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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6월 11일 성 바르나바(Barnabas) 사도 / +1세기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11.

축일 6월 11일 성 바르나바(Barnabas) 사도

ST. BARNABAS the Apostle

San Barnaba Apostolo

신분: 사도, 순교자

활동연도: +1세기

같은이름: 바르나바스

 

 

 바르나바(Barnabas) 사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극찬을 받은 성 바르나바는 비록 그가 12사도에 들지는 않았으나 사도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원래 키프로스(Cyprus) 태생으로 요셉(Josephus)이라 하였는데,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봉헌하였다. 이때 사도들이 그에게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초기 신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공동체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의 공동체를 설득하여 바오로(Paulus)를 제자로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로 파견되어 그곳의 공동체를 둘러보기도 하였다(사도 11,22 이하). 그리고 바오로를 타르수스(Tarsus)로부터 그곳으로 데려왔다. 그는 바오로와 함께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공동체에 안티오키아의 기부금을 전달하였고, 그의 사촌 요한 마르코(Joannes Marcus)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세 사람이 키프로스와 베르게 그리고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선교여행 길에 올랐을 때, 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맹렬한 반대를 받게 되자 이방인들에게 설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은 리가오니아의 이고니온과 리스트라로 갔으며, 여기서 그들은 신들로 인정받았으나 곧 돌 세례를 받게 되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다.

 

유대인 예식 준수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을 때,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회의에 참석하고 그들의 활동 보고를 하였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오는 길에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를 데리고 다른 방문 길에 오르려 하였으나,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이유로 요한 마르코를 반대하자 그들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나, 바오로와는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전승에 의하면 바르나바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Roma)에서 전교하였고, 키프로스 교회의 설립자로 인정받으며, 61년경에 살라미스에서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 위경인 바르나바의 편지가 그에게 헌정되었으나, 현대의 학자들은 70년과 100년 사이 알렉산드리아의 신자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바르나바의 복음서는 이탈리아의 어느 그리스도인이 기록한 듯하고, 바르나바의 행전은 요한 마르코의 업적일 것이다.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키프로스섬의 레위족 출신으로, 바르나바란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요셉(사도4:36)이며 성 마르코의 사촌(골로 4:10)이다. 바오로와 함께 안티오키아 지방과 예루살렘 지방을 왕복하면서 예언자와 교사로 활동했고(사도 11:22 이하), 바오로의 제 1차 전도여행에 동반하였다(사도 13:4-14:26).

 

사도회의에서 바오로와 함께 유태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리사이파 출신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격렬하게 논쟁하였다(사도 15:1-29). 그 뒤 바오로의 제 2차 전도여행 때 마르코의 동행문제로 바오로와 충돌했고, 마르코와 함께 키프로스 섬으로 떠나갔다(사도15:36-39).

 

그밖에 1고린 9:6, 골로 4:10에도 바르나바에 대한 기록이 있고,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가 지은 ≪Hypotyposeis≫, 에우세비오의 ≪교회사≫, 위(僞)글레멘스의 ≪성서성훈≫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중 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 ≪재회록≫(Recognitiones)에 의하면 마태오와 동일인이라고도 한다. 테르툴리아노의 ≪De pudicitia≫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르나바라고 말하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키프로스섬의 살라미나에서 유태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7세기 ≪로마 미사사본≫에도 그의 이름이 보이고 9세기 이후 축일표에는 6월 11일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바르나바 사도

 

우리가 바르나바로 알고 있는 키프로스 태생의 사도는 본래 요셉이라고 불린 레위였다.  그가 사도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이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그가 중요한 몫을 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는 성령께서 강림하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그는 곧바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의 처분에 맡긴 사람이었다(사도 4,37).

 

사도들은 그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아는 사람(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르나바'라고 불렀다. 이것은 대립을 누그러뜨리고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한 그를 잘 표현한 이름이다. 그가 조정과 화해의 몫을 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는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참으로 "성령과 믿음으로 가득 찬 훌륭한 사람"(입당송, 본기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그리스도교적 낙관주의는 앞을 잘 내다볼 줄 알고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데에서 온 것이다. 바르나바는 공동체가 바오로 사도에게 과거에 품었던 적개심을 잊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그를 기꺼이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바르나바는 다르소로 가서 바오로를 찾아 안티오키아로 데리고 와, 그와 함께 소아시아 남쪽 해안 지방을 복음화하려고 첫 선교 여행을 떠난다.

 

49년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 두 사도는 마르코에 대한 의견 차이로 서로 헤어져 각각 다른 길을 간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갔다(사도 1,39).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바르나바는 이 섬에서 순교하였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성 크로마티우스 주교의 [마태오 복음 주해]에서

(Tract. 5,1.3-4: CCL 9,405-407)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마귀가 어리석게 만든 사람들의 마음에 천상 지혜를 통하여 제 맛을 찾아 주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참되고 영원한 빛이신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들 스스로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친히 정의의 태양이십니다. 주님은 찬란한 광채가 퍼져 나가듯이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빛을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서 오류의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로 말미암아 빛을 받아,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 빛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 요한도 자신의 첫째 편지에서 "하느님은 빛"이시라고 말할 때 하느님 자신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하느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 가운데 있다고 적절히 증언해 줍니다. 따라서 오류의 어둠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하는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항상 빛 안에서 거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고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키십시오."라고 사도 바오로는 권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생활에 그렇게도 유익하고 필요한 빛을 우리 불충성의 너울로 감추어 어둡게 해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그 빛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쓸모없는 빛이 되어 모두 해를 입을 것입니다. 천상의 사업을 하려고 한 달란트를 받아 가지고 투자하여 이자를 얻기보다는 땅속에 감추고 싶어 한 사람은 응당한 벌을 받았다고 우리는 성서를 읽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함께 받은 찬란한 빛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빛나야 합니다.

다윗이 말하는 대로 우리는 천상 계명과 영적 은총이라는 등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법은 내 발의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 솔로몬도 이 빛에 대하여 "주님의계명은 등불이오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과 신앙의 등불을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의 구원이 되고 우리 자신도 진리의 빛으로 위한을 누리며 모든 믿는 이들이 그 빛을 받을 수 있도록, 언제나 교회 안에 곧 등경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성 바르나바(Barnabas) 사도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로 "믿음과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이란 평을 받고 있는 바르나바는 '격려의 아들', '위로의 아들', '권위자'란 뜻이다. 키프로스의 유대인인 바르나바는 사도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는데 있어서 열두 사도 이외에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던 사람이다.

 

그는 성 바오로와는 친밀한 사이였고(그는 바오로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소개했다.) 과거의 박해자와 아직도 의심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종의 중개자로서 활동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안티오키아에서 발전하자 바르나바는 그들을 같은 양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예루살렘 모교회의 공식적인 대표로서 파견되었다. 그와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1년 동안 가르치고 그 다음에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 후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안티오키아에 공식적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노력은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 리스트라의 기적 이후에 사람들은 신과 같이-바르나바는 제우스신이고 바오로는 헤르메스라고 함-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이런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려 왔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어떤 도시에서는 그들을 추방하였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되풀이되는 할례에 관한 이단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야 했다.  또한 가장 좋은 친구였던 둘 사이에 의견차이가 있었다. 바오로가 그들이 복음을 전한 곳을 다시 방문하고 싶어 했을 때, 바르나바는 자기의 사촌이며 복음사가인 마르코를 데리고 가려했다.

 

그러나 바오로는 마르코가 한때 그들을 버리고 갔기 때문에 생긴 의견차이는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갈라놓을 정도로 심각해서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가고 바오로는 실라를 데리고 시리아로 갔다.

 

나중에 바오로와 바르나바 그리고 마르코는 모두 화해했다. 베드로가 유대인 친구들을 두려워해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오로가 베드로를 비난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바르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휩쓸려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르나바는 자신의 생활을 주님께 바친 사람으로 간단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그는 '성령과 믿음으로 가득 찬'사람이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와 바오로가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추방되었을 때에도 그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있었다. 바르나바는 대단히 청빈하고 목가적인 예루살렘 교회의 너그러운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그 이름이 언급되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서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르나바라고 불리는 요셉도 자기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다."(사도 4,32-37)

 

(성바오로수도회 홈에서)

 


 

 

성 바르나바(Barnabas) 사도

 

1세기경 순교 치프로 사도행전에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10,24)으로 칭송받는 성 바르나바가 비록 주님으로부터 뽑힌 열 두 사도 명단에는 들지 않았어도, 흔히들 사도로 인정을 하였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에 그는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봉헌함으로써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르나바는 예루살렘 초대 공동체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개종자 바오로를 제자로 받아들이게 했고, 안티오키아로 파견되어 그곳의 교회 공동체를 지도하는 활약성을 보였다. 또한 그는 바오로와 함께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바르나바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선교에 가담했고, 키프로스 교회의 창설자로 인정받으며 61년경에 살라미스에서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 '바르나바의 편지'와 '바르나바의 복음서'는 그의 이름으로 헌정된 것이지만 위경으로 분류된다.

 

(성바오로딸수도회 홈에서)

 


 

 

 

성 바르나바(Barnabas) 사도

 

성 바르나바는 본래 요셉이라는 이름이었으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후부터는 동료에게 바르나바('웅변가'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키프로스 섬 출신으로서 유다교를 신봉했으나 신앙을 굳건히 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신전에서 참배하고 있을 때 우연히 예수의 설교를 듣고 매우 감동하여 드디어는 개종을 하고 27인의 제자 중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성령 강림에 참여하고 그 성스러운 은혜를 받았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실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다. 그들은 자기의 재산을 공동의 것으로 만들고  상호 기도와 선행에 온 힘을 기울였다. 바르나바도 전부터 밭 하나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팔아 형제자매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대금을 사도들에게 제공했다.

 

그러던 중에 전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이 다마스커스에서 회개의 은혜를 받고 베드로를 만나러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의 옛 행적이 바르지 못했던 터라 아무도 그를 상대 안했지만 바르나바는 그를 신용하며 정성껏 접대하고 신자의 집회 등에도 데리고 가서 그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름다운 우정이 깃들게 되었다. 안티오키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상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자, 사도들은 바르나바를 그들의 목자로 임명했다. 그래서 그가 즉시 부임해 본 결과 신자의 수가 예상보다 많아 혼자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돌아온 사울의 힘을 빌리려고 그를 초대해 같이 신자의 지도와 교세의 발전에 진력하기를 1년, 예루살렘이 대기근(大饑饉)이란 말을 듣고 구제를 위한 기부금을 모집하고 사울과 같이 이를 가지고 그곳으로 급히 갔다.

 

다시 안티오키아에 돌아와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다. 그들이 수명의 예언자와 교사와 같이 단식재를 지키며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예언자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기를 바르나바와 사울을 각국에 선교사로 파견하라는 것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다시 단식과 기도로써 마음의 준비를 하고 축복을 받아 주교가 되어 선교사로서 그 곳을 향해 출발했다.

  

이때에 바르나바의 사촌으로서 요한 마르코라는 이도 행동을 같이 했다. 그들은 우선 바르나바의 출생지인 키프로스 섬을 방문해 설교로서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도 그 섬의 총독 셀지오 바오로를 회개시키고 나서 소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복음을 널리 전하는 등 곳곳에서 풍부한 수확을 거둘 수가 있었다. 이것이 바르나바와 사울 두 성인의 유명한 제 1회의 전도여행이다.

 

그들이 얼마나 우상교도로부터 그 인격을 칭찬받고 공경 받았는가는 리스트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읍에서 설교를 한 후 사울, 즉 바오로가 태어나면서부터 불구였던 앉은뱅이를 낫게 해 주자 사람들은 이를 보고 소리 지르기를 "저 사람들은 사람 모양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온 신들이다"(사도 13,11)하며 바르나바를 모든 신의 두목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말 잘하는 귀신 헤르메스라 부르며 이를 신관(神官)에게 알리어 많은 황소와 화관을 가지고 와서 두 사람에게 제사를 바치려고 했다.

 

이를 본 그들의 놀람은 어떠했을 것인가? 그들은 비통헤 싸인 나머지 자기 옷을 찢고 일심으로 상대의 오해를 풀어 올바르게 되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일단 아티오키아에 돌아오자 잠시 휴양하고 오로지 기도로써 다음의 전도여행을 준비했다. 그 때 마침 유다교에서 개종한 사람과 이교에서 개종한 사람 간에 여러 문제가 일어나 두 사도는 같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공의회에 참석하고 교황 성 베드로에게 판정을 받았다. 전에 전교했던 곳의 교세를 시찰차 제2회 전도여행에 출발하려던 때였다.

 

바르나바는 이번에도 사촌인 요한 마르코를 동반하고자 했으나 바오로는 요한이 저번 여행에서 도중에 돌아와 충분히 전교에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에 반대해 여기서 서로 의견이 달라져 각자 자기 행동을 취하게 되어 바르나바는 요한과 함께 키프로스 섬에 가서 결국 그 지방에 머무르면서 신자들을 도우며 세월을 보냈다. 그 뒤 그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밀라노까지 전교하러 갔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또한 그의 임종시기도 63년부터 76년 사이라고 짐작되나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키프로스 섬의 사라미스에서 돌로 얻어맞아 순교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전승에 의하면 485년 제노 황제 시대에 그 지방에서 그의 무덤이 발견되어 이를 열자 자기 가슴위에 손수 기록한 마태오 복음의 사본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대구대교구 홈에서)

 


 

 

 

[성인들의 발자취] 성 바르나바 사도

바오로 사도와 함께 전도여행 - 축일은 6월 11일

  

『키프로스섬 태생의 레위사람인 요셉은 자기 밭을 팔아 그돈을 사도들 앞에 갖다 놓았다』 (사도 4,36-37). 그는 사도들에게서「위로의 아들」이란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령과 믿음으로 가득찬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의 이방인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로 뽑혔으며 바오로 사도와 함께 만 1년 동안 그곳 교회신자들과 지내면서 많은 사람 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안티오키아신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침을 듣게됐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키프로스섬을 비롯한 소아시아 여러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널리 전하여 곳곳에서 큰수확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들이 「리스트라」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앉은 뱅이를 고치는 것을 본사람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신으로, 바오로 헤르메스신이라고 불렀다. 이 두 사도들은 자기들을 신으로 여긴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기쁜소식을 전해 여러분이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왔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후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의견이 갈라져 서로 헤어져 전도여행을 하게 됐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섬으로 갔고 바오로는 실라를 데리고 시리아로가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은 후에 다시 재결합, 함께 전도여행을 했다. 사도 성 바르나바의 축일은 6월 11일이다.

 

[가톨릭신문, 1981년 6월 14일]

 


 

 

[성서의 세계 - 신약]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오인된 사람들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그리스도 시대에 소아시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프리기아에는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땅에 내려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한테 은혜를 베풀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필레몬과 바우치스라는 경건한 두 사람도 신들을 친절하게 대접한 보답으로 불멸의 나무로 바뀌었다.

 

이러한 전설이 그 지역에 정말로 있었음이 사도행전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즉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들의 전도여행 중 프리기아 동쪽에 다다랐을 때 리가오니아에서 불구자 한 사람을 치유해 주자 열광적인 군중들로부터 두 명의 신으로, 즉 헤르메스와 제우스로 존경받았다. 리스트라에는 불구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그를 눈여겨보더니 그이한테 치유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외쳤다. “일어나 똑바로 서시오.” 그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걸었다. 바오로가 한 일을 본 군중은 리가오니아 방언으로 외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들은 사람 모양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온 신들이다!” 그리고 바르나바한테는 제우스라는 이름을, 대변인이었던 바오로한테는 헤르메스라는 이름을 붙였다(사도 14,8-13).

 

묘사는 단순하면서 생생하다. 바르나바는 높고 위엄이 있어야 했으므로 최고의 신 제우스와 비교되었고 키프로스 사건 이후 안내와 설교를 맡았던 작고 진취적인 바오로는 신들의 사절이요 통역관인 헤르메스로 생각했다.

 

성 밖에 있는 제우스 신당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성문 앞으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과 함께 사도들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옷을 찢으며 군중 속에 뛰어들어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이런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왔을 따름입니다. 이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입니다”(사도 14,13-15). 그들은 또한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들에게 제사를 지내려던 사람들을 말릴 수 있었다고 설교 끝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사도행전에 리가오니아에서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설교와 이방인들의 반응, 유대인들의 반대와 마침내 소아시아 중심부에 교회를 세운 사실들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아직은 루가가 이 여행에서 바오로 일행과 함께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기에 분명한 것은 루가가 이러한 사실들을 자료의 원전에서 직접 입수했거나 아니면 개연성은 크지만 일생 동안 자신의 전교여행과 사건들에 대한 인상을 명확히 보존하려 했던 바오로의 입을 통해 얻었다는 것이다.

 

이 전교여행이 키프로스에서는 조용히 진행되었을 것이다. 대륙에서는 소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모험적이며 영웅적인 활동이 전개되었다. 소아시아와의 이 첫 번째 만남에서 젊은 마르코는 높은 산악지대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이동하는 데 따르는 피로로 압박감을 받았을까? 그를 위협하는 눈 쌓인 산정 또는 깊고 무시무시한 절벽이 있었을까? 여하튼 그는 되돌아갔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다른 동료 없이 높은 산을 올랐다. 산꼭대기에서 길을 헤매고 수많은 어려움을 만나면서 그들이 확실히 다시 생각해야만 했던 것은 바다로 여행하는 것이 훨씬 더 편안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마르코를 부러워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들은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현지 유대인의 반대로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찬”(사도 13,52)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별하였다. 또한 그 다음 도시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반대가 강하게 불타올랐다.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들과 한데 어울려 사도들을 학대하고 돌로 쳐죽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사도들은 이 낌새를 알아채고 리가오니아 지방에 있는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사도 14,5-6).

 

리스트라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헤르메스와 제우스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그 뒤 사도들을 계속 따라다니며 적개심을 품은 유대인들한테 자극받은 사람들은 바오로를 돌로 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그러나 제자들이 달려와 둘러서자 바오로는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났다(사도 14,19-20).

 

그러나 이 재난은 사도들을 낙담시키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성으로 돌아와서 신도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하였다(사도 14,22).

 

그리고 그들이 하선했던 같은 항구에서 배를 타고 출발지인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도착하자 그들은 온 교회 신도들을 모아 놓고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해주신 위대한 일들을, “특히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사도 14,27) 일을 이야기하였다.

 

이야기 속에서 바오로는 화환을 쓴 황소의 눈과 손에 돌을 들고 적개심을 품은 유대인, 즉 열광적인 우상숭배와 깊은 증오심 앞에 서있다. 그러나 이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바오로는 많은 이들이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소아시아 중심부에서 활기 넘치는 공동체로 만들었음을 보았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6년 12월호]

 


 

 

   

 

 


 

성화속의 성 바르나바(Barnabas) 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