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Philip Neri) Saint Philip Neri San Filippo Neri Sacerdote St. Philippus Neri, C 신분: 신부, 설립자 / 활동연도: 1515-1595년 같은이름: 네리오, 네리우스,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성 필립보 네리(Philippus Nerius)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Firenze) 태생인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또는 필립보 네리)는 산마르코(San Marco)의 도미니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에 그는 산제르마노(San Germano)로 가서 사업 경력을 쌓으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의 뜻과는 달리 신비체험을 하게 되면서 수도생활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3년에 로마(Roma)로 갔으며, 그곳에서 어느 부유한 고향 사람의 두 아들을 가르치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사피엔차(Sapienza)와 산타고스티노(Sant'Agostino)에서 철학과 신학을 3년 동안 공부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길거리나 시장바닥에서 로마인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신앙생활이 극히 미온적이었던 로마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548년 성 필리푸스는 자기의 고해신부인 페르시아노 로사(Persiano Rossa) 신부와 함께 '삼위일체 형제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는 어려운 처지의 순례자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평신도들로 구성되었으며 '40시간' 신심을 전파하였다. 그는 1551년에 사제로 서품되자마자 고해신부로 명성을 날렸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집단을 이루어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San Girolamo della Carita)로 몰려왔다. 이곳은 그가 생활하고 있던 사제들의 공동체였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도와줄 사제들을 확보하는 일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즈음에 그는 '로마의 사도'로 알려졌고, 교황과 추기경 심지어는 권력자들과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영적 지혜와 환시를 통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힘없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었다. 특히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탈혼과 환시를 수차 경험하였고, 기적까지 행하였으며,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1593년에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1595년 5월 25일 불편한 몸으로 고해성사를 주고 방문자들을 맞은 그는 그날 밤 상태가 악화되어 주위에 모인 영적 아들들에게 십자가를 그어 축복한 후 선종하였다. 그는 1615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성 필립보 네리 사제(1515-1595년)는 18세 때의 신비 체험을 하고 1533년 로마로 가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로마에 가서 젊은이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을 연마했으며 병들고 가난한 이를 돌보는 형제단을 구성했다. 1551년 사제가 되기까지 당시로는 드물게 평신도 사도로서 기도와 사도직에 적극적으로 투신하며 살았다.
고해 사제로 명성을 얻은 그는 1564년, 뜻을 같이하는 동료 사제들과 '오라토리오회'를 세워 모국어로 기도를 바치고 자선 사업 등에 힘썼다. 특히 익살스럽고 쾌활한 성품으로, 사람들이 자칫 딱딱하게만 느낄 수 있는 신심 생활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복음적 단순성, 하느님을 기쁘게 섬기는 데에 뛰어났다. 1595년에 세상을 떠났다.
The Virgin Appearing to St Philip Neri - TIEPOLO, Giovanni Battista 1740. Oil on canvas, 360 x 182 cm Museo Diocesano, Camerino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171, 1-3. 5: PL 38, 933-935)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지 세상을 두고 기뻐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말해 주는 대로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세상과 주님 안에서 함께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승리를 거두어 세상을 누리는 기쁨이 날로 증가하고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은 날로 감소하여 사라지도록 하십시오.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인들에게 하는 설교에서 우리 주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대해 하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어디에나 계시는 분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오로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늘 위에 드높이 오르시면서도 동시에 지상에서 살고 있는 이들과 가까이 계시는 분이 참으로 무한한 분이십니다. 멀고도 가까이 계시는 이분이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와 가까워지신 그분이 아니라면 누구이겠습니까?
전 인류는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 길바닥에 누워 있는데 사제와 레위는 못 본체 지나가 버리고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이 부축하여 간호해 주고 돌보아 주었던 바로 그 사람과 같습니다. 불사불멸이시고 의로우신 분께서는 죄인이고 죽어야 할 우리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셨지만, 멀리 떨어져 계신 그분은 우리의 이웃이 되시고자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대로 갚지도 않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증명합니까?
외아드님께서는 외아들로 홀로 남아 계시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홀로 죽으신 그분은 홀로 계시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은 하느님의 많은 자녀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피로써 형제들을 사들이시고, 당신께서 단죄 받으심으로 단죄 받은 이들을 구하시고, 팔려 가심으로 그들을 속량하시고, 모욕당하심으로 그들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셨으며, 죽으심으로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가톨릭 홈에서)
성 필립보 네리(Philip Neri)
트렌트 공의회가 교의적 수준에서 교회를 개혁하고 있을 때 필립보의 인격적 호소로 말미암아 거지부터 추기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이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과감한 영성에 압도된 몇몇 평신도들은 자기 주위에 재빨리 모아 처음에는 비공식적인 기도와 토론을 하였으며 후에는 로마 교회의 필요에 따라 봉사를 하는 단체가 되도록 했다.
고해 신부의 권고로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언제나 친절하고 때로는 농담까지도 잘하는 그는 다른 사람들의 위선과 착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은사로 받아 훌륭한 고해신부가 되었다. 그는 성당 위층에 있는 방에서 고해 성사를 보러 온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함께 기도했다. 그는 때때로 사람들과 다른 성당으로 산책을 가면서 어떤 때는 도중에서 노래와 간식을 곁들이기도 했다.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사제가 되어 공동체에서 그와 함께 살았다. 이것이 그가 설립한 수도원이 오라토리오회의 시작이다. 그들 생활의 특징은 모국어로 된 찬미가와 기도를 바치면서 매일 오후에 4번의 비공식적 담화로 경배를 하는 것이다. 팔레스트리나는 필립보의 추종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데 전례를 위한 음악을 작곡했다.
그 당시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필립보의 충고를 따랐다. 그는 주로 교회 안에서 많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거룩한 인물로 만듦으로써 종교 개혁의 중요한 인물들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덕행은 겸손과 쾌활함이다. 많은 사람들은 필립보처럼 매력적이고 익살스러운 인물은 진지한 영성에 젖을 수 없다고 잘못 생각한다. 필립보의 생활은 신심에 대한 우리의 딱딱하고 옹졸한 안목을 변화시켜 준다.
성덕에로 향하는 그의 접근 방법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쾌활한 웃음을 동반하는 것으로 참으로 가톨릭적이다. 필립보는 그의 추종자들이 성덕에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통하여 비인간적이 되지 말고 더욱더 인간적이 되기를 바랐다. 필리보 네리는 이렇게 기도했다. "오늘을 철저히 살게 해주소서. 그러면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겠나이다."
(성바오로수도회 홈에서)
성 필립보 네리(Philip Neri) 사제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가난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필립보 네리는 산 마르코(San Marco)의 도미니코회에서 교육받고 부유한 상인인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 로마에서 살았다. 항상 낙천적이고 명랑, 활발한 성격으로 '피포 부우노' 즉 '착한 피포'라는 애칭을 얻은 그는 가난한 이와 병든 이웃을 돕고 기도에 힘쓰는 단체에 가입했으며 사제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가면서 그 자신이 주변 젊은이들을 모아 종교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필립보 사제의 친구들 중에는 당대의 유명한 종교인들이 많은데 이냐시오, 카롤로, 카밀로, 프란체스코 디 살레스 그리고 당시의 교황이 그들이다.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웃 그리고 미천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자선이 넘치는 참된 종교적 삶은 기쁨이 넘치는 영혼으로부터 탄생한다.
참회를 해야 하거나 혹은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일 때에도 성찬식의 '환희의 찬가'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해주고, 우리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축복받은 사람들'로 확신하게 해주면서 성스러운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성바오로딸수도회 홈에서)
The Virgin Appearing to St Philip Neri - PIAZZETTA, Giovanni Battista 1725. Oil on canvas, 367 x 200 cm Santa Maria della Consolazione (Fava), Venice.
성 필립보 네리(Philip Neri)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 4). 필립보 네리는 이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일생의 표어로 삼은 성인이었다. 필립보 보노(선량한 필립보)라 하면 당시의 로마 시민으로서 누구 하나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필립보 네리의 백부는 상당한 재산을 가진 상인이었으나, 불행히 뒤를 이을 자녀가 없었으므로 18세가 된 필립보를 양자로 삼아 자기의 가업의 뒤를 계승하게 하고, 상당히 많은 유산을 남겨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필립보는 그러한 재물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청빈한 생활을 동경하여 일체를 포기하고, 로마에 가서 16년이란 오랜 세월을 친절한 친구의 집에서 기거하며, 그의 두 자녀의 교육을 유일한 업으로 삼고 검소한 생활을 계속하며, 틈만 있으면 시내의 성당, 카타콤바 등을 순례하고 기도에 몰두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특히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바나 무수한 순교자의 성혈로 물든 원형극장에는 12년 동안 거의 날마다, 때로는 밤중에도 참배하며 자신도 그러한 순교자와 같이 신앙이 견고해지기를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그의 성의를 기뻐하셨음인지 1544년의 성령 강림 대축일 전날, 필립보가 해오던 대로 카타콤바에 가서 기도를 바치고 있을 때 특별한 은혜를 받게 되었다. 즉, 한없는 성스러운 사랑이 충만되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느끼며 갈빗대 두 대가 부러지면서 가슴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 상처는 일평생 낫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교회 내에는 불행히도 냉담적인 폐풍이 충만해 있었다.
필립보는 될 수 있는 데까지 이 같은 신자에게 신앙을 북돋아 주려고 힘쓰는 동시에 병자나, 빈궁자나, 먼 곳에서 온 순례자의 구제 등 육신의 자선 사업에도 노력하며, 또한 무엇보다도 영적 사선사업을 중요시하여 죄인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도록 주선해 주었다. 필립보의 사랑으로 가득 찬 인품과 쾌활한 성격은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했다. 그 중에도 마을내의 아이들은 진심으로 그를 따르며 같이 놀기도 하고, 교리를 배우기도 하고, 또한 성당에 참배하는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필립보는 세상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나 아직까지 성직자는 아니었다. 그의 고해 신부는 이같이 덕이 많고 독실한 사람을 평신도로 두는 것이 아깝다 생각하고 자꾸 신품 성사 받기를 권유했으므로, 필립보는 드디어 결심하고 1551년에 서품되어 사제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깊은 마음, 겸손한 태도, 쾌활한 성격, 검소한 생활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여기에 더하여 또 착한 목자이신 예수를 본받아 방황하는 양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일이 첨가되어 그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고해를 들으면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며 자신의 수고를 조금도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필립보는 또한 각 방면의 사람들을 수명씩 자신의 좁은 방에 모아 놓고 교훈을 하며 종종 묵상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를 희망하는 이가 점차 증가해 자기 집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더 넓은 곳을 구해 한층 더 사도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그 집회의 장소는 오라토리오(기도의 집)라고 이름 지어져 그 뒤 성인의 덕을 사모하는 이들이 모여 결성한 오라토리오 수도원의 발상지가 되었다. 교황의 명령에 의해 그 사람들의 지도자로 된 이가 필립보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는 또한 축일에는 신자들을 인솔하고 로마의 옛 성당을 참배했다. 특히 사순시기 직전의 사흘간 거행되는 세속적인 행사 사육제(謝肉祭; 가톨릭교 국가에서 사순시기 직전의 3일 동안 술과 고기를 먹으며 가면을 쓰고 행렬하거나 연극과 놀이로 즐거이 노는 날)에는 자진해 순례의 행렬을 개최하고 이로써 세인의 죄를 보속했다.
보통 인물 같으면 그러한 위대한 인물들에게 그렇게까지 존경을 받는다면 교만한 마음이 생겼겠지만, 필립보는 조금도 불손한 빛이 없었고 오히려 더욱 겸손하며 그로 말미암아 진기한 행위를 감히 행하는 때도 있었다. 가령 수염을 한쪽만 깎고 넓은 거리를 걷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책을 읽을 때 일부러 아이들의 반말을 흉내 내기도 하고, 이사할 때에 주방도구를 갖고 나와서는 우스운 행동을 보여주는 때도 있었다.
이는 모두 남에게 조롱을 받으리라는 겸손함 마음에서 행해진 것인데, 그의 높은 성덕을 아는 이들은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점점 존경의 마음을 더 가져, 교훈을 청하는 이, 전구를 구하는 이들이 연달아 그를 방문했다.
그가 미사성제를 거행할 때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고 그의 경건한 태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한다. 성인에게도 어느덧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졌다. 병으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된 필립보는 병상에 누어서 벽에 걸린 주님의 십자가상에 손짓하며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저처럼 고통을 참으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 계시는데, 이 미천한 저는 이런 호화스러운 자리 위에서 친절한 사람들의 간호를 받으면 쉬고 있습니다. 얼마나 염치없는 노릇입니까?"하고 눈물을 흘리며 곁의 사람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1595년 5월 25일,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원하는 자는 참으로 해야 될 일을 모르는 자다"하는 말을 최후로 그 순결한 영혼을 하느님 아버지께 돌려 드린 것이다.
(대구대교구 홈에서)
선입견
우리는 항상 가설을 만든다. "아침이면 해가 떠오를 것이다."라든지 "지구 중력의 법칙은 계속 작용할 것이다."처럼 논리적이고 자연적인 가설도 있지만, 사람에 대해서 어떤 가설을 세우고 선입견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성인들에 대해서도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분들은 거룩함의 모범이기 때문에, 훌륭하고 좋은 분들이기는 하지만 근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심지어 필립보 네리는 고해성사를 줄 때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 한번은 어떤 수다쟁이 여인이 고해성사를 보러 왔는데 새의 깃털로 만든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필립보 네리가 깃털 가방을 달라고 하더니 그것을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당황해하는 여인에게 땅에 흩어진 깃털들을 다시 주워 모으라고 했다. 수다쟁이 여인이 흩어진 깃털들은 다시 모으기 어렵다고 말했더니 필립보는 함부로 내던진 말은 흩어진 깃털처럼 다시 주워 담기 어려운 법이라고 했다.
남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한 적은 없었는가? 사실을 정확히 알기 전에는 남을 판단하지 않겠다.
(까리따스수녀회 홈에서)
[금주의 성인] 성 필립보 네리(St. Filippo de Neri) 1515~1595.이탈리아 피렌체 출생, 사제, 로마의 수호성인.
필립보 네리는 자신 앞에 놓인 부와 명예를 버리고 가난과 봉사의 삶을 선택한 성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던 성인은 누구에게나 인기가 좋았습니다. 유머감각도 뛰어나 가톨릭교회 성인 가운데 가장 재치 넘치고 유머스러운 성인으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성인은 10대 때 부잣집 친척의 양자로 입양됩니다. 평생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지낼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로 건너와 신학과 철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성인의 생활은 기도와 묵상, 공부가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 성인은 공부조차도 기도와 묵상에 방해되는 것 같아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은수자처럼 살아갑니다. 성인은 어느 날 밤, 기도 중에 밝은 빛이 자신의 온몸을 가득 채우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 빛은 성령의 빛이 아니었을까요.
성인은 이후 은수자 생활을 접고 세상으로 나와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돕는데 앞장섭니다. 그리고 대중들을 향해 하느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37살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사제품을 받고 특히 고해성사에 주력하며 신자들을 돌봤습니다.
성인은 작은 방(오라토리오, Oratorio)에 모여 기도와 묵상, 영적 나눔을 갖는 오라토리오회를 설립했고 또 40시간 동안 기도와 묵상만 하는 '40시간 신심' 운동을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가톨릭교회 중심이라 불리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나태해진 신앙과 교회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활동하면서부터 다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성인은 선종하기 전 8년간 투병생활을 하며 고통스런 날을 보냈지만 모든 것을 참고 이겨냈습니다. 성인은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23일, 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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