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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6월 21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 1568-1591년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14.

축일 6월 21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St. Aloysius Gonzaga

Saint Aloysius Gonzaga (Jesuit)

San Luigi Gonzaga Religioso

신분: 수사, 신학생 / 활동연도: 1568-1591년

같은이름: 공사가, 알로이시우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또는 알로이시오)는 1568년 3월 9일 이탈리아 북부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의 후작 페란테(Ferrante Gonzaga)와 마르타 타나 산테나(Marta Tana Santena)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다소 야만적이고 부도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깊은 사랑으로 알로이시우스를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알로이시우스의 아버지는 그가 군인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가정 교사였던 피에르프란체스코(Pierfrancesco del Turco)는 알로이시우스의 영혼과 정신을 길러 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577년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Felipe II, 1556-1598)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는, 알로이시우스를 피렌체(Firenze)의 대공 프란치스코 데 메디치(Francesco de Medici) 궁의 시동(侍童)으로 보냈다.

 

2년 후인 1579년에 알로이시우스와 그의 동생 로돌포(Rodolfo)를 브레시아(Brescia) 지방 만토바(Mantova)로 옮겼다. 1581년 알로이시우스의 가족은 마드리드(Madrid)로 갔고, 알로이시우스는 펠리페 2세 궁정에서 왕자 돈 디에고(Don Diego)의 시동으로 지내면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왕자가 사망하자 1583년 8월 15일 알로이시우스는 예수회에 입회할 것을 결심하였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하며, 일단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아들을 설득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온갖 방법으로 알로이시우스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를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1585년 11월 2일 로마(Roma)에 있는 예수회에 입회한 성 알로이시우스는 밀라노(Milano)의 예수회 분원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만토바에서 수련을 받았다. 이듬해 2월 15일 아버지가 사망하여 잠시 집에 들러 모든 일을 정리하고 돌아온 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는 나폴리(Napoli)에 머물면서 형이상학을 공부하였고, 로마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다. 1587년 11월 25일 첫 서원을 한 뒤 곧바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를 가르치던 교수들 중에는 당시의 유명한 학자 바스케스(G. Vazquez, 1549-1604)가 있었으며, 훗날 성인이 된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9월 17일)가 알로이시우스의 영성지도 신부였다.

 

성 알로이시우스가 신학을 공부한 지 4년째 되던 1590년 도시 전체에는 흑사병이 퍼졌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병자들을 돌보던 알로이시우스는 이듬해 3월 초 이 병에 전염되어 6월 21일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성 이냐시오(Ignatius)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시중하고 분별력 있게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하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긍정적이고 관찰력이 탁월하였던 알로이시우스는 철학과 신학의 전 과목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어려서부터 정결을 지키며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고, 어떠한 반대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특별히 정결에 대한 은사를 받은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악습들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자존심과 이기심을 이기기 위한 수련을 끊임없이 하였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162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12월 31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 후 3년 후 알로이시우스 성인은 젊은이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청소년의 수호성인

 

주님은 어디에서든지 성인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 심지어는 잔인하고 타락한 문예 부흥기의 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플로렌스는 "사기, 살인, 독살, 음탕이 난무하는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알로이시오 곤자가에게는 "신심의 어머니"가 되었다. 왕족의 아들인 그는 왕궁과 군사 훈련장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알로이시오가 영웅적인 군인이 되기를 원했다.

 

알로이시오는 일곱 살에 심오한 영적 자극을 체험했다. 그는 마리아의 성무일도, 시편 기도 외에도 신심 기도를 바쳤다. 그는 아홉 살에 고향인 카스틸리오네를 떠나 플로렌스에 와서 공부하게 되었으며 열한 살에는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일주일에 세 번씩 재를 지키는 등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부모와 오스트리아의 여왕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했으며, 필립 2세의 궁전에서 시동(侍童)으로 지냈다. 알로이시오는 궁중 생활을 보면 볼수록 그것을 외면하고 되었고 성인들의 생활을 공부함으로써 위안을 얻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체험에 관한 책을 읽고 난 그는 예수회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고 그의 결심은 스페인에서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고는 4년에 걸친 아버지와의 투쟁이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과 평신도들도 그를 "평범한 소명"에 머물러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으나 결국 그는 소원대로 가문을 계승할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예수회의 수련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다른 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종류의 고행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고행의 뜻과 본질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더 많이 먹어야 했고 다른 학생들과 오락을 즐기라는 강요를 받았으며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기도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철학 공부로 4년을 보냈으며 로베르토 벨라미노 성인을 그의 영적 지도자로 삼았다.

 

1591년에 전염병이 로마를 휩쓸었다. 예수회는 자체 병원을 개설했고 총장과 다른 많은 예수회 회원들이 직접 봉사에 나섰다. 알로이시오도 환자들을 씻기고 그들의 침대를 만들면서 간호했다. 그러다가 그만 그 자신이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회복된 뒤에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고 침대에서 쉽게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약해졌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며칠 후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그는 기도 생활의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그는 23세에 세상을 떠났다.

 

재를 지키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고독 속에서 기도하며 여자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성인으로 알려진 알로이시오는, 절제 생활이 축구 선수나 권투 선수들의 훈련장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따라서 성적 금기가 거의 무너져버린 듯한 요즘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수호자가 되기에 부적당한 것 같다.

 

체중이 초과되고 냉온방 시설이 잘된 사회가 스스로 어떤 결핍을 감수할 수 있을까? 알로이시오가 그랬듯이 그럴 만한 이유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려는 이유는 기도로써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의 온 마음을 기울여 우리의 기도에 집중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모든 육적이고 지상적인 생각들은 지나가 버리게 합시다. 그때 우리 영혼에는 그 기도의 대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깃들이지 않도록 합시다."(성치프리치아노, "주님의 기도에 관하여" 31장)

 

(성바오로수도회 홈에서)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스페인의 필립 2세를 섬기고 있는 마르끼스 페란떼 까스티글리오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롬바르디의 가족 城에서 3월 9일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군인이 될 처지에 있었으나, 아주 어릴 적부터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1577년에 그는 공부하러 플로렌스로 가서, 만투아 공작의 궁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알로이시오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경험한 귀족 사회의 폭력과 방종에 크게 실망하였다.

 

그는 선교사가  되려는 열망으로 불탔다. 마침내 그가 16세 되던 해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결정하였다. 부친의 격노는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듯 했으나 드디어 그는 1585년, 로마의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모범적인 수련자였으며, 흑사병이 퍼지기 시작할 때까지는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는 듯 하였다. 예수회가 환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병원을 열자, 알로이시오는 너무나 열심히 일한 나머지 자신도 만성 열병에 걸려 끝내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는 성 로베르또 벨라르미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성인이 후일 그의 성덕을 증언하였다. 성 알로이시오의 자서전과 편지 및 영적인 저술들은 아주 독특하고 다른 시대와 사회 사람들에게도 매우 매력적이다.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교황 베네딕또 13세에 의하여 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비오 11세에 의해서는 가톨릭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부산교구 홈에서)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자기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Acta Sanctorum, Lunii, 5, 878)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 하리이다.

 

존경하올 어머니, 성령의 은총과 그 끊임없는 위로를 누리시길 빕니다. 어머니의 편지가 제 손에 닿았을 때 저는 아직도 죽은 이들의 땅인 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어머니, 이제 심혈을 기울여 산 이들의 나라에서 영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천국을 갈망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벌써 그 곳에 가 있고 싶었고 이미 그 곳으로 여행을 떠난 줄로 진정코 생각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란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도 저와 함께 무한한 기쁨을 가지셔야 합니다. 어머니의 은덕으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참된 행복을 보여 주셨고 또 그것을 잃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시어 온갖 두려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어머니, 바다만큼 깊고 또 끝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해 볼 때 제 정신은 그 광대함에 압도되고 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도 짧고 보잘 것 없는 저의 수고를 보시고 어떻게 저에게 영원한 안식이라는 보상을 주실 수 있는지, 또 이제까지 게을리 찾던 나를 천국의 무한한 행복으로 초대 하실는지, 또 그것을 얻으려고 그다지도 적은 눈물을 흘린 저에게 많은 고생과 눈물의 보상인 그 보화를 주시려 하실는지요!

 

존경하올 어머니, 이것을 거듭거듭 생각하시고, 주님 면전에서 살아 있고 이 세상에 있을 때보다 제 자신의 간구로써 어머니를 더 염려해 드리는 저를 어머니께서 죽은 사람인 듯 슬퍼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무한한 이 자비를 거스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의 이별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 우리 구원이신 주님과 결합하여 불사불멸의 끝없는 기쁨을 누리고 마음을 다 하여 주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생명을 잠시 동안 거두시는 것은 우리를 더 안전한 자리에 두시고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는 은총의 선물로 꾸며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존경하올 어머니, 어머니와 우리 온 가족이 제 죽음을 하느님의 기쁜 선물로 생각해 주십사고 간절히 희망하면서 이 모든 말씀을 드립니다. 제 희망의 성취인 그 항구를 향해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어머니께서 저를 친히 축복하시어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들로서 어머니께 바쳐야 하는 존경과 사랑을 더 확실히 보여 드릴 다른 방도가 없기에, 어머니께 기꺼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페나테 곤자가와 마르타 타나산테나의 아들이며 양친은 모두 여러 추기경과 교황을 배출한 고귀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페란테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영국 왕 헨리 8세가 주는 높은 지위를 사양했고, 그의 아내는 자선 사업에 전심했으며 아기를 가질 희망이 보이자 그 어느 때보다도 성서를 열심히 읽었다. 맏아들 알로이시오는 1568년 3월 9일 만토바 근처에 있는 카스틸리오네 성에서 태어났다.

 

알로이시오는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무척 사랑스럽고 얌전했다. 좀 큰 뒤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떤 으슥한 구석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고자 하는 소원밖에는 없었다. 아버지는 그를 군인으로 만들 생각으로, 네 살 때에 벌써 그 몸에 알맞은 군복과 무기를 장만해 주기까지 했다.

 

어떤 날 아버지는 알로이시오를 카살레 요새로 데리고 갔었는데, 알로이시오는 거기서 매우 재미있어 했고 심지어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그마한 야포(野砲)에 화약을 재기까지 했었다. 대포가 발사되자 모두들 영문(營門)에서 무슨 반란이나 일어난 줄 알았고 알로이시오는 알로이시오대로 포의 반동으로 인해 죽을 뻔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알로이시오는 병사들의 그 고상하지 못한 말투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튜니즈에 원정(遠征)을 가려고 배를 탄 후에 알로이시오는 집으로 돌아왔으며 1577년 원정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알로이시오와 그의 동생 로돌프를 플로렌스에 있는 프란치스코 1세의 궁정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알로이시오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의 표준어인 토스카 말을 배웠다. 그의 좋은 성적은 엘레오노라와 마리아 레메리치스 왕녀들에게 모범으로 인용되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에게서 발견한 결점, 즉 분노, 조급증, 불만 등을 쳐 이기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그는 아직 묵상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로사리오의 현의(玄義)에 대한 작은 책자를 읽은 덕택으로 천주의 성모께 대한 그의 정성이 더 커졌다. 그가 마리아의 종 수도회 성당에 있는 성모 영보성상 앞에서 종신 정결 서원을 올린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비록 손톱만한 유혹을 당한 일조차 없었으나, 그때부터 엄한 경계와 극기에 전심했다.

 

1579년 알로이시오는 아버지께 불려 만토바로 갔었는데, 그곳에서 신장병(腎臟病)의 초기 증세가 보였으므로 철저하게 음식물을 조심하여 병을 완전히 고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그로 인해 몹시 약해졌다. 몇 달 후에는 카스틸리오네로 가서 자기 영혼에 선익을 찾아냈던 단식재를 계속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며 묵상을 했다.

 

이러는 중에 성 베드로 가니시오의 '매일의 묵상'이라는 책과 '인도 통신'이라는 책을 우연히 읽게 되어 예수회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동안 알로이시오는 보로메오 추기경을 접대하게 되었는데, 이분이 7월 22일에 그에게 첫영성체를 시켜주셨다. 그가 다시 카살레에 가서 머무르는 동안, 군대에는 별 관심도 없이 고어연구(古語硏究)에 많은 진보를 보여, 특히 세네카와 폴리카르포 및 영성 작가들의 많은 작품을 읽었으며, 그와 동시에 카푸친회 수도원과 바르나바회에 대해 우러러보았다.

 

1581년 그는 다시 카스틸리오네로 돌아와 하루에 한 주먹의 음식 밖에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쇠사슬과 박차의 바퀴를 가지고 고신 극기를 했으며, 밤을 거의 기도로써 지냈고, 그때부터 두통을 앓기 시작한 것이 끝내 낫지 않았다. 만약에 알로이시오가 끊임없이 "내 하느님이여, 나를 인도해 주소서!"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던들 영적 지도자를 찾지 못하고 그릇된 신비주의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1581년 페란테 경이 스페인 왕의 시종장이 되자 알로이시오는 마드리드 왕궁에서 디에고 황태자의 선생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자기 연구, 그 중에도 특히 학술적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이 굴복한 후 그가 라틴어로 필립 2세를 치하한 연설문을 보면 그의 문학적 소양이 상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무술과 검도를 배우는 시간이 되면 아버지의 꾸중을 무릅쓰고라도 살짝 빠져나갔는데, 그것을 보면 순명이 그때 알로이시오의 으뜸가는 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라나다의 루수의 저서를 읽고, 또 한 시간씩이나 아무 분심없이 묵상을 계속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하기에는 서너 시간 동안 투쟁을 해야만 했다. 만토바에서 세속을 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던 알로이시오는 디에고 왕자의 죽음으로 한층 더 세속을 경멸하게 되었다.

 

알로이시오는 처음에 카푸친 수도회와 또 개혁할 단계에 있는 오랜 수도회에 들어갈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그때 초창기의 비약적인 열성을 보여 주던 예수회를 택하게 되었다. 그가 예수회로 마음이 끌린 것은 특히 청소년 교육과 외교인의 귀화라는 그의 취미가 있어서였다. 뿐만 아니라 이 수도회에 들어가야만 나중에 아무런 고위 성직도 맡지 않게 되리라고 확신한 까닭이기도 했다. 이 사정을 알자 아버지는 우선 격노했고 시일을 좀 끌기 위해서 만토봐, 페라라, 팔마, 토리노 등지의 궁정을 구경시켰으니 그것이 1584년의 일이었다.

 

여러 주교들이 그를 재속 성직자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혹은 그의 영토를 다스리는 것이 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설복시키고자 했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피가 나도록 편태하는 것을 문틈으로 엿보고 또 예수회 신부 한 분을 시켜 한 시간 동안이나 그의 성소에 대해 꼬치꼬치 여러 가지를 물어본 후 마침내 그 수도회에 들어가는데 동의를 했다.

 

수도원으로 떠나기 전에 알로이시오는 아버지의 일 때문에 7,8개월을 밀라노에 머물면서 그동안 철학 공부를 계속 했다. 1585년 7월에는 만토봐에서 성 이냐시오의 수련을 했고, 11월 2일에는 동생 로돌프에게 자기 공작령(公爵領)을 양도한다는 증서에 서명하고 4일에는 로마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로렛다에 들러 자기를 낳을 때에 어머니가 하신 그의 청원기는 단축되었으니, 그것은 벌써 그의 성소가 얼마나 성실했는지의 증거가 역력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석 달 후에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들에게 대한 하느님 뜻을 반대한 것을 뉘우치며 뛰어난 신심을 보여 주며 선종했다. 알로이시오는 크나큰 설움을 맛보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이 이렇게 고운 것을 기쁘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카스틸리오네를 떠난 후로 알로이시오가 자기 가족을 생각한 것은 오직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는 또한 자기가 고귀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고, 특히 보조 수사들과 즐거이 사귀었으며, 다 낡은 옷에 전대를 메고 자선을 청하러 나가기를 즐겨했다. 그가 천신론(天神論)이라는 책명으로 알려진 묵상 책을 쓴 것이 이때였다.

 

1586년 10월 27일, 그는 수련장과 함께 나폴리로 떠났다. 그러나 단독(丹毒)과 열병이 도는 바람에 그는 다음해 5월에 예수회의 로마 학교로 다시 파견되었고 거기서 1857년 11월 25일에 첫 서원을 발했다. 그는 스콜라 철학자가 되어 공개된 장소에서 철학논문을 증명하고 신학 연구를 시작했다. 토론에 있어서 그는 언제나 힘차게 그러나 절제 있게 자기 의견을 주장했으며 남의 말을 중단하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1588년 2월과 3월에는 소품을 받고 더욱 더 순명의 덕을 닦는데 힘썼는데 이는 누가 그에게 자기의 외부적 극기에 대한 열의에 반대하는 때에는 언제나 항거하는 경향이 현저했던 까닭이다.

 

1589년 9월에 알로이시오는 총장 신부의 명령을 받고 자기 동생 로돌프와 만토봐 공작 사이에 일어난 솔페이노 성 쟁의(爭議)를 중재하기 위해 카스틸리오네로 갔다. 그는 특히 공작의 관대한 마음에 호소해 예수의 사랑을 위해 로돌프와 화해하기를 청했다. 그는 또한 악한 표양이 되었던 자기 동생의 비밀결혼을 우호적으로 승인하게 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런 다음 밀라노의 예수회 수도원으로 갔고 거기에서 자기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나리라는 묵시를 받았다. 그는 자기의 수도 생활의 요람이었던 로마를 다시 보았으면 하는 소원을 가졌었는데 마침 총장 신부가 그곳으로 불러들여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시에나에서 수도회 학생들에게 강연을 해 달라는 청을 받고 알로이시오는 "너희들은 말을 듣지만 말고 오직 행하는 자가 되라"는 구절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로마에 돌아와서는 주교들의 청으로 여러 주교직의 책무에 대해 연설을 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더 굳게 하기 위해,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독언집(獨言集)과 성 베르나르도가 쓰신 아가(雅歌)해석과 제노아의 성녀 카타리나 전기를 읽었다.

 

그리고 특히 1590년과 1591년에 걸쳐 엄습했던 기아와 흑사병 때에 이웃을 사랑하는 덕을 밝히 드러내어, 그는 처음에 성 식스토 병원에서 봉사하다가 다음에는 위로의 성모 마리아 병원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도중에서 흑사병 환자를 만나 등에 업고 가다가 자기 자신이 병에 전염되어 돌아왔다. 그것이 3월 3일 이었다. 그는 석 달 동안을 병고에 시달리다가 하루는 밤새도록 일종의 탈혼 상태가 계속되는 중에 성체 축일 팔일 축제 내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해의 성체 축일 팔일 축제는 6월에 있었다.

 

그러나 팔일 축일이 다가오자 병세가 오히려 나아지는 것 같아 보여서 그의 고해 신부인 벨라르민 신부까지도 그 날 밤 그의 곁에 있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리하여 그가 밤 열 시와 열 한 시 사이에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에는 다른 신부 두부노가 간호원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성인의 유해는 성모 영보 성당 지하실에 매장되었는데, 7년 후에 티베르가의 홍수로 인해 유해의 분배를 행했다. 나머지 유해는 같은 성당에 딸린 한 경당에 모셨다가 여러 번 옮겨 모셨고 나중에는 성모 영보 성당 자리에 새로 지은 성 이냐시오 성당에 모셨다.

 

시복은 바오로 5세 교황 때인 1605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이 1726년 4월 26일에 결정하고 같은 해 12월 31일에 선포했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1725년 6월 21일에 청소년의 주보로 결정되었는데, 이 칭호는 그 후 여러 번 확인 되었고 마지막으로는 1926년 6월 13일 비오 11세 교황이 재확인했다.

 

 (대구대교구 홈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Ad Majorem Dei Gloriam)"

주님 안의 벗들 예수회의 창설자 성 이냐시오의 영성

 

 

모든 수도 공동체는 고유한 은혜를 지닌다.

 

교회의 신비에 보편적으로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예수회에 보다 더 본질적으로 고유한 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도적 봉사를 위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동지애' 혹은 '동반자의 삶'이고, '주님 안의 벗들'이 되는 체험이 예수회 창립의 기초를 이룬다.

 

'예수회'(Compa a de Jesus, 직역하면 '예수의 동반자')라는 명칭이 지시하듯 동반자로서의 삶이 예수회의 근원적 특은이다. 그러므로 이 "동반자"의 은혜를 보다 더 깊이 이해할 때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을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성인의 첫 동료들이 지녔던 내적 태도와 영적 여정을 따라가면서, 성 이냐시오 영성의 두 결정적 지표들, 즉 라 스또르따의 체험과 까르도네르 강가의 체험을 중심으로 예수회에 전수된 특은을 살펴보겠다.

 

이냐시오는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바르셀로나, 알카라, 살라망카에서 공부하면서 이미 동지들을 찾고 있었다. 그때 만난 동지들과의 관계는 끝까지 계속되지 않았지만, 후에 파리에서 그의 고유한 인품, 즉 친절함, 영성지도자로서의 탁월함, 하느님께 대한 봉사의 열정, 앞을 내다보는 식견 등에 감명 받는 여섯 명의 20대 젊은이들이 모였다: 삐에르 파브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시몬 로드리게즈, 디에고 라이네즈, 알퐁소 살메론, 니꼴라스 보바디야.

 

1534년 8월 15일 성모승천 축일에 몽 마르뜨르의 한 작은 경당에서 그 당시 이미 사제였던 파브르가 미사를 집전하고, 미사 중에 일곱 명의 동지들은 청빈과 정결의 개별적 서원을 발하고 예루살렘을 순례하기로 서약한다. 그 이듬해에 이냐시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동지들을 파브르에게 맡기고 휴양을 위해 고향을 방문한다.

 

그 동안 파브르는 세 명의 동지들을 더 받아들인다: 끌로드 제이, 파샤스 브뢰트, 쟝 꼬뒤르. 이들 열 명이 예수회를 창립한 장본인들이다. 그러므로 동반자로서의 은혜는 이들이 파리에서 머물던 시절에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라이네즈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일주에 한번씩 동지들의 하숙방에서 돌아가면서 만났는데 이 모임은 형제적 사랑의 공동체였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주 만나면서 이들은 서로 "주님 안의 벗들"이 된 것이다.

 

이때 이들은 결코 어떤 수도회를 창립하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 안에서 친구들로서의 정을 나누며 지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동반자'의 은혜가 예수회에 특은으로 전수된다. 이들은 1537년 1월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위해 베네치아에서 함께 만났고, 그 후 로마에 가서 2년 동안 여러 사도적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대단한 열정으로 사도적 활동을 전개했는데 길거리에서 설교하고 성사를 집행하며 여러 곳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병원 등의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하면서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추위 등의 어려움 속에서 가난하고 고생하는 이들을 위한 활동을 펴나갔다. 이러한 사도적 활동은 그들 서로 간에 공감대를 더 깊이 형성해주었고 형제적 유대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면서, 그리스도교의 영성사에서 아주 독특하고 눈부신 우정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바로 주님 안에서 서로 벗들이 된 것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한데 엮어져 사도적 활동에 헌신하기 위해 교황의 권위와 이냐시오의 고유한 영도력 아래 뭉쳐진 우정 어린 사제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교회의 필요에 따라 교황께서 자신들을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를 위해 세상 어디에나 파견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권위에 자신들의 의지를 내 맡겼고, 교황께서는 그들과 함께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보시고, 또 유럽의 각지에서 오는 요청에 따라 이들을 여기저기에 파견하셨다. 이렇게 서로 흩어지는 상황에서 이들 사이에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주님 안의 벗들'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들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공동으로 식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모으시고 일치시킨 것을 우리가 갈라서는 안된다."는 자각과 더불어 1539년 3월 중순부터 6월 24일까지 함께 모여 소위 말해 '사도적 공동식별'의 기초를 이루는 [첫 사부들의 식별(Deliberatio primorum Patrum)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도적 활동에 투신하는 수도회를 창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예수회홈에서 http://www.jesuits.or.kr)

 


 

Dedication to Jesus

 

Dedication to Jesus

Lord Jesus Christ, take all my freedom, my memory, my understanding, and my will.

All that I have and cherish you have given me.

I surrender it all to be guided by your will.

Your grace and your love and wealth are enough for me.

Give me these,

Lord Jesus, and I ask for nothing more. Amen.

 

- St Ignatius Loyola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와, 저에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도로 바치나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오니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주관하소서.

저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허락하소서.

저는 이것으로 만족 하리이다. 아멘.

 

-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봉헌기도 -

 


 

 

[금주의 성인]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St. Aloysius Gonzaga, 6월 21일)

 

병의 고통을 축복으로 받아들여

가족 반대에도 수도자의 길, 봉사 중 전염병에 걸려

 

 

 

1568~1591. 이탈리아 출생 및 선종. 청소년들의 수호성인.

 

부유한 귀족집안에서 태어난 성 알로이시오는 아버지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랐습니다. 성인 아버지는 아들이 군인이 돼 명성을 떨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성인의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10살이 되기도 전에 성소에 눈 뜬 성인은 9살 때 스스로 순결서약을 했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바치고 규칙적으로 단식을 하는 등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또 예수회의 인도 선교 활약을 다룬 책을 읽으면서 선교사가 될 것을 꿈꿨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느님을 깊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일찍부터 교리와 신학, 철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성인이 가족들에게 수도자가 되고 싶다고 밝혔지만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수도자가 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도구로 꼭 써줄 것이라 믿었던 성인은 때가 되길 묵묵히 기다리며 신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또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선교사의 꿈도 키워나갔습니다. 성인의 한결같은 생활과 태도에 가족들도 결국 성인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인은 예수회에 입회해 정식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미 수도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해온 터라 수련생활과 평소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성인은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성인은 몸이 아플수록 정신은 더 맑고 또렷해지는 것을 느끼며 병의 고통을 축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시간이 나면 틈나는 대로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성인은 당시 유행하던 흑사병에 전염되고 말았습니다. 성인은 첫 서원을 한 지 4년 만에 숨을 거뒀고 1726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교황은 3년 뒤 성인을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성인 유해는 현재 로마 성 이냐시오성당에 안치돼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19일, 박수정 기자]

 


 

 

[성인들의 발자취]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청소년의 수호자 - 축일은 6월 21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1568년 3월 9일 '가스띨리오네' 성에서 페란테 후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 이미 정결 허원을 올렸던 그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으로부터 첫 성체를 영했다.

 

아버지가 스페인 왕의 시종장이 되자 알로이시오는 '마드리드' 왕궁에서 왕자의 시종이 되었으며 교육도 그 곳에서 받게 됐다. 그러나 현세의 재산ㆍ명예 등에 관심이 없이 정결한 마음을 가졌던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기보다는 사제가 되기를 더욱 열망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고자 원했던 그의 어머니는 이것을 기쁘게 생각했지만 아들을 군인으로 만들려고 생각했던 그의 아버지는 계속 이를 반대하다가 3년 후에 비로소 허락했다.

 

알로이시오는 1585년 11월 25일 예수회에 입회했고 2년 후에 허원했다. 그는 결코 재속 성직자가 될 것을 원치 않았으며 순명의 덕을 쌓기에 힘쓰는 한편 철학과 신학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이 '로마'에까지 휩쓸자 그는 전염병자를 돕기 위해 자원했는데 환자에게 봉사하던 도중 자신이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3개월 동안 병고에 시달리다가 하루는 밤새도록 일종의 탈혼 상태가 계속되는 중에 성체 축일 팔부날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십자고상을 응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다가 그는 결국 23세의 한창 피어날 나이에 선종했다. 청소년의 수호성인인 알로이시오 곤자가의 축일은 6월 21일이다.

 

[가톨릭신문, 1982년 6월 20일]

 


 

 

청소년들의 수호성인 알로이시오 곤자가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1568년 3월 9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의 카스틸리오네 성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플로렌스(피렌체)로 유학하여 라틴어와 이탈리아의 표준어인 토스카 말을 배웠고, 그 성적은 아주 훌륭하였다. 열한 살에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일주일에 세 번씩 단식을 하는 등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알로이시오는 자신에게서 발견한 결점, 곧 분노와 조급증 그리고 불만 등을 이겨내고자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체험에 관한 책을 읽고 알로이시오는 예수회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수회는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하며 청소년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런 점이 알로이시오의 마음을 끌어당겼으나, 아들이 영웅적인 군인이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는 격노하였다. 1585년, 아버지의 분노도 가라앉고 마침내 예수회에 입회한 알로이시오는 스콜라 철학자가 되어 공개된 장소에서 철학 논문을 증명하고 신학을 연구하였다. 토론을 할 때면 언제나 힘차고 절제 있게 자기 의견을 주장하였다.

 

1590년과 1591년에 걸쳐 유럽에는 기아와 흑사병이 돌았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씻기고 간호하던 알로이시오는 흑사병 환자를 업고 가다가 그만 병에 전염되었다. 그 뒤로 석 달 동안 병고에 시달리던 그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팔일 축제 내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적으로는 금욕과 극기 생활을 철저히 지켰으며, 외적으로는 병원과 감옥을 자주 방문하여 성덕을 쌓은 알로이시오는 1591년 6월 21일, 스물세 살의 어린 나이에 하느님 품에 안긴다. 성인의 축일은 6월 21일.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그를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으며, 비오 11세 교황이 이를 재확인하였다.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절제와 극기 그리고 금욕적인 삶을 살다 간 알로이시오 성인. 물질의 풍요를 구가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헛헛한 삶을 산다는 느낌이 들 때면 알로이시오 성인의 삶을 묵상하고자 삶에서 한 발 비켜나 볼 일이다.

 

[경향잡지, 2006년 5월호]

 


 

 

 

 

 


 

성화속의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