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1월 2일 성 바실리오(대)(Basil the Great) St. Basilius St. BASIL the Great 신분: 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연도: 329-379년 같은이름: 바실리우스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는 부유하고 이름 있는 그리스도교 집안 출신으로, 교회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이다. 그의 할머니는 마크리나(Macrina, 1월 14일), 그의 부친은 바실리우스(5월 30일), 그의 모친은 엠멜리아(Emmelia, 5월 30일), 그의 큰 누이는 마크리나(7월 19일), 그리고 두 동생은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와 세바스테(Sebaste)의 베드로(Petrus, 1월 9일)인데, 모두가 성인품에 오른 분들이다.
그는 카이사레아(Caesarea),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그리고 아테네(Athenae)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이곳에서 나지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우스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357년경에 그는 동방의 주요 수도원들을 방문하였으며, 3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의 이리스(Iris) 강변의 안네시에서 은수자로 정착하였다. 바실리우스는 불과 5년 동안을 그의 공동체와 생활했을 뿐인데도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는 달리 법 제정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정교회 수도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주요한 원리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제로 서품된 후 성 바실리우스는 365년부터 카이사레아 교구를 위하여 일했고, 370년에는 그곳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 아리우스파(Arianism) 황제인 발렌스(Valens)가 정통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 때문에 그는 지방 총독 앞에 끌려가서 자신을 변명하여야 했다.
바실리우스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였기 때문에 총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당신 같은 주교는 일찍이 본적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보더라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의 강직성 때문에 교황 성 다마수스(Damasus)와 서방 교회간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요양원을 짓거나 혹은 대대적으로 진료사업을 펼쳤으며 설교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 정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발렌스 황제가 전투에서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1월 1일 카이사레아에서 사망하였다.
바실리우스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바실리우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가 네오카이사레아에서 제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온다.
또한 바실리우스는 성직매매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가뭄과 한발의 희생자를 대대적으로 원조하였으며, 보다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도모하였고,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주장하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면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만연된 매춘행위 관계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는 유식하고 정치력도 있는 사람이면서 성덕이 뛰어났으며,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해박한 저서들과 4백여 통의 편지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령에 관한 저서와 에우노미우스를 반박하는 세 권의 저서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와 함께 편집한 "필로칼리아"가 그 중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교회학자이며 동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큰 공경을 받는다.
성 대 바실리오 기념
바실리오는 330년 카파도치아 지방체사레아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했던 그는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370년 체사레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리우스 이단들과 투쟁했다. 훌륭한 저서들 특히 수도 규칙을 썼는데 오늘날까지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들이 이 수도 규칙을 따르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뛰어났다. 379년 1월1일 세상을 떠났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론에서 (Oratio 43, in laudem Basilii Magni, 15. 16-17. 19-21: PG 36,514-523)
우리는 두 육신 안에 하나의 영혼을 가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치 강의 지류처럼 같은 조국의 샘으로부터 학문을 추구하고자 서로 다른 행로로 떠나갔으나, 흡사 둘이서 약속이나 한 듯 하느님의 안배에 따라 아테네가 우리 두 사람을 상봉케 해주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동안 나는 나의 친구인 우대한 바실리오의 무게 있는 행동과 말하는 데 있어서의 슬기와 완숙함을 보고 그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를 모르고 있던 다른 이들에게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도록 권고해 주었습니다. 실은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한 명성을 이미 들어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과로 아테네에 처음 유학 오는 학생들이 보통 인정 받지 못하는 처지와는 달리 바실리오만은 이러한 통례를 넘어 특별한 영예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우정의 서곡이고 상호간의 친밀성을 불붙여 준 계기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두 사람은 상호간의 사랑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친애감을 고백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 다 같은 지혜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각자가 서로에게 모든 것이 되어, 같은 지붕 아래서 살게 되고, 식탁을 함께 하며, 마음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 둘의 눈은 한 목적에 고정되고 우리의 친애감은 더욱더 깊어져 힘차게 자라났습니다.
우리 둘 다 학문을 추구하고자 하는 같은 소망으로 이끌려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대개 학생들간에 질투심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지만 우리 사이에는 질투심이 결코 없었고 경쟁을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경쟁은 누가 일등을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그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경쟁이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상대방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육신 안에 하나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으면 안되지만 우리는 각자가 서로 안에 있고 또 서로가 함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의 유일한 과업과 갈망은 덕을 쌓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며 현세의 삶을 떠나기 전에도 여기를 떠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적하는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생활과 행동을 하느님의 가르침의 지도에 따라 이끌어 나가면서 동시에 덕행에 대한 사랑을 서로 분발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좀 지나치다고 볼지 모르겠지만 우리 자신은 서로에게 있어 선악을 식별하는 규범과 척도였습니다.
자기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귀족 칭호들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고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얻은 칭호들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우리에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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