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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이달의 성가

가톨릭성가 517번 내가 절망 속에

by 파스칼바이런 2011. 10. 21.

가톨릭 성가 517번 내가 절망 속에 

이상철 신부(가톨릭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11월 위령성월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더욱 많이 기도하고, 우리 자신 또한 언젠가는 맞게 될 죽음을 묵상하며 두 손 모으는 달이 돌아 왔습니다. 령성월을 맞이하며 함께 나누기에 가장 적합한 성가 중의 하나가 바로 517번 ‘내가 절망 속에’가 아닐까 합니다.

이 곡은 성가책에 ‘참회’로 분류되어 있어 흔히 사순시기에 많이 부르게 되는 성가이지만 사실 장례미사에 더욱 적합한 성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가사가 연도 중에 항상 기도하는 시편 130편 -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 성경에는 129편 - 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사오니, 주님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라고 옛 조상님 때부터 불린 이 구성진 가락은 연도를 바쳐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결코 잊지 못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 연도의 가사가 오늘 소개해 드릴 성가 517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성가의 선율은 보르트니안스키(Dimitri S. Bortniansky)가 1825년에 작곡한 것으로 ‘St. Petersburg’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1751년에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에 교회 성가대에서 음악을 접하기 시작했고, 피터스버그와 이태리에서 음악을 공부하여 피터스버그의 궁정 합창단 지휘자, 러시아 황제의 개인 성당의 음악감독 등을 지냈습니다. 그는 오페라를 비롯한 세속음악뿐만 아니라 여러 곡의 전례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성가 517번은 그중 하나로 당시 독일군 의장대의 사열을 마무리 짓는 전통 선율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성가책에 이 선율과 함께 실린 가사는 사실 종교 개혁가 루터(Martin Luther)가 1523년에 시편 130편을 바탕으로 하여 독일어로 만든 것이 사용되었습니다. 애초에 가톨릭 사제였으나 종교 개혁을 일으키며 개신교 창시자가 된 그는 모든 신자가 전례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에 역점을 두었는데, 하나는 성경을 신자 대중들이 읽을 수 있도록 모국어로 번역하는 일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미사 때 합창단이나 사제와 같은 특정인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대중 찬미가의 양산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음악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알려지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음악은 하느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음악은 또한 마귀를 몰아 내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음악은 사람의 모든 분노, 음란, 교만, 그리고 모든 악을 잊게 해 준다. 나는 음악을 신학 다음으로 중요하게 보며 무한히 아낀다.” 루터는 시편 130편을 바탕으로 쓴 이 가사를 바탕으로 두 개의 선율을 붙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후에 이 선율들이 바흐(J. S. Bach)의 작품들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가사는 본래 5절까지 있었으나 개신교 찬송가집에 3절을 뺀 나머지 절들로 4절까지 번역되어 수록되었고, 이것이 우리 가톨릭 성가집으로 넘어 오게 되었습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로 시작되는 시편 130편은 ‘비탄의 노래’ 혹은 ‘애가(??歌, Lament)’라고도 불립니다. 본래 이 시편의 첫 구절에 등장하는 ‘깊은 곳’이란, 단순히 깊은 어떤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었던 곳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는 ‘깊은 구렁(연도에서)’이나 ‘깊은 곳(찬송가에서)’ 혹은 ‘깊은 절망(517번 성가 가사에서)’이라고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지만 그 본래 의미는 ‘죽음의 그늘진 곳’과 같이 죽음과 관련된 장소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시편은 위령 성무일도 저녁기도에서도 사용될 뿐 아니라 오늘날의 연도에서도 기도문으로 사용됩니다. 아울러 영국의 유명한 작곡가인 존 루터(John Rutter)는 자신의 연주용 장례미사곡인 ‘레퀴엠(Requiem)’에 이 시편 130편을 가사로 한 곡을 덧붙이고 있기도 합니다.

 

이 시편에서 저자는 하느님께 자신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실 것을 탄원하고 있으며, 그분의 심판 앞에서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에 마치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처럼 주님께서 그 자비로써 자신과 함께 해 주시는 때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과 의미가 주님께 있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위령성월에 본 가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 성가를 많이 부른다면 좋겠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