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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교회음악산책

[음악 속의 하느님] 세상에서 가장 짧은 명곡

by 파스칼바이런 2011. 10. 23.

 [음악 속의 하느님] 세상에서 가장 짧은 명곡

모차르트의 ‘성체 안에 계신 예수’

 

글: 허영한

 

1791년 12월 7일, 비엔나의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최고의 작곡가로 칭송받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사망한 지 이틀 만에 안장되었다. 3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명곡을 남긴 이 작곡가의 최후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그려지듯이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모차르트는 큰 부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음악과 사랑하는 부인 콘스탄체가 그의 위안이었다. 그나마 콘스탄체도 모차르트 곁을 늘 지켜주지는 못했다. 자주 병을 앓았던 그녀는 바덴의 온천을 좋아했으며, 그녀가 온천으로 떠나면 모차르트는 홀로 남아 작곡과 연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가장 짧은 명곡의 탄생

 

서양음악 역사상 가장 짧은 명곡이 바로 그 온천 도시인 바덴에서 탄생했다. 바덴의 학교 선생이며 성당 지휘자였던 안톤 쉬톨과 모차르트는 가까운 사이였다. 모차르트는 부인이 바덴으로 가기 전에 호텔 예약 등을 쉬톨에게 부탁하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명곡 ‘성체 안에 계신 예수’는 바로 안톤 쉬톨에게 선물로 준 곡으로 알려져 있다.

 

1791년 6월 17일, 온천에 머물고 있던 아내를 만나려고 며칠 전에 바덴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별 생각 없이 이 곡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이 곡의 자필 악보에는 별다른 수정 흔적도, 연주를 위한 지시사항도 거의 없다. 곡 전체가 3분밖에 안 되는 마흔여섯 마디로 된 이 곡이 어떻게 이토록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니는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Ave verum corpus, natum 성체 안에 계신 예수

de Maria Virgine, 동정 성모께서 낳으신 주

vere passum, immolatum 모진 수난 죽으심도

in cruce pro homine, 인류를 위함일세.

cuius latus perforatum 상처입어 뚫린 가슴

unda fluxit et sanguine. 물과 피를 흘리셨네.

Esto nobis praegustatum 우리들이 죽을 때에

in mortis examine. 주님의 수난하심 생각게 하옵소서.

 

이 찬미가는 14세기부터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믿음을 노래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이 찬미가는 성체강복과 성체거양 때 불렀다. 그래서 요즘 이 곡을 영성체 성가로 노래한다.

 

가사는 대체적으로 원어 가사에 충실한 편이다(“가톨릭 성가” 194번 참조). 다만 첫 행의 ‘아베(ave)’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만세’에 해당한다. 따라서 첫 행을 직역하면 ‘만세, 성체여!’가 맞을 것이다. 3행과 4행은 다소 의역되었는데 “모질게 고통받고 희생하셨네,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해.”라 할 수 있다. 또한 마지막 두 행을 다소 무리하게 직역하면 “우리를 위해 먼저 맛보셨습니다, 죽음의 시험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사용하는 마지막 두 행은 심한 의역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

 

이 곡은 현악합주와 오르간이 반주하는 4성부 혼성합창으로 되어있다. 관악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지만 오르간이 가세하여 음향의 풍부함을 더하고 있다. 빠르기는 아다지오, 곧 느리게 진행하며 첫 두 마디는 반주 악기만으로 연주한다. 합창단은 ‘만세’를 두 번 노래하며 시작한다. 여기서는 승리의 분위기보다 경건함이 우선이다.

 

이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사람들은 첫 여덟 마디에 마음이 녹아내린다. 여기에 대단한 작곡 기법이 숨어있는 것은 아니다. 작곡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화음만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단순한 화음으로 이런 선율을 만들었는지 설명할 방법은 없다. 그저 감탄할 뿐이다.

 

다음 여덟 마디는 다소 복잡해진다. 고통을 표현하려고 음들이 조금 뒤 틀리다가 ‘십자가에서’를 뜻하는 ‘in cruce’에서 소프라노만 노래하고 나머지 성부는 잠시 멈춘다. 십자가를 강조하는 방법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상처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음(요한 19,34 참조)을 노래하는 부분이다. 음들이 고통스럽게 움직이며 화음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묘사한다. 성가대 경험이 있는 분들은 이 부분을 부르기 힘들었으리라 짐작한다. 노래하는 우리도 예수님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리라.

 

이어서 마무리하는 음악이 시작한다. 마지막 부분은 지금까지와 사뭇 다르게 시작한다. 이때까지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같은 리듬으로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마지막 부분에서 여성과 남성이 둘로 나뉘어 여성이 먼저 시작하면 남성이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서로 리듬이 엇갈리며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가 분리되어 들린다.

 

여기서 ‘우리(nobis)’가 나온다. 예수님의 희생이 바로 우리를 위한 희생이었음을 기억하는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합창단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마지막 어구인 ‘죽음의 시험을(in mortis examine)’ 노래할 때 선율들이 다시 한번 고통스러워하며 마무리한다. 앞의 ‘십자가에서’를 노래하는 부분과 비교하면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십자가와 죽음을 음악적으로 유사하게 처리하여 서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성체 안에 계신 주님

 

모차르트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성체성혈대축일을 어느 날에 거행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곡을 완성한 6월 17일은 축일 즈음이었으리라 짐작한다. 1791년의 부활절은 4월 24일이었고 요즘 식으로 계산하면 성체성혈대축일이 목요일일 경우 6월 16일, 주일일 경우 6월 19일이 된다. 그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모차르트가 이 곡을 완성한 날은 축일과 근접해 있다. 죽음을 6개월 앞두고 있는 작곡가의 마음에 성체의 의미가 특별히 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허영한 요셉 - 서울대 작곡과, 뉴욕시립대 대학원(CUNY) 음악학 박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 교수.

 

[경향잡지, 2011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