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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7.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

저자: 요제프 라칭거(신앙교리성 장관. 추기경)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2000년 6월 26일 파티마의 성모님 발현에 관한 '파티마 메시지'(The Message of Fatima)"를 발표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신앙교리성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작성한 '신학적 해설' 부분에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의 신학적 위치 그리고 사적 계시의 인간학적 구조에 관한 설명이 실려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발표한 '파티마 메시지'에 실린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에 관한 내용을 널리 소개하도록 하였습니다.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 - 신학적 위치

 

교회의 가르침은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를 구분한다. 이 두 가지는 차원과 본질이 다른 것이다.

'공적 계시'라는 말은 인류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행위를 일컬으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모두 그 문학적인 표현이 발견된다.

'계시'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점차적으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시며, 마침내는 직접 사람이 되시어 강생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당신께 이끄시고 결합시키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지적 통교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생명수여 과정의 문제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하느님 신비에 대한 사고와 이해에 관계되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이는 인간의 이성은 물론 인간 전체를 포함하는 과정이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므로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역사 또한 하나이다.

계시는 언제나 유효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곧 당신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신약성서에 선포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비가 완성됨으로써 끝이 났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계시의 궁극성과 완전성을 설명하려는 뜻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을 인용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주실 다른 말씀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 아드님 전체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예언자들에게는 부분적으로 말씀하셨던 것들을 당신 아드님 안에서는 전체적으로 말씀하셨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이 유일한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동시에 그리고 한 번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다시 그분의 말씀을 문제시하려고 하거나 또는 어떤 환시나 계시를 바란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께 눈을 돌리지 않고 그분과는 다른 것이나 어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유일한 계시가 그리스도와 신약성서에 기록된 그분께 대한 증언으로 완성되었으므로, 교회는 교회 역사의 이 특별한 사건과 그것을 보장하고 해석하는 성서 말씀에 의지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교회가 이제 과거만을 바라보며 단조로운 되풀이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계시가 완결되었다고는 하여도 그것이 완전히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시대를 살아가며 계시의 내용 전체를 점진적으로 파악해 가야 할 것이다."(66항).

사건의 유일성과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 교회가 어떤 식으로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하신 고별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주님께서는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너희를 이끄시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6, 12-14)하고 말씀하셨다.

한편 성령께서는, 이전에는 전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밝혀 주시는 안내자로 활동하신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무한한 넓이와 깊이이다.

다른 한편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요에서 그 무한한 깊이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 무한한 깊이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대 그레고리오의 심오한 말을 인용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읽는 사람은 더불어 성장한다."(94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께서 교회를 이끄시고 이로써 말씀이 성장하는 세 가지 중요한 방법을 지적한다.

이는 곧 신자들의 명상과 공부로써, 영적인 것들에 대한 좀 더 깊은 인식을 통하여 쌓이는 경험으로써, "주교직 계승을 통하여 확고한 진리의 은사를 받은 이들의" 설교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로소 '사적 계시'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사적 계시란, 신약성서의 완성 이후에 있었던 모든 환시와 계시를 일컫는다.

파티마의 메시지도 이렇나 사적 계시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한 번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른바 '사적' 계시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교회의 권위가 인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결정적 계시를 '개선'하거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한 시대에 계시에 따른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데 불과한 것이다."(67항). 이로써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여진다.

 

1. 사적 계시의 권위는 결정적인 공적 계시의 권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공적 계시는 신앙을 요구하며, 사실 하느님께서는 공적 계시 안에서 인간의 언어와 활기찬 교회 공동체의 중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앙은 다른 어떤 인간적인 믿음이나 신뢰나 소신과는 다르다.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확신은 내가 진리 자체와 접하고 있음을 보장해 준다.  이것은 인간적인 이해 방식을 통한 입증을 초월하는 확신을 주며, 나는 이러한 확신 위에 생을 설계하고 죽을 때에도 나 자신을 맡기게 된다.

 

2. 사적 계시는 이러한 신앙을 돕는 것이며, 결정적인 공적 계시로 나를 이끌어 줄 때 그 신빙성이 드러난다.

 

 

이와 관련하여, 나중에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된 프로스페로 람베르티니 추기경은 뒤에 시복식과 시성식의 규범이 된 그의 고전적인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톨릭 신앙의 동의는 이렇게 승인된 사적 계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이러한 계시는 신중함이 요청되는 인간적인 동의를 추구한다. 이는 이러한 계시를 가능하고 신빙성 있는 신심으로 우리 앞에 제시한다."

이 분야의 저명한 학자인 플랑드르의 신학자 E. 다니스는 사적 계시에 대한 교회의 승인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간단히 진술한다.

그것은 신앙이나 도덕에 어긋나지 않는 메시지, 합법적 공표, 신자들이 그 계시를 신중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교회 권위의 허가이다.

그러한 메시지는 복음을 이해하고 특별한 시점에서 복음을 더 잘 실천하는 데 참된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적 계시를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사적 계시는 도움이 되라고 제공하는 것이지, 의무적으로 활용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적 계시의 진실성과 유용성의 기준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지향하는가이다.

사적 계시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한다면, 또한 그리스도와 무관하거나 심지어 또 다른 더 나은 구원 계획으로,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제시된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는 우리를 복음 속으로 더 깊이 인도하시는 분이지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 말은 사적 계시가 새로운 강조점을 제시하지도, 새로운 신심 형태를 탄생시키지도, 오랜 신심 형태를 심화하거나 전파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변함없는 구원의 길인 믿음과 바람과 사랑이 커 가야 한다.

사적 계시는 흔히 대중 신심에 길을 열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성체 성혈 대축일과 예수 성심 대축일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적 계시가 전례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어떤 관점에서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의 관례가 전례와 대중 신심의 관계 안에서 나타난다.  전례는 기준이며 교회 전체의 살아 있는 예법으로서, 복음에서 직접 자양분을 얻는다. 대중 신심은 하나의 표징이다.

곧 신앙이 일상생활 속에 파고듦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박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징인 것이다.

대중 신심은 신앙 ’토착화’의 가장 우선적이고 근원적인 형태이다.

대중 신심은 언제나 전례에서 갈 길을 찾고 방향을 잡아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신앙을 풍부하게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적 계시에 대하여 처음에는 불가피한 다소 부정적인 설명에서 시작하여 점차 긍정적인 경위로 넘어 왔다.

사적 계시를 성서와 관련하여 올바르게 분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적 계시는 어떠한 신학적 범주에 드는가?

보존된 성 바오로의 평지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 곧 신약성서 본문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1데살 5, 19-21)하고 말한다.

교회는 모든 시대에 예언의 은사를 받아 왔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조사하여야 하지만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성서적 의미의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설명하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언하는 사람은 미래를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기고자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뿐이다.

진정한 예언자는 의지와 이성을 일깨우고자 호소하며, 하느님의 뜻을 현재에 대한 암시와 요구로서 선포한다.

이러한 경우에 미래에 대한 예언은 이차적인 중요성을 띤다. 중요한 것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기 자신과 관련이 있는 결정적인 계시의 실현이다.

예언의 말씀은 경고나 위로 또는 두 가지 모습을 다 띤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와 '시대의 징표'의 범주 사이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새롭게 조명한 어떠한 연계성이 있다.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루가 12, 56)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시대의 징표' 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로 이해되어 한다. 결국 그것은 예수님 자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앙의 빛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해석하는 것은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승인한 사적 계시에서 - 파티마의 계시도 마찬가지이지만 - 핵심은 이것이다.

곧 그러한 사적 계시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이해하고 거기에 올바르게 부응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사적 계시의 인간학적 구조

 

이 성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사적 계시의 신학적 위치를 규명하고자 노력하였다.

파티마의 메시지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사적 계시의 인간학적(심리학적) 특징을 간단하게마나 설명은 할 필요가 있다.

이 영역에서 신학적 인간학은 자각 또는 '환시' 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곧 의식이 있는 환시로서 신체적인 외적 지각, 내적 지각 그리고 영적 환시(visio sensibilisimaginativa - intellectualis)이다.

루르드, 파티마, 그 외 여러 곳의 환시에서 그것은 일반적이고 외적인 의식 지각의 문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보이는 모습과 형태는 예를 들어 나무와 집처럼 어떠한 공간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파티마의 첫째 ’비밀’에 묘사된) 지옥의 환시나 셋째 '비밀'에 묘사된 환시와 관련하여 볼 때 매우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다른 환시들에서도 매우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특히 같이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본 것이 아니고 '환시를 본 사람들' 만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더욱 고차원적인 신비주의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영상이 없는 마음속의 '환시'와 관련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루는 것은 중간 범주, 곧 내적인 지각이다.

환시를 보는 사람에게는 이 지각도 물론 감각의 외적인 현현과 맞먹는 현존의 힘을 가지고 있다.  내적 환시는 주관적인 상상의 표현에 불과한 환상과는 다르다.

내적 환시는 영혼이, 감각을 초월하는 것, 볼 수 없는 것이지만 '내적 감각'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내적 환시는 영혼에 와 닿는 실제적인 '대상'과 관계가 있다. 물론 이 '대상'이 우리의 평소 감각계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적인 마음이 깨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내적 깨어 있음은 외적인 실재와 영혼을 채우고 있는 오만가지 생각과 표상(image)들의 강한 압력 때문에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인간은 순전히 외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에 이끌리며 실재의 더 깊은 차원과 접하고, 그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이러한 발현의 주된 수신자가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어린이들의 영혼은 아직 혼란을 겪지 않았으며, 그들의 내적 지각 능력은 아직 손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호산나!"하고 외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비난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젖먹이들 그 입에서마저 어엿한 찬송을 마련하셨나이다." (3절)라는 시편 8의 말씀으로써 대응하셨다(마태 21. 16참조)

 

 

'내적 환시'는 환상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참되고 유효한 확인 수단이다.

그러나 내적 환시 또한 한계가 있다.

외적 환시에서도 주관적인 요소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해석 작용을 하는 감각이라는 여과기를 통하여 보게 된다.

이것은 내적 환시의 경우에 더욱 분명하다. 특히 그 자체가 우리의 지평을 초월하는 실재인 경우에 그러하다. 환시를 보는 주체는 더욱 강력히 몰입하게 된다.

그는 자기 능력의 한도 안에서, 그에게 가능한 표상과 인식의 형태로 본다. 내적 환시의 경우에 해석 과정은 외적 환시에 비하여 훨씬 더 광범위하다.

발현하는 것의 형상을 만드는 데 본질적으로 그 주체가 가담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능력과 가능성의 한도 안에서만 그 표상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시는 다른 세계에 대한 단순한 '사진'이 아니며, 지각하는 주체의 잠재 능력과 한계에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성인들의 모든 위대한 환시에서도 입증되며, 물론 파티마 어린이들의 환시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묘사하는 표상은 결코 단순한 환상의 표현이 아니라, 더욱 높고 내적인 기원을 실제적으로 지각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러한 환시를, 마치 다른 세계에 드리워진 베일이 일순간 벗겨져서, 우리가 어느 날 하느님과가 궁극적으로 하나가 될 때 보게 되기를 희망하는 그 하늘나라가 순수한 실체로 나타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표상들은, 말하자면, 높은 곳에서 오는 자극과 그러한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는 주체, 곧 환시를 본 어린이들의 능력이 종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환시를 묘사하는 언어는 상징적이다.

이에 대하여 소다노 추기경은 "(환시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의 세부 사항을 사진처럼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하게 연속되고 지속되는 시간을 통하여 펼쳐지는 사건들을 한 가지 배경을 두고 종합하고 집약한다."하고 말하였다.

한 가지 표상 안에 시간과 장소를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 환시의 모든 요소가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환시이며, 세부 사항은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진 표상을 바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표상의 중심적인 요소는 그것이 그리스도교 '예언'의 초점인 것과 일치하는 곳에서 드러난다.  그 핵심은 환시가 하느님의 뜻에 대한 권고와 길잡이가 되는 곳에서 발견된다.

 

(성바오로수도회 홈에서)

 


 

계시(啓示)

영어 divine revelation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인류를 위한 당신의 구원계획을 드러내시는 것.

 

가톨릭 신학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된 진리의 몸체('신적 계시')와 특히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것을 계시하신 과정을 구분하기도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를 완성하시고, 계시가 선포하는 것을 하느님의 증거로 확고하게 하셨다."(「계시헌장」 4항)

이 하느님의 계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발견된다.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특별히 교도권을 통하여 계시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그것을 새로운 세대에 전수하는 일이다. (교리서 7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