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5월 25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 Santa Maria Maddalena de’ Pazzi Vergine Saint Mary Magdalene de’ Pazzi Carmelite St. MARY MAGDALEN of Pazzi 신분: 수녀 활동지역: 팟지(Pazzi) 활동연도: 1566-1607년 같은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메리, 미리암
팟지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최고 명문가인 팟지 집안에서 태어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는 태어난 다음날 카타리나(Catharina)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선행과 신심생활에 큰 관심을 보여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기도와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성당에서 자주 기도하였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무엇보다도 성체께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성체를 간절히 원하여 특별 관면을 받고 10세 때에 첫영성체를 하고, 12세 때 동정 서원을 하였다. 그 후 피렌체에 있는 산 조반니노(San Giovannino) 수녀원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더욱 열렬한 신앙인이 되었고 수도 성소의 뜻을 굳혀 나갔다. 부친은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극렬히 반대하여 1582년 12월 1일 피렌체에 있는 천사의 성 마리아(Santa Maria degli Angeli)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1585년 5월 17일 금요일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긴 탈혼에 빠졌는데, 거의 40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후 6월 16일 삼위일체 대축일 이후 5년 동안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와 시련을 겪기도 했다. 1586년 10월 수련기를 마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극도의 고통을 맛보던 중 1590년 부활절에 50일 동안 금욕생활을 하라는 주님의 뜻에 따라 오로지 빵과 물로만 지냈고, 이러한 고행의 보답으로 하느님과의 일치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예언하는 은혜를 받은 것 외에도 먼 곳에 있는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고, 탈혼 상태에 있을 때 어떤 경우에는 무기력해지는 때도 가끔 있었다. 1604년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얼마 후 병을 얻어 이전에 느껴 본 적이 없는 심신의 고통으로 3년을 보내야 했다. 결국 오랜 고통 뒤에 그녀는 1607년 5월 25일 41세의 나이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1669년 4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데 파치 동정
1566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훌륭한 종교 교육을 받은 후 가르멜회에 들어가 기도와 극기의 숨은 생활을 하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많은 수녀들을 완덕의 길로 인도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영적 은혜를 받고 1607년 세상을 떠났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데 파치의 동정의 계시와 시련에 관한 글에서 (Mess. III. 186.264: IV. 716:Opere di S. M Maddalena de Pazzi, Firenze, 1965, 4, pp. 200, 269:6, p. 194)
성령께서 죽임당한 어린양이신 주님 피의 보배로운 인장으로 날인된 영혼 안에 들어가십니다. 더욱이 성령께서는 스스로 활동하시고 영혼 안에 들어가실 의향이 있으시지만, 그 피가 성령께서 들어오시도록 자극합니다. 스스로 활동하시는 이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같은 실체이시고 성부의 본질과 성자의 의지로부터 발출하시어 샘물처럼 영혼 안에서 퍼져 나가시고 영혼은 그 성령 안에 잠겨 버립니다.
두 개의 강줄기가 합류할 때 하나가 되어 작은 강이 제 이름을 잃고 큰 강의 이름을 지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영혼에 들어오시는 영혼과 합치되실 때에도 그러합니다. 성령보다 못한 영혼이 자기 이름을 잃고 성령의 이름을 얻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영혼은 성령과 하나가 될 정도로 성령 안에서 변모되어야 합니다.
성부의 품안에 계시는 보화의 분배자이시고 성부와 성자간의 통교를 맺게 하시는 성령께서는 영혼 안에 너무도 조용히 들어가시므로 영혼이 성령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의 위대함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적습니다. 육중하시고도 가뿐하신 성령께서는 당신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끊임없이 소근 거리시는 말씀과 깊은 정적 속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움직임이 없으시면서 동시에 가장 분주히 움직이시는 그분은 사랑의 힘으로 말미암아 만물 안에 들어가십니다.
성령이시어, 당신은 움직임이 없으신 성부 안에 머물지 않으시고 성자 안에서 머물지 않으시면서도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당신 자신 안에 그리고 모든 복된 영들과 피조물 안에 계십니다. 피조물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분이 되신 그 외아들의 흘리신 피를 통하여 당신께서도 피조물에게 필요한 분이 되셨습니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성부의 결합이시여, 성자의 마음에 드는 이시여, 오소서. 당신은 진리의 영, 성인들의 상급, 영혼의 안식, 어둠속의 빛, 가난한 이의 부요, 사랑하는 이의 보화, 배고픈 이의 만족, 그리고 순례자의 위안이십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온갖 보화를 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말씀이 육화되게 하신이여, 오소서. 당신께서 은총과 자연으로 성모님 안에 이루신 것을 은총으로 우리 안에 이루어 주소서. 모든 정결한 생각의 부양자이시고 모든 인자의 샘이시며 모든 순결의 극치이신 이여, 오소서, 오시어, 당신 안에 흡수되는 데 장애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 제거해 주소서.
(가톨릭홈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
그녀는 교황과 추기경과 주교에게 열심히 서한을 띄웠으나 그 당시 큰 효과는 없었다. 교회의 개혁에 바쳐진 그녀의 일생은 깊은 기도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금욕적인 생애였다. 그녀는 이러한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재현시킨 것이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 수녀
그녀는 1566년, 플로렌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때의 플로렌스는 큰 도시로서 일류 가문들이 영향력을 쥐고 있었다. 카타리나 파지와 같은 환경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귀족과 결혼하여 안락한 생활을 즐기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홉 살 때, 가족의 고해 신부로부터 묵상하는 것을 배웠다.
그녀는 당시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첫영성체를 하고 한 달 후에 사적 동정 서원을 하였다. 16세가 되자 그녀는 플로렌스에 있는 갈멜 수녀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는 매일 성체를 모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타리나는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을 받고 1년 동안 수련 기간을 보냈는데 그때 심하게 앓았다. 장상은 그녀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녀를 침대에 눕힌 채로 소성당으로 데리고 가 개별적인 예식으로 서원을 하게 했다.
서원을 하자마자 그녀는 약 두 시간에 걸쳐 탈혼 상태에 빠졌다. 그 같은 탈혼 상태는 그 후 40일간 아침 영성체 후에 계속 일어났다. 이러한 탈혼 상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풍요롭게 체험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착각에 대한 보호 조처로서 또한 계시를 보존하기 위하여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해 신부는 그녀의 체험을 다른 수녀에게 구술하도록 명했다. 이것은 6년이 지난 후엔 다섯 권의 두꺼운 책을 쓸 정도였다. 처음 세 권의 책은 1548년 5월 27일부터 1585년 성령 강림 주간 동안의 탈혼 상태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간은 5년간의 혹심한 시련을 위한 준비였다. 네 번째 책은 이 시련에 대한 기록이고, 다섯 번째 책은 개혁과 쇄신에 관한 편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또 다른 책인 ’영적 권고’는 수도자 양성에 있어서 그녀의 경험들을 모은 것이다. 예외적인 것이 이 성녀에게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했다.
그녀는 생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사람에게 발현하였으며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탈혼 상태에 머무는 것이 쉬운 일이므로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맹렬한 유혹을 당했고 크나큰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그녀는 1607년, 41세에 세상을 떠났고 1699년에 시성되었다. 그녀의 사망 후 350년이 넘을 때까지도 그녀의 시체는 썩지 않았다. 신비가들에 대한 하느님의 친밀한 일치의 은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영원한 일치의 행복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에서 신비적 탈혼 상태의 원인이 되는 것은 당신의 은사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성령이다. 탈혼 상태는 육체의 연약함과 하느님의 비추심에 거역하는 육체의 힘 때문에 기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가 정화되고 강해지면 탈혼 상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탈혼 상태의 여러 가지 면에 대하여는 아빌라의 데레사가 쓴 ’영혼의 성’제6편 5장과 십자가의 성요한이 쓴 ’어둔밤’제2편 1장을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파지의 마리아 마달레나는 고통 속에서 구원의 은총을 발견하였다. 그녀가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을 때 그녀는 자신의 남은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것에 대한 그녀의 바람은 더욱 커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동료 수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분에게만 절대적인 신뢰를 두고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당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서로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성바오로수도회 홈에서)
파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도 아이답지 않은 깊은 이해와 종정을 가지고 자신도 편안히 있을 수 없다하여 제 손으로 가시관을 만들어 쓰고 침상에 누워 그 아픔으로 인해 잠이 오지 않을 때에는 그 고통을 세상 사람들의 죄의 보속으로 바쳤다.
이처럼 경건하고도 출중한 아이였으므로 그 당시에 특별한 관면(寬免)으로 열 살 때에 첫영성체를 허락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고, 그때에 그녀는 평생 동정의 서원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코르토나의 시장으로 부임된 후 그녀는 플로렌스의 수녀들에게 위탁되어 교육을 받게 되었다.
몇 해가 지나서 코르토나에 돌아온 아버지는 그녀를 출가시키려고 했으나 그녀는 서원 한 바도 있고 또 수도원에 들어가서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결심이 있었으므로 아버지는 대노하여 여러 가지로 그녀를 괴롭히며 억지로 자기의 의사에 복종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자기의 신념을 관철시켜 드디어 16세 때에 플로렌스에 있는 가르멜회에 들어가고 말았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녀의 수도명이다.
그녀가 가르멜회를 선택한 이유는 아직은 일반인들에게 영성체가 자유로이 허락되지 않았던 당시에 있어서 이 수도회만은 매일 영성체를 할 수 있는 허가가 있어 성체 안에 계신 주님과 매일 일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84년 서원을 한 후에 그녀는 탈혼의 은혜를 받았다. 그때 막달레나는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 14)라고 한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을 외우자 그녀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며 형언키 어려울 만큼 위엄 있는 태도로 변해 두 시간이나 자기를 잊고 황홀경에 빠진 것이다. 그동안 그녀는 사랑하는 주님과 신비적 일치를 체험했다. 이러한 신비로운 일치는 그 후로도 종종 일어났으나 막달레나는 고통의 인간이라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배필로서 적합할 만큼 여러 가지의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할 때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다른 수녀들 앞에 엎드려 "부디 불쌍한 죄인인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이 같은 가혹한 시련은 실로 6년이란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잘 참아 1590년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자 하느님께서 예정하셨던 고민의 잔도 이미 최후의 한 방울까지 다 없어졌는지 그렇게도 예정하셨던 고민의 잔도 이미 최후의 한 방울까지 다 없어졌는지 그렇게도 심하게 밀려오던 유혹의 물결도 갑자기 그치고 겹겹이 맺혀있던 우울한 검은 구름도 깨끗이 다 벗겨져, 그녀의 가슴속에는 비찰 데 없는 평화의 햇빛이 환하게 비치게 되었다.
막달레나는 그 동안에 배운 희생의 정신을 일평생 잊지 않았다. 이 사실은 그녀가 ’죽음보다도 고통’이란 말을 항상 명심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녀는 후에 수련장이 되고 또한 부원장이 되어 깊은 초자연적 지식과 뜨거운 사랑을 기울여 그녀에게 위탁된 수녀들을 완덕의 길로 잘 인도했으나 곧 다시 중병에 걸려 갖은 고통을 인내한 후 1607년 5월 25일, 깨끗한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 그 뒤 그녀에 의한 기적은 무수히 일어나 20년 후에는 복녀 위에 오르고 마침내 1669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9세 때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파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동정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장 · 신부)
이딸리아 피렌체의 명문 파치 가문에서 1566년 4월 2일에 탄생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보다 다른 점이 있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기도나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자주 성당에 달려가 기도하며 특히 주님의 수난에 대한 묵상을 좋아하였다.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처럼 고통받기를 원했으며 고난당한 예수님의 딸로서 편안히 있을 수 없다하여 제 손으로 가시관을 만들어 이를 쓰고 그 고통을 세상 사람들의 죄에 대한 보속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성체께 대한 사랑과 존경이었다. 성체 영하기를 간절히 원하였기에 성체께 대하여 얘기하는 사람이나 성체를 영한 사람 옆에 있기를 좋아하였다. 이러한 그의 소망은 특별 관면 하에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열 살 때 첫영성체를 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고 열두 살 때 동정서원을 발하였다. 그 후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학교에 다녔으며, 성인 수녀가 되리라는 수녀들의 예언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착하게 살며 수도 성소를 굳혀갔다.
아버지로부터 혼사에 관한 얘기를 듣자 단호히 거절하며 수도자가 될 결심을 천명하였다. 부모님들의 반대도 심했으나 워낙 열심한 분들이라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1582년 12월, 16세의 나이로 상따 마리아 델 안젤리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이 수녀원을 택한 동기는 아직 일반에게 빈번한 영성체가 허락되지 않았던 당시에 있어서 이 수녀원에선 매일 영성체를 하게끔 허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583년 착복을 하고 1584년 서원을 하면서 ‘가타리나’란 본명을 버리고 수도명 ‘마리아 막달레나’를 받았다. 서원 후 탈혼의 은혜를 받게되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씀을 외고서는 그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며 형언키 어려울 만큼 위엄있는 태도로 변하여, 두 시간이나 전혀 자기를 잊고 황홀경에 빠져 주님과 신비적 일치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차츰 수녀원의 중요 직책을 맡게 되었는 바 서원 수녀들의 선생, 수련장, 부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일생은 탈혼의 연속이었다. 놀라운 것은 탈혼 중에서도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이었고 또한 탈혼 중에 하느님 사랑에 관하여, 혹은 수녀들의 성화에 관하여 명언을 말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명언들은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후대에 전해지고 책으로도 보존되어 있다. “계시와 시련”이란 그의 글엔, “두 개의 강줄기가 합류할 때 하나가 되어 작은 강이 제 이름을 잃고 큰 강의 이름을 지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영혼에 들어오시어 영혼과 합치되실 때에도 그러하다”고 성령께 대해 말하고 있다.
그의 기적 중에는 때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기도 하고 수련장으로서 수하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것 등이 유명하다. 성녀의 특징은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와 같이 고통당하는 것이 얼마나 영혼을 정화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많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 그 고통의 가치를 확신하고 기쁘게 참아받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죽음보다는 고통을” 하고 외칠 정도였다.
기도와 극기와 숨은 생활을 통해 교회의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많은 수녀들을 완덕의 길로 인도한 성녀는 3년 간 병고로 많은 고통을 겪고 41세로 주님의 품으로 가니, 1607년 5월 25일이었다. 사후 62년이 지난 1669년 4월 28일 교황 끌레멘스 9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축일은 5월 25일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미건조한 생활과 육체의 병고로 신음하고 있다. 우리도 성녀를 본받아 고통의 가치를 깨달아 이러한 무미건조와 병고를 주님 사랑과 만민의 구원을 위해 가쁜 마음으로 참아받도록 노력하자.
[경향잡지, 1987년 5월호]
[금주의 성인] 파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St. Mary Magdalene de Pazzi, 5월 25일) 고통에도 오직 주님뿐, 환시 기적, 신비한 현상들 겪어... 기도에 매진
1566~1607, 이탈리아 피렌체 출생. 가르멜회 수녀.
이탈리아 피렌체 지방 명문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성녀는 어렸을 때부터 환시와 기적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했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을 즐긴 성녀는 12살 때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기도하다 온몸이 빛으로 휩싸이고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상태를 체험했다.
이후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 성녀는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파치 지방에 있는 관상 수도원 가르멜회에 입회했다. 수도자의 길을 선택한 것은 매일 영성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반인은 자유롭게 성체를 영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수녀회에 입회해 받은 이름이다.
성녀는 수도생활 중에도 여러차례 설명될 수 없는 신비한 현상들을 겪으며 하느님과 일치를 체험했다. 성녀와 함께 수도생활을 했던 수녀들은 성녀가 기도하는 도중 종종 얼굴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환하게 빛나는 것을 봤다고 전했다.
하느님은 또 성녀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내려 십자가 예수의 아픔을 함께 나누도록 했다. 성녀는 6년 넘게 병에 걸려 고생했고 견디기 힘든 유혹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너무 고통스러워 견디기 힘들 때는 다른 수녀들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성녀는 하느님께서 시련을 거둔 뒤부터는 기도와 묵상에 온전히 매달렸고 다른 수녀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나눠주며 이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데 헌신했다. 성녀는 1607년 세상을 떠났지만 유해는 이후 300년 넘게 썩지 않았다. 성녀는 1669년 교황 클레멘스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평화신문, 제1020호(2009년 5월 24일), 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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