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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법정스님 글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린다 / 법정스님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31.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린다

 

 

이제는 늦더위도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득거린다. 풀벌레 소리가 여물어가고 밤으로는 별빛도 한층 영롱하다. 이 골짝 저 산봉우리에서 가을 기운이 번지고 있다.

 

요 며칠 새 눈에 띄게 숲에는 물기가 빠져나가고 있다. 어떤 가지는 벌써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초록의 자리에 갈색이 늘어간다. 나무들은 말이 없지만 기온이 더 내려가면 앓던 잎들을 미련 없이 우수수 떨쳐 버릴 것이다. 이게 바로 계절의 질서요, 삶의 리듬이다.

 

철이 바뀔 때면 내 안에서도 꿈틀꿈틀 무슨 변화의 조짐이 생기는 것 같다. 허구한 날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그 범속한 일상성에서 뛰쳐나오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 가을에 나는 많은 것을 정리 정돈하고 있다. 오두막에서도 이것저것 없애고 있지만 얼마 전에는 그전에 살던 암자에 내려가 20여 년 동안 '쌓인 먼지들'을 가차 없이 털어냈다. 쌓인 먼지들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것저것 메모해 둔 종이와 노트와 일기장 그리고 나라 안팎에서 찍은 사진들을 말한다. 그것들을 필름과 함께 죄다 불태워서 버렸다.

 

버릴 때는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언젠가는 이 몸뚱이도 버릴 거라고 생각하면 미련이나 애착이 생기지 않는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살이 아닌가. 현재의 나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없어도 좋을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버리고 또 버리고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그 인생의 내용이고 알맹이가 될 것이다.

 

나무들은 가을이면 걸쳤던 옷을 훨훨 벗어 버린다. 그래서 그 자리에 새 옷이 돋아난다. 이런 나무들처럼 너절한 허섭스레기들을 아낌없이 치워버리고 나면 그 자리에 텅 빈 그 자리에 비로소 맑은 기운이 감돈다. 이 맑은 기운이 오늘의 나를 새롭게 한다.

 

- 법정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