고 왔는데, 열흘있다 수단가야 되는데…. 아이들이 기다리는데…”하며 망연자실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여 년 간 이어진 투병생활, 16차례 고통스런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투병생활 내내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 아프지 않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말한 것이 그가 한 유일한 거짓말이었다.

 

“임종을 하루 앞둔 저녁, 이태석 신부는 돈보스코 성인을 만났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 신부는 두 손을 모아 ‘돈보스코!’를 외치더니 크게 십자가를 그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축복했다. 이 신부는 발치에 서 있던 윤석렬 수사에게 ‘에브리싱 이즈 굿(Everything is good!)’이라고 말한 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두 손을 덮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음 날인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35분, 이태석 신부는 가족들과 동료 수도자들이 보는 가운데 웃는 얼굴로 떠났다. 천국 문을 연 그의 나이 48세였다.

임양미 기자 (sophia@catimes.kr)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추모열기 한가운데서

 

“당신이 보여준 지극한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1주기 맞아 전국 각지서 추모 발길 이어져

고인이 보여준 사랑 새기며 실천할 것 다짐

발행일 : 2011-01-23 [제2731호, 16면]

 

   ▲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추모객들이 이태석 신부의 묘소에서 위령기도를 바치고 있다.

 

이태석 신부가 떠나간 지 1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선종 1주기를 맞아 그를 기리는 자리(13일 추모미사, 14일 묘소 참배)마다 그의 향기를 잊지 못하고 찾아온 발걸음이 전국 각지에서 이어졌다.

 

14일, 이태석 신부의 1주기를 맞아 가족들을 비롯한 수많은 추모객들이 고인이 잠들어 있는 전남 담양 천주교 공동묘역 살레시오 성직자 묘역을 찾았다.

 

 ▲ 이 신부 묘소의 봉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추모객들.

 

묘소를 둘러싼 가족들은 나직이 이태석 신부를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그리운 목소리는 들을 길이 없다.

 

이태석 신부 형제 중의 막내인 이태선(베네딕토)씨가 무덤 앞에 KBS 감동대상 트로피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여섯 째 누나 이영남(요안나)씨와 일곱 째 누나 이영애(수산나)씨는 무덤에 쌓인 눈을 치우다 그동안의 그리움을 토해내듯 울음을 터트렸다. 이른 아침부터 와있던 추모객들은 이태석 신부의 무덤 앞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당신이 가신 길을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베푸신 그 사랑을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전달하겠습니다.”

 

- 오카리나를 연주하고 있는 신수희씨. 묘소에 울려퍼진 오카리나 소리에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이태석 신부를 위해 오카리나 연주를 준비한 신자도 있었다. 기도하는 추모객들 틈으로 신수희(율리아·부산교구 남산동본당)씨의 오카리나 연주가 흘러나오자 너나 할 것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연주하는 신씨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신씨는 “이태석 신부님께서 음악을 좋아하셨으니 나도 신부님께 음악으로 선물을 드리고 싶었다”며 “연습시간이 너무 짧아 기뻐하실까 걱정도 되지만 신부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후 1시, 추모미사가 봉헌됐다. 미사를 주례한 이태영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이태석 신부의 형)는 “이태석 신부가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을 더욱 많은 이들이 나누고 맛보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에 앞선 13일 오후 8시, 살레시오회 서울 대림동공동체 성당에서 추모미사가 봉헌됐다. 수도회원들만의 소박한 미사를 봉헌하려 했지만, 신자들의 원의에 따라 성당 문을 더욱 활짝 열었다. 미리 알림을 돌리지도 않았는데 성당 내 300여 개의 좌석이 모두 차고도 자리가 모자라 여분의 의자를 가져다 놓아야했다.

 

특별한 추모예식은 없었지만 이태석 신부를 기억하고, 그의 사랑을 되새기는 마음만은 뜨거웠다.

 

미사를 주례한 살레시오회 관구장 남상헌 신부는 “우리는 이태석 신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됐다”며 “주변 이웃 중 가장 가난하고 소외 받는 이들을 위해 얼마만큼 마음을 쓰고,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

서 일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이태석 신부의 뜻을 기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사에 참례한 이정자(데레사·신림동본당)씨도 “이태석 신부님은 병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으셨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행복한 분”이라며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에서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할지 느끼게 된다

”고 말했다.

 

이날 미사에는 수단 유학생 존, 토마스, 산티노가 함께해 이태석 신부가 생전에 보여줬던 지극한 사랑의 의미를 실감케 했다.

 

 ▲ 13일 살레시오회 서울 대림동공동체에서 봉헌된 이태석 신부 추모미사.

 

 

■ 이태석 신부님을 기억하며

 

이태석 신부님의 삶 안에서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은 돈보스코의 마음과 미소’를, ‘예수님의 마음과 미소’를, ‘하느님의 마음과 미소’를 찾는 것, 그것이 이태석 신부님의 뜻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하신 관구장 신부님의 강론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와 감동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 특히 젊은이, 그것도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마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수많은 말과 감동보다 더욱더 이태석 신부님과 돈보스코 성인의 마음을 따르는 것임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이었네요.

 

우리 형제들은 ‘수단의 돈보스코’라고 이태석 신부님을 부릅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정말 아름다웠지만,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 땅에서 드러나지 않게 그러면서도 아름답게, 살레시안으로서, 아프리카의 돈보스코로서, 가난한 젊은이들과 수십 년의 시간을 함께 살고 있는 살레시오 선교사 수사님들과 신부님들을 기억합니다. 수많은 살레시오 선교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그 모든 살레시안들을 대신해 드러나는 대중의 사랑을 받고 계십니다. 모든 오지의 선교사들과 돈보스코의 아들들과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오늘 밤을 보내렵니다.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 살레시오회 강훈 수사가 이태석 신부 추모미사 후 수도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남긴 글의 일부.

 

이우현 기자 (helen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