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성찬례의 마침 예식 중 파견의 의미

by 파스칼바이런 2012. 6. 7.

성찬례의 마침 예식 중 파견의 의미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인천교구장)

 

 

 

 

머리글

 

1998년 7월 8일자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교황청 신문에는 현 교황님의 교서인 '주님의 날'이 장문으로 게재되었다.

신문 용지의 절반 크기로 12면이나 되는 분량이니 대단히 많은 양이다.

교황님은 주일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대충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주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창조 위업을 기념하는 날이다.

둘째, 주일은 부활하신 주님의 날이며 성령의 선물인 날이다.

셋째, 주님의 날의 중심은 성체성사를 위해 모인 신자들이다.

넷째, 주일은 기쁨과 휴식과 결속의 날이다.

다섯째, 주일은 시간의 의미를 밝혀주는 근본적인 축일이다.

 

교황님의 뜻은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주일을 한낱 휴식의 날로만 생각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주일의 참 뜻을 살리기 위해서는 파견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미사가 끝나면 가정과 공동체에 돌아가서 기쁨의 축제를 지내면서 주님의 큰 위업을 찬양하고 휴식하며 또한 남들에게도 그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곧 주일 미사 후에는 그대로 실천하여야 한다.

이 소고에서는 주일의 핵심 전례인 '성찬례에서 마침 예식 부분 가운데 파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미사를 마치면서 사제는 참석자들에게 강복한다.

그리고 이제 나가서 복음을 전하자고 제청한다.

예전에는 한 가지 파견 예식만 있었다.

곧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하면 신자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새로 개정된 예식서에는 파견을 다섯 가지 형식으로 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았다.

그 중 셋은 복음을 전하자는 것이고, 하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누자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단순히 주님을 찬미하자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가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누자는 것도 복음을 전하자는 내용과 같은 뜻이라고 볼 때 결국 파견의 목표는 복음을 전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는 것은 그렇게 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는 뜻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얼마나 선교를 했는가?

 

1. 복음 전파의 사명

 

성령 강림절을 교회의 탄생 시기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도들은 그날 성령을 받고서야 선교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교회가 선교하지 않으면 그 존재 이유도 없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에도 “나그네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나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선교교령, 2항)라고 기록되어 있다.

교회는 사회 사업 기관도 아니고 병을 고쳐주는 기관도 아니다.

더군다나 신자들끼리만 모여서 먹고 마시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공동체도 아니다.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면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오늘처럼 각박한 세상에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

물론 차이는 많겠으나 많은 사람들은 횡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도깨비라도 나타나서 금방망이를 나누어 준다는 소식이 있다면 껑충껑충 뛰면서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는 재물보다 건강이 가장 기쁜 소식일 것이다.

더구나 노쇠하여 거동하기도 불편한 사람에게는 돈도 명예도 다 부질없는 것이고, 더 고상하고 고귀하며 영원한 것에 대한 소식이 진정으로 기쁜 소식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소식을 가지고 오셨다.

하느님 나라를 주고자 오셨다.

이 영생의 소식, 하느님 나라의 소식이 기쁜 소식이다.

아니 더 나아가서 예수님 자신이 기쁜 소식이다(마르 1,1 참조).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자마자 선교 여행 길에 오르셨는데, 우선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마르 1, 14-15).

예수님의 선교 열정은 대단하셨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는데 "사람들이 헤매며 찾다가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4, 43).

그 뒤에도 예수님께서는 여러 회당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홀로 복음을 전하신 것이 아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는 고기를 낚았으나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낚으라고 하셨다.

그분은 12사도뿐만 아니라 많은 제자들을 두셨는데 72제자를 둘 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루카 10,1-12 참조).

 

예수님의 소망은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9-20)였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고 있는가?

 

오늘의 가톨릭 교회는 큰 시련 앞에 놓여 있다고 본다.

이른바 보편적 구원론이 대두되면서 마치 신앙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인간은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종교를 믿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너무나도 자비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가 보다.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가두 선교나 잃은 양 찾기 운동 등은 헛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이러한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윤달이 됐으니 수의를 해야 한다는 미신적 광고들이 버젓이 가톨릭을 대표하는 신문을 채우고 있다.

 

5.16 이후에 사라졌던 미신은 점점 수면으로 떠오르고 심심치 않게 텔레비전에서 초월적인 힘이니, 어떠니 하면서 은근히 유혹하고 있다.

가뜩이나 신앙이 멍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현세적이고 가시적이며 미신적인 요소들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많은 신자들이 점을 보거나 사주 관상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구나 집안의 대사가 있을 때, 예를 들면 혼사나 이사가는 일 등에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보다는 우선 무속인들을 찾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감이 사라지면서 개신 교회에 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그 결과 성사에 대한 신심이 저하되고 특히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는 느낌이다.

그 이유는 개신교는 그런 것을 안 해도 다 하늘나라에 간다는데 왜 가톨릭은 꼭 해야만 하는가라는 것이다.

더욱이 일반 신문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불교의 어떤 행사에 참석했다는 소식이 크게 부각되면서 사순절 강론의 강사로서 스님들이 대거 등장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또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불교의 선방을 찾아나서 선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나는 여기서 누구를 탓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의견이 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개인적인 친분이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안다.

다만 나는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마음 아파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것이 너무 아름답고 귀한 것인데도 그것을 헐값으로 여기고 남의 것을 찾아 헤매는 격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것을 굳게 지키면서 남의 것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모두 다 옳은 종교이고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누구에게 선교할 것인가?

 

예수님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가 참 교회임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교부들 가운데는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을 증언하려다 목숨을 바친 분들이 많이 있다.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토마스 모어도 호교론을 펴다가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자칫 호교론을 펴다가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을 미련하고 헛수고만 한 사람들로 매도할 수도 있다.

오늘의 시대야말로 가톨릭 신자로서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사도에게서 이어오는 교회, 하나인 교회,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임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목숨 바쳐 선교하신 분들의 거룩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며 선교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2. 복음 전파는 신자의 의무

 

복음 전파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다(마태 28,19 참조).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코린 9,16).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나섰다.

많은 고난이 그에게 닥쳤으나 그의 선교 열의를 꺾을 수는 없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들어보지도 못한 것을 믿을 수는 없다(로마 10, 14-19 참조)고 말한다.

 

복음 선교의 첫째 임무를 지닌 사람들은 성직자들이다.

선교교령에도 "복음 선교를 계속하여 가는 것은 사도들의 후계자들의 의무이니,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빨리 전파되며 현양되기 위해서이며 하느님 나라가 세상 곳곳에 선포되고 건설되기 위해서이다."(1항)라고 했다.

성직자들 외에도 수도자, 평신도 모두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했으므로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있다.

1974년 10월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최종 회의의 성명에도 "우리는 모든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본연의 사명이요, 제일가는 사명임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바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현대의 복음 선교], 14항 참조).

 

3. 효과적인 선교 방법

 

효과적인 복음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가 복음화되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전세계를 복음화하려면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으로 교회 자체가 복음화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표명했다(같은 책, 15항 참조).

 

교회는 무엇인가?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믿는 이들의 모임이다.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가 기쁨으로 가득하고 소망과 사랑으로 가득해야 한다.

같은 상황에서도 비신자들보다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고난 중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렇게 살 때 비신자들은 "어찌하여 저 사람들은 다르며, 왜 그렇게 사는 것이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시키는 것일까?"(같은 책, 21항)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들도 자기 아내의 행동을 보고 믿게 될 것입니다."(1베드 3,1) 하고 말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충실, 청빈과 희생, 현세 권력과 굴하지 않는 자유, 한마디로 성덕 생활의 표양으로 세상을 복음화할 수 있다"([현대의 복음 선교], 41항).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선배나 이웃의 좋은 모범을 보고 입교했을 것이다.

그러나 행동으로 선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말로도 선교해야 한다.

기회가 주어지면 복음을 들려 주고 성당에 가자고 제의하기도 해야 한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입이 무거운 것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기도 하다.

기회가 있을 때는 복음을 말로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물론 성당에서는 비신자들을 자주 초대하여 그들이 성당에 오는 것에 익숙하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사목자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복음 선포를 할 수 있다.

곧 생명력 있는 설교로써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목자가 설교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리 교사들도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

복음 선포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심리적 방법이나 시청각, 인터넷 등을 이용할 수도 있어야 하겠다.

물론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요청된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기"(1고린 12,3) 때문이다.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의 크신 사랑에 흠뻑 취할 수 있으며 자신의 북받치는 그 기쁨을 남에게 전하지 않고는 몸살이 날 지경이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를 때 대신 이야기해 주신다.

그러므로 성령께 간구하며 선교의 대열에 나서야 한다.

 

4. 복음 선교의 내용

 

복음 선포의 내용은 사도행전이 전하는 “알지 못하는 신”(17,23)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분을 하느님으로, 창조주로 알려주는 것이지만 이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서 "아버지"라고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기쁜 소식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 죽음, 부활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현세적인 구원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종말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희망을 가르치고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메시지만을 전해서는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

계속해서 복음이 전달되려면 교회가 있어야 하는데 교회가 있으려면 성체성사에 정점을 둔 성사 생활의 힘 없이는 교회 건설이 힘들다([현대의 복음 선교], 28항 참조).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할 때 성사에 대해서도 전해야 한다.

또한 복음 선포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해방은 이 세상에서의 억압이나 고통, 빈곤, 착취에서의 해방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죽음에서의 영원한 해방을 말하는 것이다.

 

5. 복음 선교의 대상

 

복음 선교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너희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이 말씀은 복음 선포의 대상이 세상 모든 사람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우선 미신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냉담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오늘 우리 교회에 많은 냉담자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보다도 충분히 교리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기 전에는 무엇보다도 회개해야 한다.

곧 과거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꾸어야 한다.

모든 가치 가운데 최고의 가치를 하느님께 둘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중심에 계셔야 한다.

그러나 대충 교리를 배우고 신부나 수녀의 선심(?)으로 미리 세례를 받고 나면 그들에게는 냉담자라는 꼬리표가 붙기 일쑤다.

 

다음으로는 비그리스도교적인 모든 종교가 선교의 대상이다.

"교회로서 비그리스도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오히려 비그리스도교적 종교인들도 그리스도의 신비의 보화를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을 교회로서 주장하는 바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53항).

신자들의 신앙을 더 깊이 있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복음 전파는 필요하다(같은 책, 54항 참조).

 

선교는 성직자나 수도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들은 나름대로 특별한 소명을 받았기에 복음 선교에서도 특수한 모양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평신도들의 임무는 그리스도교적이고 복음적인 모든 능력과 가능성까지를 복음 선교를 위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같은 책, 70항 참조).

 

맺음말

 

미사 후 나는 가끔씩 얼마나 복음을 전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였는가 하고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그 중에는 여러 명을 교회에 인도하여 세례 받게 한 사람들도 있으나 영세한 지 2, 30년 동안 한 사람도 교회에 인도하지 못한 사람들도 수두룩할 것이다.

미사 때마다 “복음을 전하겠다.”는 응답을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살아가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를 넓게 생각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하느님의 자녀로 만든다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음식을 잡수실 겨를도 없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다가 순교하였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분의 유언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주일은 인생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다.

이날은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하나가 되어 우리가 신화(神化)하는 신비롭고도 거룩한 날이다.

 

이날의 기쁨을 온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임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복음에 취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이 불타 올라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런 나날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미사가 끝났으니 복음을 전하자.”는 말에 큰 소리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사목, 1998년 10월호 / CBCK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