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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법정스님 글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 법정스님

by 파스칼바이런 2012. 3. 30.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이 가을 들어, 처음 절에 들어와 배우고 익힌 글들을 다시 들추고 있다.

그때는 깊은 뜻도 모르고 건성으로 외우면서 관념적인 이해에 그쳤었는데,

외떨어져 살면서 옛글을 다시 챙겨보니 크게 공감하게 된다.

글이나 사상은 그 저자의 정신연령에 이르러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생활환경이 비슷해야 더욱 공감할 수 있다.

 

야운(野雲)스님의 '스스로 경책하는 글[自警文]'에 이런 시가 있다.

 

나물 뿌리와 나무 열매로 주린 배를 달래고, 송락과 풀 옷으로 이 몸을 가리며

들에 사는 학과 뜬 구름으로 벗을 삼아 깊은 산골짜기에서 남은 세월 보내리.

 

몸과 마음 선정에 들어 흔들리지 않고 오두막에 묵묵히 앉아 왕래를 끊는다.

적적하고 고요해서 아무 일 없으니 이 마음 부처님께 저절로 돌아가다.

 

밤하늘에 달과 별을 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절기로는 내일이 추분인데 아직도 칙칙한 여름철 그림자가 짙게 남아 있다.

 

지난해와 올해 연거푸 태풍이 휩쓸고 간 자취가 여기저기 폐허로 남아 있어 가슴 아프다.

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현대 기술문명도 맥을 못 춘다.

어째서 해마다 이런 재난이 이 땅을 덮치는지 안타깝고 야속하다.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가 지수화풍의 은덕만이 아니라 그 피해도 함께 입는다는 데 미묘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지난 번 태풍을 통해서 바람과 물의 위력이 어떻다는 것을 이 땅에서는 거듭 통감했다.

 

태풍이 휘몰아치던 추석 다음 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온 골짜기가 떠나갈 듯이 요란한 물소리와 돌 굴러가는 소리,

함석지붕에 쏟아지는 빗소리에

젖은 들짐승처럼 기가 죽어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샜다.

 

날이 밝아 밖에 나갔더니 온 골짜기가 그대로 폭포였다.

무엇이든지 단참에 쓸어버릴 듯이 무섭게 넘치고 있었다.

뒤꼍으로 가보니 아궁이에 40센티미터 가량 물이 차올라 있었다.

 

라디오를 켜자 이 지역에 밤새 4백 밀리의 호우가 쏟아졌다고 했다.

자연의 위력 앞에 말 그대로 속수무책, 손이 묶인 듯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토록 부드럽고 겸손하던 물이 어떻게 저리 사나울 수 있을까?

그 부드러움이 어떤 힘을 받으면 저토록 거세고 강해지는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그 뜻이 여기에 있구나 싶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모성적인 부드러움과 온유함과 너그러움이 뭇 생명을

구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병든 현대문명도 결국은 모성적인 부드러움과 따뜻함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다는 소식이다.

핵무기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세계 도처에서 불안에 떨며 침몰해 가는 오만한 제국의 행태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이 교훈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길에도 깨우침이 될 것이다.

 

노자도 일찍이 말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해있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깝다.'

 

물에는 고정된 모습이 없다.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근 모습을 하고 모난 그릇에 담기면 모난 모습을 한다.

뿐만 아니라 뜨거운 곳에서는 증기로 되고, 차가운 곳에서는 얼음이 된다.

이렇듯 물에는 자기 고집이 없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남의 뜻에 따른다.

 

살아있는 물은 멈추지 않고 늘 흐른다.

강물은 항상 그곳에서 그렇게 흐른다.

같은 물이면서도 늘 새롭다.

오늘 흐르는 강물은 같은 강물이지만 어제의 강물이 아니다.

강물은 이렇듯 늘 새롭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거죽은 비슷하지만 실재는 아니다.

오늘의 나는 새로운 나다.

살아있는 것은 이와 같이 늘 새롭다.

 

온 골짜기가 떠나갈 듯이 사납게 흐르던 그 개울물은 다 어디로 갔는가.

태풍이 지나가자 물은 다시 맑고 잔잔한 본래 모습으로 흐르고 있다.

물이 빠진 개울에는 눈에 익은 바위들이 사라지고 상류에서 낯선 돌들이 굴러와 있다.

이런 개울물 앞에서 나는 요즘 부드러움의 실체와 그 위력을 거듭 배우고 익힌다.

 

임종을 앞둔 늙은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를 불렀다.

스승은 자신의 입을 벌려 제자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내 입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 없구나. 명심하거라."

 

- 법정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