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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6월 25일 성 굴리엘모(Gulielmus) / 1085-1142년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18.

축일 6월 25일 성 굴리엘모(Gulielmus)

St. Gulielmus Abbas

San Guglielmo di Montevergine (da Vercelli) Abate

신분: 은수자, 수도원장

활동연도: 1085-1142년

같은이름: 굴리엘무스

 

 

성 굴리엘모(Gulielmus)

 

1085년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베르첼리(Vercelli)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굴리엘무스(또는 굴리엘모)는 어릴 때 양친을 여의고 경건한 친척의 집에서 자랐다. 그는 14세 때에 일생 동안 고행의 생활을 할 뜻을 하느님께 약속하고 성 야고보(Jacobus, 7월 25일) 사도의 묘지가 있는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순례하였다.

 

그 후 팔레스티나 성지를 순례한 그는 이탈리아에 돌아와서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의 수도 규칙에 따라 온전히 세속을 떠나 적막 속에서 기도와 고행에 매진하는 은수자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몬테 비르지니아노(Monte Virginiano) 산을 동정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몬테 비르지네(Monte Virgine)라고 개칭하고 성모님께 봉헌한 성당을 건축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경건하고 엄격한 생활을 하던 그는 1142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성 굴리엘모 아빠스

 

굴리엘모는 '의지와 보호'란 뜻이다. 유럽에서 최초로 번성한 수도원은 5세기에 창립된 성 베네딕토 수도회인데 하느님께서는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수도 정신이 헤이해진 경향이 보이자 성 로베르토, 성 베르나르도, 성 브루노 등 수도원 개혁자들과 또는 새로운 수도원의 창립자들을 보내시어 그들로 하여금 수도 생활의 쇄신을 도모하게 하셨다.

 

베네딕토회 은수자 수도원을 창립한 성 굴리엘모도 역시 이러한 일에 선택되신 분들 중의 한 분이시다. 그는 1085년 이탈리아의 비에몬드에서 가까운 베르첼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적에 일찍이도 양친을 여의어 경건한 친척 손에서 자라 신심에 비상한 열심을 표시했다. 그 일면을 본다면 겨우 14세로서 일생동안 고행의 생활을 할 뜻을 하느님께 약속하고 나이도 아직 어린 몸으로 멀리 성 야고보 사도의 묘지가 있는 스페인의 콤포스텔라까지 순례의 길을 떠났다는 사실로 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순례 도중 그는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실행해 쇠로 된 허리띠를 매고 맨발로 걸으며 음식물은 모두 자비심이 많은 사람에게 구걸했다.

 

이탈리아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소경이 된 어느 농부를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하느님께 기도하자 그 즉시 농부는 눈을 떴다고 한다. 그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부근 일애에 높아져 그는 이를 귀찮게 생각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피하기 위해 광야에 들어가 그곳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며 즐겁게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으나 이전부터의 희망이었던 팔레스티나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성지에 도착해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의 말구유, 나자렛에 있는 검소한 성가정의 가옥 등 주님의 수많은 지취들, 그중에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구원의 대사업을 완수하신 골고타의 언덕을 직접 눈으로 보고 묵상해 그의 신앙은 더욱더 견고해지고 수덕에 대한 열심은 점점 더 증가 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산적을 만났다. 모든 것을 잃고 가혹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 재난도 성지에서 얻은 거룩한 감동과 기쁨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굴리엘모는 더 한층 하느님께 직접 계시를 받고 성 베네딕토의 규율하에 온전히 세속을 떠나 적막 속에서 기도와 고행에 매진하는 은수자 수도원을 창립하기로 했다.

 

그는 이것을 위해 남부 이탈리아의 아베리노 시에서 가까운 몬테 비르지니아노라는 산 위에 이미 제자가 된 수명의 사제들과 각각 조그마한 초막을 장만하는 동시에 이교의 시인 비르지니오를 따라 지은 산 이름을 동정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몬테비르지네(Monte Virgine)라고 개칭하고 성모님께 봉헌한 성당에 건축했다.

 

굴리엘모와 그의 동료들의 경건하고도 엄격한 생활은 시작됐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사람, 혹은 그 성스러운 생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누구나 감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수도원의 평판이 널리 퍼짐에 따라 입회자도 점점 늘어나 굴리엘모는 여러 차례 다른 깊은 산이나 광야 들에 수도원을 세워 열심한 수도자들을 돌봐주었다.

 

당시 시칠리아의 사람들은 신앙에 냉랭하고 향락을 즐겨 영적 상태는 매우 한심했다. 그래서 그들의 왕 로제리오 2세는 예의를 갖추고 굴리엘모를 초대해 신앙 생활의 쇄신에 대해 의뢰했다. 그의노력은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를 언짢게 여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인을 죄에 떨어뜨리려고 미모의 창녀를 보내 그의 정결을 빼앗으려고 했다.

 

굴리엘모는 처음부터 그를 쳐다보지 않았으나 창녀의 유혹이 점점 심해져  그는 타고있는 장작불 위에 누워 버렸다. 창녀는 대경 실색했다. 그뿐 아니라 불 속에서 나온 그의 몸에 티끌 만한 상처도 없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자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통회하여 다시는 죄의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완덕의 절정에 도달하고 여러 가지의 기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굴리엘모는 1142년 6월 25일 본 고향, 천국을 향해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성스러운 유해는 손수 건립한 굴레도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대구대교구 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