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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9월16일 성 치프리아노(Cyprian) / 카르타고(Carthago)

by 파스칼바이런 2012. 1. 29.

축일 9월 16일 성 치프리아노(Cyprian)

 San Cipriano Vescovo e martire

St. Cyprianus of Carthage

신분 / 주교, 교부, 순교자

활동지역 / 카르타고(Carthago)

활동연도 / 200/210?-258년

같은이름 / 치프리아누스, 치프리안, 키프리아노, 키프리아누스, 키프리안

 

 

카르타고의 성 치프리아노(Cyprianus)

 

200-21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유복한 이교 가정에서 내어난 성 타스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 또는 치프리아노)는 수사학자이자 법률가였고 또 교사였다. 그는 246년경 속세의 불의와 부패에 회의와 실망을 느끼던 중 하느님의 은총으로 노사제인 코일리키우스(Coelicius)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즉시 당대의 저명한 성서학자이자 유명한 저술가가 되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후 그는 사제품을 받았고, 249년 초에 카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249년에 일어난 데키우스(Decius)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피신하였으나, 은밀히 피신처에서 편지 등을 보내는 방법으로 자기 교구를 계속 지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피신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251년에 교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많은 교구민들이 박해 동안에 배교하였고, 또 자신의 주교 선임을 반대하던 사제 노바티아누스(Novatianus)가 이단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노바티아누스 신부는 배교한 신자들에게 아무런 회개 행위도 요구하지 않고 교회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고, 박해 당시 배교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규율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죽을 위험에 처한 배교자를 제외하고는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배교자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유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251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된 성 코르넬리우스(Cornelius, 9월 16일)가 배교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 노바티아누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바꾸어 배교자들은 영원히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배타적인 엄격주의자로 돌변하였다. 로마(Roma)의 주교로 선출될 것을 기대했던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대립교황으로 등장하며 이교적인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즈음에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가톨릭교회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와 "배교자들에 관하여"(De lapsis)를 저술, 배포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다.

 

배교자 문제가 해결된 지 얼아 안 되는 252-254년 사이에 아프리카 지역에 몸서리치는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이를 물리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를 반대하는 이들과 신자들은 흑사병을 그리스도교와 성 키프리아누스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박해의 빌미로 삼았다. 즉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분노하여 전염병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사람들의 낭설을 반박하고 위로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데메트리아누스에게"(Ad Demetrianum)와 "죽음에 대하여"(De mortalitate)라는 책을 썼다.

 

그 후 얼마 뒤에 그와 아프리카의 다른 주교들은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황은 이단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이 베푼 세례도 유효하다고 인정한 반면, 그들은 이를 극구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255년 성 키프리아누스는 지역 주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카르타고에서 주교회의를 열고 이단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재 세례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성 키프리아누스는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당시 로마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또 모든 주교와 사제와 부제들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지방 총독인 파테르누스에 의하여 카르타고에서 50마일 거리에 있는 쿠루비스로 유배되었다. 또 다음해에는 모든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새 총독인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소환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끝까지 이교의 신에게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여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는 교회, 사목, 성서, 성사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하여 박해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13편의 저서와 65편의 서간들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치프리아노는 210년경 카르타고의 이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개종하여 사제가 되고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매우 어지러운 시대에 자신의 모범과 저술로써 교회를 탁월하게 다스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유배되었다가 258년 9월 14일에 순교하였다.

 

치프리아노는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3세기의 그리스도교 사상과 관습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유명한 웅변가인 그는 30여 세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을 분배했으며 세례받기 전에 순결을 맹세함으로써 그의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2년만에 서품을 받았으며, 그의 뜻과는 달리 오늘날 튀니스 근처에 있는 카르타고의 주교로 선택되었다.

 

치프리아노는 교회가 누려 온 평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을 약화시켰으며, 진정한 신앙을 갖지 않은 개종자들에게도 문을 열어 주었다고 개탄했다. 데치아노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교회를 떠났다. 이들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3세기에 가장 큰 논쟁점이 되었으며, 이것 때문에 교회가 고해성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노바투스는 치프리아노가 주교로 선출되는 것을 반대했던 사제로서 치프리아노의 부재중에 스스로 나서서 일했으며 (그는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서 교회를 이끌었는데 이것이 비난을 사게 되었다) 아무런 교회법적인 참회를 부과하지 않고 모든 배교자들을 받아 들였다.

결국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251년의 카르타고 공의회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이즈음에 그는 저 유명한 저서인 "교회의 일치"를 썼다. 그러나 노바투스는 로마로 가서, 치쁘리아노가 열렬히 지원하는 교황 고르넬리오를 반대하여 반교황이 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치프리아노는 중도의 입장을 취했는데 실제로 우상 숭배를 하던 사람들은 죽음으로써만이 친교를 회복할 수 있었으며, 반면에 우상 숭배를 했다는 증명서만을 산 사람들은 일정 기간의 참회 기간을 거친 후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것조차도 새로운 박해 동안에는 완화되었다.

 

252년~54년 카르타고에 흑사병이 만연하는 동안 치프리아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적과 박해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를 비난하였고, 또 격렬하게 항의까지 하였다. 이런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에 대하여" 란 책을 저술하였다. 고르넬리오 교황의 친구인 그는 다음 교황인 스테파노를 반대했다. 치프리아노와 다른 아프리카 주교들은 이단자와 분리론자들이 행한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255년~56년에 열린 아프리카 회의는 이단자로부터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고, 치쁘리아노는 교황 스테파노와 신랄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보편적인 견해는 아니었지만 치프리아노는 스테파노의 파문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에게 추방당했고 그 후 재판을 받기 위해 소환 되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순교를 목격해야만 한다는 주장과 함께 도시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치프리아노는 친절과 용기, 격정과 인내를 함께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쾌활하고 진지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는 것인지 혹은 존경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는 세례 논쟁 동안 온화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참회에 관한 논문을 쓸 당시에 자신의 감정을 염려했음에 틀림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치프리아노가 영광스러운 순교로 자신의 분노를 속죄했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 사목, 성서, 동정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하여 수많은 신학 논문을 남겼다.

참으로 그는 크리스챤의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받을만 하다.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의 편지에서

(Epist. 60,1-2.5: CSEL 3,691-692. 694-695)

 

열렬하고도 확고한 신앙

 

나 치프리아노는 고르넬리오 형제께 문안드립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우리는 귀하께서 신앙을 용맹히 또 영광스럽게 증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귀하께서 보여준 영예로운 신앙 고백의 소식을 큰 기쁨으로 접수하고서 우리 자신마저도 그 공로와 그 영예의 동참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또 한마음 한뜻을 이룬다면, 동료 사제가 칭송받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가 칭송받는 듯 즐거워하지 않을 사제가 있겠습니까? 또는 형제의 기쁨을 보고 함께 기뻐하지 않을 형제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보여 준 용기의 증거 소식을 듣고 또 형제들이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귀하께서 그들의 지도자로 거기 계셨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큰 기쁨과 마음의 용약을 느꼈는지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지도자로서의 귀하의 신앙 고백은 모든 형제들의 신앙 고백으로써 한층 더 찬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귀하께서는 다른 이들을 영광의 길에 앞세움으로써 많은 형제들을 같은 영광에로 인도해 주었으며 또 귀하께서 다른 이들에 앞서 가장 먼저 신앙 고백을 함으로써 온 백성에게도 같은 신앙을 고백할 것을 설득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의 열렬하고도 확고한 신앙과 형제들의 갈림 없는 사랑 가운데 무엇을 칭송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서 온 백성의 지도자인 주교의 용맹이 환히 나타나고 그들 따라가는 신자들의 연대성도 잘 드러났습니다. 한마음 한 목소리가 된 여러분 안에서 로마의 온 교회가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바오로 사도가 극구 칭찬하셨던 여러분의 신앙은 이렇게도 찬란히 빛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용기와 불굴의 기백을 미리 내다보셨고, 여러분이 장차 거둘 공로를 전하셨으며, 부모들을 칭찬하시면서 자녀들을 독려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완전한 화목과 용맹으로 다른 모든 형제들에게도 용기와 일치의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주님은 당신의 섭리로써 시련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우리에게 훈계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배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시련에 대해 필요한 권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상호 사랑의 일이므로 서로 도와주며 모든 백성과 함께 단식과 밤샘과 기도 안에 항구하도록 합시다.

 

이것들은 우리를 용감히 서 있게 하고 인내하도록 도와주는 천상의 무기들입니다. 이것들은 영신적 방어체이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거룩한 활들입니다. 화목과 영적 사랑 안에서 서로 기억해 주고 서로서로를 위해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며 서로의 사랑으로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하도록 합시다.

 


 

  

성 치프리아노 주교의 순교에 관한 [총독의 기록문]에서

(Acta, 3-6: CSEL 3,112-114)

 

이렇게 명백한 사태에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9월 14일 아침 갈레리우스 막시무스 총독의 명에 따라 세스티에는 큰 군중이 모여들었다. 총독은 그날 사우치오루스라고 하는 총독 관저로 치프리아노를 끌어내라고 했다. 치프리아노 주교가 그 앞에 대령했을 때 갈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그에게 "네가 타시오 치프리아노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치프리아노 주교는 "네, 그렇습니다."고 대답했다.

 

총독이 "너는 그 불경한 자들의 집단에서 지도자로 일해 왔는가?" 하고 묻자, "그렇습니다." 하고 치프리아노 주교는 대답했다. 총독이 다시금 "거룩한 황제들께서는 네가 제사를 바치도록 명령을 내리셨다."고 말하자,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럼 잘 생각하라." 하고 총독이 권고하자 치프리아노 주교는 "귀하가 명을 받은 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명백한 사태에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총독은 잠시 동안 자문관들과 판결에 대해 상의한 후 마지못해 이렇게 말했다. "너는 오랫동안 불경한 자세로 살아왔고 또 네 주위에 많은 범죄자들과 미신자들의 무리를 끌어 모았으며 로마의 제신들과 그분들께 바치는 예배 의식에 적대감을 드러내 왔었다. 그리고 경건하고 거룩한 군주들인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및 공경하올 발레리아누스 황제도 너를 공식적 예배에로 되돌이킬 수 없었다. 너는 엄청난 죄과의 장본인이요 그런 범죄를 충동한 자로서 네 죄에 가담한 자들의 표본이 되었다. 그래서 네 피로써 법 기강이 존중되어야 하겠다." 이 말을 끝내자 총독은 자기 자리에서 큰소리로 다음 판결문을 낭독했다. "타시오 치프리아노를 참수형에 처하기로 결의한다." 이때 치프리아노 주교는 "천주께 감사." 하고 말했다.

 

선언문이 떨어지자 형제들의 무리는 "우리도 그분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싶습니다." 하고 부르짖어 형제들 가운데 큰 소동이 일어났고 거대한 군중이 그를 따라갔다. 이렇게 치프리아노는 세스티 평야로 끌려갔다. 거기에서 망토와 모자를 벗고는 땅에 무릎을 꿇고 겸손되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나서 달마티카를 벗어 부제들에게 건네주고 다만 아마포로 만든 속옷만을 걸치고 형 집행인을 기다렸다.

 

형 집행인이 도착했을 때 치프리아노는 형제들을 보고 그에게 금 스물 다섯 냥을 주라고 했다. 형제들이 그 앞에 아마포 천과 수건을 깔았다. 그리고 나서 복된 주교는 수건을 가지고 눈을 자기 손으로 가리려고 했으나 매듭을 묶지 못하자 사제 율리아노와 차부제 율리아노가 매듭을 매주었다. 이렇게 하여 복된 치프리아노는 죽음을 맞았다.

 

그의 유해는 이교도들의 호기심에서 보호하고자 그 근처에다 놔두었다. 밤중에 거기에서 촛불과 횃불을 밝혀 들고 기도 가운데 장엄히 수영장 옆 마팔리우스 거리에 있는 조달관 마크로비우스 칸디디아누스 소유의 묘 터로 유해를 옮겨갔다. 며칠 후 갈레리우스 막시무스 총독은 세상을 떠났다.

 

복된 치프리아노는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황제 치하에서,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가운데 9월 14일 치명했다. 그분께 영예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