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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6월 6일 성 마르첼리노 샴파냐 / 1789-1840년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10.

축일 6월 6일 성 마르첼리노 샴파냐

(Marcellinus Champagnat)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1789-1840년

같은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성 마르첼리노 샴파냐(Marcellinus Champagnat)

 

1789년 5월 20일 프랑스의 르 로지(Le Rosey)에서 물방앗간 집의 아홉 번째 자녀로 태어난 성 마르첼리누스 샴파냐(또는 마르첼리노 샴파냐)는 신심 깊은 부모로부터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다. 일찍이 성소의 꿈을 키운 그는 리옹(Lyon)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16년 7월 22일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라 발라(La Valla) 본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신학교 생활 이후 늘 소년들을 교육하는 수도회의 설립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마침내 1817년 ‘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를 설립하여 1836년에 공식 승인을 받았다. 그는 마리스타의 교육 이념인 학교 지침을 발간하였고, 교육 분야에서 기여하다가 1840년 6월 6일 51세를 일기로 노트르담 에르미타주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955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1999년 4월 18일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마르슬랭 조제프 베누아 샴파냐

모든 부모와 교육자들의 모범

번역 송영웅(바오로) · 봉명학원 재단이사

 

 

 

 

마르슬랭 조제프 베누아(Marcellin Joseph Benoit Champagnat, 1789-1840)는 프랑스 리옹의 아모 뒤 로제(Hameau du Rosey)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소작농이었다. 집이 가난하여 그는 8세에 학교를 중퇴해야만 하였다. 15세가 되었을 때 다시 학교에 들어가 정규 교육을 받게 되지만, 이 역시 잠시 다니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마르슬랭은 자신이 사제 성소를 받았음을 자각하게 되어 16세가 되었을 때 리옹에 있는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가 신학교에서 수학할 때, 동급생 중 한 사람이 장 마리 비안네(Jean Marie Vianney)였는데 그는 후에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신부가 된다.

 

1816년 7월 22일, 마르슬랭은 사제로 서품되어 프랑스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마시프 상트랄(Massif Central)에 있는 작은 마을, 라발라(La Valla)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었다. 마르슬랭이 본당에서 관할하는 지역을 사목하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죽어가는 한 젊은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젊은이가 신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조차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죽어가던 젊은이와의 만남은 이제 막 사제가 된 젊은 신부, 마르슬랭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 경험은 마르슬랭의 사도직에 큰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라고도 한다. Little Brothers of Mary, Marist Brothers)를 설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1817년 1월 2일, 그는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서 첫 회원이 된 두 사람의 서원을 주재하였다. 그로부터 몇 주일이 지나자 다른 3명의 젊은이가 이 공동체(수도회)의 회원으로 합류하였다. 이 수도회는 가난과 겸손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보호 아래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두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수도회 회원들은 학교 교사, 교리 교사 그리고 젊은이들을 양성하는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마르슬랭은 첫 수도회 회원들을 교육한 다음, 그들에게 본당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대상으로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 자격증을 수여하였다. 1819년 11월, 그는 자신의 첫 수도회 회원들을 라발라와 마레(Marlhes)에 있는 학교에 교사로 파견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이 수도회에 입회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힘입어 마르슬랭은 보다 광범위한 설립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824년, 그는 본당 업무의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사도직에 전적으로 전념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교구에 요청하였다. 마르슬랭은 자신의 요청이 수락된 이후에 수도회의 발전과 수도회의 인적 자원 그리고 재원 확장을 위해 자신의 여생을 바쳤다.

 

1836년 교황청은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를 정식으로 인가하였고 이 수도회에 오세아니아의 선교를 위탁하였다. 오늘날 이 수도회 형제들은 78개 국가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창립자의 좌우명인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넓은 마음"에 대한 실현을 삶으로 증언하고 있다.

 

마르슬랭은 51세에 선종하였다. 1955년 5월 25일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시복하였고 1999년 4월 1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 시성식에서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르슬랭 성인은 불타오르는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 시대에 팽배하였던 종교적 무지와 젊은이들이 경험하던 자포자기 등에 가슴 아파하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영성적인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교육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깊이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마르슬랭 성인은 모든 부모와 교육자들에게 모범인 분입니다. 그는 부모와 교육자들이 긍정적이고 희망찬 눈으로 젊은이들을 바라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마르슬랭 성인은 젊은이들을 전적으로 사랑하여 그들이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고 아울러 도덕적이면서 영성적으로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게 최대한 도와주라고 부모와 교사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성 마르슬랭 조제프 베누아 샴파냐의 축일은 6월 6일이다.

 

[교회와역사, 2012년 4월호]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창설자 샴빠냐 신부 등 3명 4월 시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는 4월 18일 오전 10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창설자 마르첼리노 샴빠냐 신부를 비롯해 조반니 카랄브리아, 아로스티나 리비아 페에트란토니 등 3명을 시성한다.

조반니 칼라브리아 신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천주의 섭리의 가난한 종 수도회'를 세웠고 같은 이칼리아 출신 아고스티나 리이마 피에트란토니는 '애덕 수녀회'를 설립했다.

 

[가톨릭신문, 1999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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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첼리노 샴빠냐 신부는 누구?

 

 

복자 마르첼리노 샴빠냐 신부는 1789년 5월 20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났다. 1816년 7월 22일 사제품을 받고 8월 13일 리용교구 라발라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했다. 같은 해 10월 28일 '하느님을 모르고 죽어 가는 소년'을 만나게 되고 '청소년 교육'에 대한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된다. 마침내 1817년 1월 2일 두 젊은이와 함께 라발라에서 평수사들로만 구성된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를 설립했다.

 

초창기 가난한 가운데 기도와 작업, 공부를 병행하면서 힘든 생활을 해왔다. 또한 많은 이들의 몰이해와 비난으로 시련을 겪기도 햇지만 창설자 샴빠냐 신부와 첫 수사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수도회 설립 2년만에 첫 학교를 세웠다.

 

1840년 6월 6일 51살의 나이로 선종한 샴빠냐 신부는 1896년 7월 28일 가경자로 선포되고, 1955년 시복됐다. 1836년 오세아니주에 첫 선교수사를 파견한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1996년 9월 현재 스페인, 브라질,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한국 등 98개국 48개 관구에서 5000여 명의 수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 진출은 1971년 9월 멕시코 관구에서 4명의 수사가 파견됨으로써 이뤄졌고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85-1에 본원을 두고 있다. 89년 지구로 승격된 한국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81년 첫 종신서원자를 배출한 이래 96년 9월 현재 종신서원자 18명, 유기서원자 11명, 수련자 1명 등이 있다.

 

안동 원주 서울에서 학생화관 및 교육원을 운영했거나 운영하고 있으며 충주에서는 마리스타 기술교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의 영성은 '마리아 신심', '겸손 · 단순 · 겸허의 정신', '가족 정신' 등으로 요약된다.

 

[가톨릭신문, 1999년 1월 24일, 신정식 기자]

 


 

 

 

복자 3위 성인품 오른다

샴파냐 신부, 칼라브리아 신부, 피에트란토니 수녀

  

[바티칸=CNS]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창설자인 복자 마르셀 샴파냐 신부를 비롯해 천주 섭리의 가난한 종 수도회 창설자 조반니 칼라브리아 신부, 이탈리아의 아고스티나 리비아 피에트란토니 수녀의 복자 시성식을 거행한다.

 

1789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샴파냐 신부는 지난 1925년과 1954년에 각각 시성된 성 요한 비안네와 성 베드로 샤넬과 리용 신학교 동창으로, 1817년 마리스타 교육수사회를 창설했으며 1840년에 선종, 지난 1955년에 시복됐다. 교황청 통계에 따르면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소속 수사들은 미국에 250여명을 포함 전세계적으로 51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칼라브리아 신부는 1873년에 태어나 고등학생 시절 병자와 노인을 위한 자선회를 조직했으며 서품 후 베로나 신학교의 고해사제로 봉직하면서 병들었으나 가난하여 치료받지 못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는 1907년 천주 섭리의 가난한 종 수도회를 창설했다. 이 수도회는 현재 이탈리아와 남아프리카에서 270여명의 회원이 불우 어린이 및 노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1864년에 태어난 피에트란토니 수녀는 1886년 사랑의 수녀회에 입회, 로마에 있는 '성령병원'의 간호사가 됐다. 결핵에 걸렸으면서도 병원에서 계속 일하기를 요청했던 피에트란토니 수녀는 30세 때인 1894년 폭력전과를 가진 정신병 환자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평화신문, 1999년 4월 18일]

 


  

 

 

샴빠냐 신부 신앙과 생애 (상)

 교육통한 사도직 수행에 앞장

(1999년 4월 18일 시성)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 한국지구(지구장=한승우 알프레도 수사 · 멕시코인)는 수도회 창설자 마르첼리노 샴빠냐 신부의 4월 18일 시성을 앞두고 「시성식위원회」를 구성하고 1월 25일부터 준비활동에 돌입했다. 한국지구는 창설자의 시성식을 전후해 기념미사화 다양한 축하 행사를 마련할 예정이며, 특히 샴빠냐 신부의 영성과 수도회의 국내외 활동을 홍보하기 위한 책자 발간 등도 모색하고 있다.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 이 도밍고 수사는 『한국지구에서는 창설자의 시성을 위해 오래 전부터(적어도 1985년 이전부터) 매월 9일기도를 바쳐왔다』고 밝히고 『시성 전부터 성인이라 믿고 살아왔지만 실제 성인으로 공식 선포됨으로써 보다 분명히 그 분의 영성과 소명을 수행하게 됐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2회에 걸쳐 샴빠냐 신부의 생애와 수도회의 활동 현황, 영성 등을 알아본다.

 

- 샴빠냐 신부와 수사들은 피나는 노력으로 마리스타 사제회를 창립하고 2년만에 첫 학교를 세웠다.

 

 

1816년 프랑스의 어느 시골. 한 젊은 사제가 죽어가고 있는 소년을 찾았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혁명(1789~1799년)의 혼란 속에서 힘겹게 살아 온 17살 정도의 그 소년은 어느 날 몹쓸 병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신부는 소년의 임종을 돌보다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죽어가고 있던 소년이 하느님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혁명으로 인한 사회의 엄청난 변화, 수천 명의 성직자를 학살하는 종교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존재가 절실하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는 환경이었지만 젊은 신부의 생각에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젊은 신부는 약 2시간에 걸쳐 소년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가르쳤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년은 하느님의 품안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둘 수 있었다. 젊은 신부는 기쁘기도 했지만 또 다른 많은 청소년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가운데 커가고 있음이 걱정됐다. 젊은 신부는 돌아오는 길에 그 동안 종종 생각해오던 것을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듬해 1817년 1월 2일 설립된 수도회가 바로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이고 그 젊은 신부는 창설자 '마르첼리노 샴빠냐'(Marcellin Champagnat)이다.

 

복자 샴빠냐 신부의 생애

 

오는 4월 18일 시성을 앞둔 복자 마르첼리노 샴빠냐 신부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하던 1789년 5월 20일 프랑스 르 로지(Le Rosey)에서 태어났다. 어린 샴빠냐는 학생보다는 교사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교육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초등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등 교육을 받지 못한 관계로 지적 능력에 있어서 항상 남보다 뒤질 수밖에 없었던 그는 14살 때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하고 16살 때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에서 못 배운 것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엄격히 단련시키는 훈련을 쌓은 그는 1813년 24살 때 리옹(Lyon) 대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815년 부제품을, 이듬해 7월 22일 사제품을 받고 리옹교구 라발라(Ra Valla)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했다. 사제가 된 샴빠냐는 '교육을 통한 사도직 수행'이라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마리스타 사제회 창립회원으로 가입했다.

 

샴빠냐신부는 1816년 10월 28일 '하느님을 모르고 죽어 가는 소년'을 만나면서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더욱 확연히 깨닫는다. 마침내 신학교 시절부터 늘 생각해왔던 평수사들로만 구성된 교육 수도회 창설을 결심하고, 이듬해 두 젊은이와 함께 실행에 옮겼다.

 

초창기 수사들은 매우 힘든 생활을 해야했다. 가난 속에서 기도와 노동과 공부로 하루하루를 살았으며 많은 이들의 몰이해와 비난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때로는 질병과 실의, 좌절을 겪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눈사태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의연히 맞서 이겨낼 수 있었다. 샴빠냐 신부와 첫 수사들의 피나는 노력은 수도회 설립 2년만에 첫 학교를 세울 수 있었고 이후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했다.

 

1824년 수도원이 세워지고, 28년에는 수도회의 규칙서가 작성됐다. 1840년 6월 6일 샴빠냐신부 선종 당시, 앞서 선종한 92명을 빼고도 280명의 수사가 활동하고 있었고 이들은 48개의 학교를 운영하면서 창설자의 교육 이념을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1851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고 1863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도 인가를 받았다. 1920년 7월 11일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샴빠냐신부를 가경자로 선포했고, 사후 115년 만인 1955년 5월 29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1998년 시성조사가 완료됨에 따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는 4월 18일 오전 10시 로마 성 베드로대성당에서 샴빠냐신부 시성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이번 시성식에서는 '천주 섭리의 가난한 종 수도회' 창설자 조반니 칼라브리아신부와 '애덕 수녀회' 창설자 아고스티나 리비아 피에트란토니도 함께 시성된다. 이들 수도회는 아직 한국 교회에는 진출하지 않았다.)

 

[가톨릭신문, 1999년 1월 31일, 신정식 기자]

 


 

 

 

샴빠냐 신부 신앙과 생애 (하)

 청소년 교육 · 자활사업에 '투신'

 

사도직 활동과 현황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의 본부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으며 한국 지구 본부는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85-1 절두산 순교 기념관 앞에 있다. 1836년 오세아니아주에 첫 선교수사를 파견한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1996년 9월 현재 한국을 비롯한 스페인 브라질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멕시코 벨기에 아르헨티나 중국 일본 등 세계 98개국에 진출해 있다.

 

48개의 관구를 두고 있으며 5164명의 수사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각 국의 제도권 교육제도 안에서 청소년 교육에 투신하고 있으며, 한국과 같이 제도권이 수용 못한 불우 청소년 교육 자활사업에 손길을 뻗치고 있는 곳도 있다. 수도회는 창설자의 은사에 부합하는 모든 사도직에 개방되어 있으며, 하느님 말씀의 직접적인 선포를 수도회 사명의 근본적인 요소로 삼고 있다. 수사들은 교리교육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각자의 자질에 따라 직무 수행에 온전한 마음으로 투신하며 청소년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한다. 또한 '세상의 모든 교구가 다 우리 시야에 들어 있다'는 창설자의 말씀에 따라 비복음화 국가들이나 신생교회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두는 선교소명도 지니고 있다.

 

국내 진출과 활동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개최한 총회에서 각 관구마다 10%의 회원들을 의무적으로 선교지에 파견하도록 결정한 바 있다. 이에 따라 1971년 9월 멕시코 중앙관구에서 4명의 수사가 한국에 파견됐으며 올해로 한국진출 28년째를 맞게 된다.

 

한국지구에는 27명의 수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지구는 서울 합정동 본부와 함께 수원에 수련소를 두고 회원을 양성하고 있다. 한국지구가 운영하고 있는 시설로는 서울의 '마리스타 교육관'과 충주의 '마리스타 기술 교육원'이 있다. 지난해는 청주 양업고등학교에 3명을 파견, 남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마리스타 교육관은 중고생이나 주일학교 교리교사, 레지오 단원 등 단체를 대상으로 피정을 지도하거나 자체적으로 피정할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마리스타 기술 교육원은 청소년 직업보도시설로서 13~18세의 남자 청소년들에게 목공예, 금속공예 등의 기술을 전수해주고 자립을 도와준다. 이들에게는 기술 뿐 아니라 사회적응 학습, 인성교육과 신앙교육도 병행돼 성숙한 사회의 구성원이자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에서의 활동은 다양했지만 사회적인 여건의 변화와 수도회 내부의 사정 등으로 철수하기도 했다. 안동의 마리스타 학생회관(1973~1986)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직업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했으며 나중에 안동교구로 이관했다. 원주교구의 요청으로 1985년부터 운영한 원주의 마리스타 교육원은 청소년 및 일반인을 위한 피정이나 교육 장소로 활용됐으나 교구에서 사회복지관으로 개편한다는 계획에 따라 1989년 철수했다.

 

경북 영주에 개원한 다미안 피부과 의원을 1981년 안동교구로부터 위임받아 운영하기도 했다. 4개 시.군의 재가 나환자와 정착마을의 나환자들을 진료하고 그들의 생계비와 자녀 학비 지원, 자활 사업 보조 등도 해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환자들이 감소하고 생활환경이 나아졌으며 자녀들의 외지 진출에 따라 일이 줄기도 했지만 본래의 교육 사도직에 전념하기 위해 1996년 안동교구에 이양했다.

 

다양한 교육사업에서 물러나 관망하고 있는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 한국지구는 지난해 12월 총회를 통해 새 지구장을 선출하고 참사회를 만드는 등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대희년을 앞둔 '성부의 해'를 맞아 형제적 일치를 중시하는 가운데 다양한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 총회를 통해 사도직 활동을 강화하기로 하고 이 시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일을 찾고 추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한국지구는 우선 각 교구의 청소년 사목을 연구하고 수도회가 뒷받침할 수 있는 부분이 없나 연구하고 있다. 청소년 사목에 있어 교구가 하기 힘든 분야 즉 틈새시장을 찾아 수도회의 소명을 펼쳐가려는 의지다. 무엇보다 약물 중독, 가출 청소년, 공부방이나 쉼터 운영 등도 자기네 몫이 아닐까 고민하고 있다.

 

영성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의 영성은 '마리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께로,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마리아께'라는 표어를 통해 우선 이해할 수 있다.

 

창설자 샴빠냐신부가 태어나고 자라났던 당시 프랑스는 사회적으로 혼란했을지라도 마리아 신심은 무척 강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소년 샴빠냐는 어머니와 고모들의 자연스런 마리아 신심에 영향을 받아 기도할 때는 언제나 마리아의 모성에 의존했고, 어떤 일을 시작할 때에는 항상 성모님께 축복을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샴빠냐신부는 수사들이 동정 마리아처럼 살아가길 염원했고 또 마리아께서 모든 것을 해주었다고 확신하였기에 마리아를 좥나날의 도움이며 최고의 장상좦이라고 불렀다. 이에 수사들도 마리아의 정신으로 흠뻑 젖어들기 위해 자애로운 어머니이시고 모델이신 그 분의 생애를 즐겨 묵상한다.

 

수사들 사이에서 또한 사도직 현장에서 만나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진실함과 친절함으로 드러난다. 수사들은 묵묵히 선을 행함으로써 생명과 재능을 교회와 세상을 위한 봉사에 기꺼이 바치고 있다.

 

무엇보다 수사회는 '가족정신'을 소중하게 여긴다. 서로를 형제라고 부름으로써 수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일치하여 살아가는 한 가족임을 드러낸다. 가족정신의 전형은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찾을 수 있으며 사랑, 용서, 협조, 상호보완, 자아포기, 솔직 담백함 그리고 기쁨들로 이루어진다. 이 가족 정신은 수사들이 늘 사랑으로 함께 하는 공동 작업을 통해 표현되고 강화된다.

 

양성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창설자의 시성을 위해 매월 1일부터 9일기도를 바쳐왔듯이, 매월 15일부터는 성소자들을 위한 9일기도를 바치고 있다. 그만큼 수도자 양성에 정성을 쏟고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평수사로만 구성된 수도회여서 홍보에 어려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창설자의 시성을 계기로 홍보에 주력할 계획이다.

 

양성과정은 다른 수도회와 비슷하나 수련기때 실시되는 3년 과정의 필리핀 마리스타 아세아 센터 교육, 종신서원 후 국제적 차원에서 실시되는 6개월간의 영신적인 제2수련과 각종 연구모임이 특징적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고졸 이상 학력에, 평수사로서 청소년 교육에 투신할 젊은이, 세례 받은 지 3년이 지났고 병역필이거나 면제자면 입회가 가능하다.

 

[가톨릭신문, 1999년 2월 7일, 신정식 기자]

 


 

 

 

 


 

성화속의 성 마르첼리노 샴파냐

[영성의 향기]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 성 마르첼리노 샴파냐

[수도 영성]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