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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12월29일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 캔터베리

by 파스칼바이런 2012. 4. 17.

축일 12월 29일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연도: 1118-1170년

같은이름: 도마, 베케트, 베켓, 토머스

 

 

캔터베리의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런던의 주 장관인 길버트 베케트(Gilbert Becket)와 마틸다(Matilda)의 아들로 태어난 성 토마스 베케트는 노르만족의 후손이다. 그는 런던에서 출생하여 서리(Surrey)의 머튼 프리오리(Merton Priory)에서 수학했으며, 런던에서는 법률을 공부하고 파리 대학교에서도 그의 전문 과목을 계속 연구하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궁핍한 환경으로 내몰린 그는 1141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관으로 들어갔다. 이때 테오발드(Theobald) 대주교는 성 토마스 베케트가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와 프랑스의 오세르(Auxerre)에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는 1154년에 부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테오발드 대주교의 명을 받고 로마(Roma)를 오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관여하였다. 1155년 성 토마스 베케트는 헨리 2세 왕에 의하여 잉글랜드(England)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국왕 다음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헨리 2세를 수행하여 프랑스 툴루즈(Toulouse)로 원정을 나갈 때에는 부대장도 맡았다. 1161년 테오발드 대주교가 서거하자 헨리 2세는 성 토마스 베케트를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물론 그는 이 직책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1162년 그는 수상직을 사임한 후 사제품을 받고서 대주교로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1166년 성 토마스 베케트는 소위 '클라렌든 칙령'을 거부하였는데, 이 법은 교회 법정에서 행해야 할 성직자의 권리와 교황청에 호소하는 권리를 부인하는 악법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 토마스 베케트는 프랑스로 축출되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이 사실을 교황에게 상소하였지만 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교황은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이처럼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가 반목하고 있을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교황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퐁티니(Pontigny)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166년 헨리 2세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에서 모든 시토회 회원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할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상스(Sens) 교외의 성 콜룸바(Columba) 수도원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Louis VII)의 보호를 받았다. 루이 7세의 노력에 의해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는 평화 협정을 맺었고, 비로소 그는 잉글랜드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정치적인 사건 때문에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이 사건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사망 즉시 순교자로 선포되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그를 성인으로 공포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잘못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해가 모셔진 성 토마스 베케트의 경당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아주 유명하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기꺼이 행하였다." 영국의 시인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은 그를 소재로 "대성당의 살인"을 썼다.

 

 


 

 

 

성 토마스 베케트 주교 순교자

  

1118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캔터베리 성당의 사제가 되고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1162년 주교로 선임되었다. 헨리 2세 왕에 대항하여 교회의 권리를 용감히 옹호했고 이로 인해 6년간 프랑스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본국에 돌아오자 다시금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고 마침내 1170년 왕의 추종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74: PL 190,533-536)

 

선한 싸움을 싸운 사람만이 월계관을 얻는다

 

우리는 주교, 대사제라 불리웁니다. 우리가 만일 불리우는바 그대로의 사람이 되고자 하면 또 우리 칭호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영원한 대사제로 세워 주신 분의 발자취를 열심히 묵상하고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분은 각자에게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시고자 모든 행위와 그에 수반되는 모든 지향을 하늘 높은 데서부터 살피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분의 대리자입니다. 그분 이름의 영광과 그분 품위의 영예를 받다 일시적으로 영적 노고에  대한 열매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그들의 동반자들을 교회의 가장 높은 지위에서 계승합니다. 또한 봉사직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권세를 부숴버려 신앙과 덕행의 진보로  구성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이 되도록 합니다.

 

주교들의 수효는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는 품을 받을 때 가르치고 다스리는 사명을 열심히 또 온갖 정성을 다해 수행하겠노라고 약속했고, 지금도 매일 그 약속을 반복합니다. 우리가 약속한 신앙이 행동의 증거로써 더욱 믿을 만한 것이 되었으면 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습니다. 그것을 거두어 주님의 곳간에 다 쌓아 두려 한다면 한 명이나 또는 몇 명의 주교들만으로는 넉넉치못합니다.

 

로마 교회가 모든 교회의 머리이고 가톨릭 교리의 원천이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의 열쇠가 베드로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의 유대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지식 안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아갈 때 온 교회의 체제는 베드로의 신앙과 가르침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는 사람도 많이 있어야 하고 물을 주는 사람도 많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전파와 인구의 증가가 이것을 요구합니다. 한 개의 제단밖에 없었던 구약의 백성들도 거기에서 일할 많은 스승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제 이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온 후부터 이 필요성은 한층 더 커졌습니다. 이제 번제물을 바치려 한다면 레바논의 모든 나무로도 그것을 사를 장작을 다 충당할 수 없고 또한 레바논의 모든 짐승과 유다의 짐승까지 합쳐도 부족할 것입니다.

 

심거나 물주는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베드로의 신앙 위에 다 심고 물주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자라게 하시지 않습니다. 로마 주교의 판단 및 그분이 담당한 직무를 함께 하며 그분이 맡긴 권리를 행사하는 수하의 교회 직무자들의 판단에 맡겨지는 백성들의 중요한 문제들은 분명히 베드로에게 위임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고 교회가 얼마나 큰 시련 가운데서 자라났으며 그리스도를 선장으로 모시는 베드로의 배가 얼마나 큰 풍랑을 이겨냈고 또 시련 속에서 밝히 신앙을 드러낸 이들이 어떻게 월계관을 받게 되었는지 기억하십시오. 모든 성인들은 이렇게 하여 성인이 되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운 사람만이 월계관을 얻는다."라는 말이 성인들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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