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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9월 20일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성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19.

축일 9월 20일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성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Sts. 103 Martyres Coreae) - 문학진 토마스 作

 

한국에는 18세기 말경에 처음으로 몇몇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신앙이 들어왔다. 1784년 북경에서 영세한 첫 한국인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앙을 실천하였으니 이는 교회사에 전무 후무한 일이다. 초기부터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겪어야 했고 박해는 100년 이상 계속되어 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냈다. 초기 50년간에는 중국인 사제 두 분의 짧은 사목 활동이 있었을 뿐 1836년에 프랑스에서 선교사들이 몰래 입국할 때까지는 사목자 없이 평신도들만이 용감하고 열심한 신자 공동체를 지도하고 길러 냈었다.

 

이 공동체 속에서 1839년, 1846년,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103명이 성인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들 중 열심한 사목자였던 최초의 사제 안드레아 김대건과 훌륭한 평신도 바오로 정하상이 대표적 인물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w) 사제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21-1846년

축일: 7월 5일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 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 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김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 프란치스코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 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 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우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교의 명에 따라 황해도 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남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최초의 신학 유학생

 

조선조 헌종 2년(1836년) 섣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열 명 가량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그 일행 가운데는 15세 전후의 세 소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때 조선엔 잠입하여 활동하던 프랑스인 모방(Maubant) 신부한테 뽑혀 머나먼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는 중이었다. 그들 세 명이 바로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였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음으로 모방 신부 자신이 숨어 다녀야 하는 처지였고, 따라서 어떠한 교육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신부들과 상의한 끝에 어린 소년들을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이 낳은 최초의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25년이란 짧은 기간이었고, 더욱이 사제로서 생활한 시간은 겨우 1년 남짓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오히려 최초의 신학 유학생으로서, 그리고 쇄국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입국로를 찾는 고난의 여행자로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의 유명한 천주교 집안에서 김제준과 고 우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무렵, 그는 조부 김택현과 양친을 따라 용인 땅 한덕골을 거쳐 골배마실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이미 그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천주교 신자로 체포되어 옥사하였고, 을해박해(1815년) 때는 그의 증조모마저 참수되었으므로 더 이상 고향에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여행한 조선의 한양에서 중국의 남단 마카오까지는 9천리 남짓,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들만이 국경 통과가 허용되던 조선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먼 여행이었다. 그러나 조선을 떠난 소년 김대건은 동료들과 함께 중국인 신자들의 인도로 1837년 6월 7일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마카오의 신학교 생활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839년 4월에는 그곳의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조차 좋지 않았다. 1839년에는 기해박해가 일어나 교회지도자들과 많은 신자들이 죽었고, 모방신부도 새남터(현 용산 전철역 부근)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게 된 것이다.

 

입국로를 찾는 고난의 여행자

 

김대건의 신학교 생활을 5년 만에 끝을 맞게 되었다 1842년 2월 아편전쟁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는 세실 함장이 이끄는 함선 두 척을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여기에 김대건과 최양업이 통역으로 승선하게 된 때문이다. 프랑스 신부들은 이것이 조선에 입국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를 이용한 조선 입국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김대건이 탄 에리곤호가 마닐라와 대만을 거쳐 넉 달 뒤 중국 오송구(吳松口)에 도착했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세실 함장이 북상을 포기한 결과였다.

 

조선 입국을 바라던 김대건 일행은 그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김대건 일행은 스스로 입국로를 찾기로 결정하고, 잠시 머무르던 상해를 떠나 요동으로 향해 나아갔다. 이때부터 김대건의 모험은 시작되었다. 조선 입국때까지 2년 3개월여에 걸쳐 이루어진 이 모험으로 그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의지와 대담성이 더욱 강해졌으나, 뱃길 1만리, 육로 7천리의 길은 끝없는 고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요동 당 백가점(百家店)에 머물던 김대건은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조선 국경을 향해 나아갔다. 만주교구장이던 배롤 주교조차 조서 입국의 위험성을 설명하며 이 모험을 말렸지만, 억압받는 조선 신자들을 구제해야 하겠다는 일념을 단념시킬 수는 없었다.

 

김대건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 마리아의 도움에 맡기고 있었다. 이후 김대건은 1842년 말과 이듬해 3월 과 9월, 세차례에 걸쳐 의주 변문(邊門)을 탐색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김 프란치스코라는 조선 교회의 밀사를 만날 수 있었고, 한때 조선 땅을 밟기도 하였다. 또 1844년부터는 동북쭉 국경을 통한 입국로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두만강을 넘는 길이 변문 쪽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는 만주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되돌아가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페레올(Fereol)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여행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마음대로 조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며칠을 지내는 길손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얼마나 잘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조국 땅을 밟는 것은 잠깐 동안, 그것도 중국사람 즉 외국인의 자격으로밖에 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인류라는 공통체가 형제 같은 입맞춤을 하며 하느님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속에서 포옹할 날이 언제 오게 될지."

 

1844년 12월,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한데 장래가 촉망되는 신학생으로 인정을 받아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김대건은 서둘러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들어가고자 했다. 조선의 신자들에 따르면 12월말이 조선 입국에 가장 적당한 시기였고, 또 김 프란치스코라는 신자가 그들을 맞이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해박해 이후 더욱 엄중해진 변문의 경계로 인해 서양 사람인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들어갈 수 없었고, 김대건 부제만이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따라 변문을 통과하였다.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입국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다시 한양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지난 8년 동안 그리던 귀국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조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시와 박해의 위험뿐이었다.

 

한양에 도착한 즉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지시대로 앞으로 전교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신학생 선발, 조선 지도의 작성,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 안전한 가옥 매입 등이 짧은 기간에 그가 해낸 일이다. 여기에서 조선과 상해를 잇는 해로를 찾아내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들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마침내 귀국하고 석 달쯤 되어 상해로 출발하는 배에 오르게 되었다.

 

사제서품과 영원한 귀향

 

조선을 떠난 지 한 달 남짓한 어려운 항해 끝에 김대건 일행은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와 새로 중국에 들어온 다블뤼(Daveluy) 신부를 만나 다시 조선에 입국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인 1845년 8월 17일, 김대건 부제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조국을 떠나면서 간직해 왔던 꿈을 마침내 이루게 된다. 이날 상해 부근의 금가항(金家港)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을 사제로 서품하였다. 이로써 김대건 소년은 조국을 떠난 지 8년 8개월 만에 한국 최초의 성직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이것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고난을 예고하는 것이고 조선입국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상해를 떠난 지 40여 일 만인 10월 12일에 조선에 상륙할 수 있었다. 도중에 그들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기도 했지만, '라파엘호'는 마침내 강경부근의 황산포(黃山浦)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라파엘은 곧 여행자들의 주보(主保)로 존경을 받는 대천사의 이름이다.

 

조선에 다시 입국한 김대건 신부는 다음해 4월까지 서울과 용인 지방을 다니며 전교하였고, 여기에서 홀로된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다. 이어 그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새 입국로 개척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임무가 되고 말았다. 서울의 마포를 떠난 그의 일행이 연평도와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 관헌들이 그를 체포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이후 서울로 압송되어 3개월 여의 옥중생활과 문초 끝에,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피로써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한 김대건 신부는 진정한 조선인 성직자였다. 그는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곧 억압받는 조선인들을 하느님의 품안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갖가지 모험, 오랜 역경을 스스로 받아들였고, 또 그것들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 그는 조국을 등지고 종교의 자유를 원한 것은 아니었으며, 언제나 조국 안에서 전교활동을 원하고 있었다. 옥중에서 그가 조선 교우들에게 남긴 다음의 한마디가 바로 이와 같은 의자(義子)로서 용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한가지로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경향잡지, 1996년 7월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윤 클레멘트 신부 -

  

 

한국 최초의 사제(司祭), 처음 서양학문 유학자, 조선의 문호개방과 종교자유가 민족발전에 유익하다고 역설한 선각자, 짧은 기간이었어도 탁월했던 목자(牧者), 신덕(信德)과 용덕(勇德)의 겸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그는 1821년 8월 21일에 충남 당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846년 9월 16일에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한 떨기 무궁화 되어 순교하였다.

 

어릴 적부터 비상한 재주, 굳센 성격, 진실한 신심이 드러났던 그는 1836년에 모방 신부의 주선으로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중에 1837년 8월과 1839년 4월에 두 번이나 일어난 마카오의 민란으로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로 피난하기도 한다. 롤롬보이에는 그가 나무 아래서 부모님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망고나무가 지금도 서 있다. 1844년 12월에 부제품을 받은 그는 1845년 1월에 죽을 고비를 겪으며 압록강을 거쳐 일시 귀국하지만, 전교(傳敎)신부의 영입을 위해 다시 상해로 간다. 1845년 8월 17일에 상해에서 20-30리 떨어진 긴가항(금가항 金家港) 성당에서 강남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서품을 받았다.

 

 

그는 서품된 바로 그 달 8월 31일에 페레올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 9월 28일에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류하다 표착, 그리고 10월 12일에 강경 황산포에서 3km 떨어진 한적한 곳이던 익산 나바위에 그리워하던 조국 조선에 사제(司祭)되어 입국한다. 그는 입국 후,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골배마실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그가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택받았던 은이 공소(조선 최초의 본당)에 사목거점을 두고 목자 잃은 양과도 같던 전국의 조선신자들을 불철주야(不撤晝夜) 돌본다.

 

그는 조선 교우들을 위한 사목활동 중에서도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는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로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5월 14일에 마포를 출발, 5월 25일에 연평도에 도착, 등산진을 거쳐 마합포 앞마다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중국 어선을 통해 선교사들에게 전하는 편지 6통과 지도 1장을 건네준다. 그리고 귀로에 오르던 6월 5일에는 순위도 앞바다에서 등산진 첨사에게 체포되어 해주 감영으로 이송된다. 6월 21일에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40여 차례의 신문을 받고 9월 15일에 국사범(國事犯)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다음날인 9월 16일에 장하고 태연하게 순교의 칼날을 받는다. 그는 사형장에서 사형선고문이 낭독되자 군중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나의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다. 천주를 위해 나는 죽어갑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얻고자 하시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그에게 서품을 준 순교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는 그의 인품에 대해 말했다.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랄만한 유창한 말솜씨는 대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활동과 당시 조선교회의 상황을 기록한, 하나의 하느님께의 봉헌록과 같은 25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특별히 옥중 고별서한은 눈물겹도록 감격적이다. “한반도 조선과 한국천주교회의 불멸의 별, 한국천주교회사에 우뚝 선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 우리 한반도의 통일과 당신의 빛나는 신앙의 후예인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 순교자

신분 신학생,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95-1839년

축일 9월 20일

 

 

성 정하상 바오로(Paulus)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며, 1801년에 그의 맏아들 정철상 카롤루스와 함께 순교하였고, 어머니 유 체칠리아는 1839년 11월 순교하였다. 아버지가 순교할 때에 그는 겨우 일곱 살로 그의 모친과 누이 정 엘리사벳(Elisabeth)과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가산이 모두 몰수당하자 살길이 막연하여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 있던 그의 숙부인 정약용 요한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그러나 숙부가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 있던 때였으므로 외교인 친척들로부터 천대와 냉대를 받았지만,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웠다. 하지만 외교인들 틈바구니 속에서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조증이 바르바라(Barbara)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다.

 

그는 함경도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 유스티아누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성세와 견진과 성체 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한 분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그는 유진길, 조신철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다. 마침내 그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다.

 

앵베르 주교는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론이다. 그는 이 속에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바오로의 집에 달려들어 그와 노모 그리고 누이를 잡아 포도청에 압송하여 바오로와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상재상서를 포장대리에게 주니 사흘 후 문초를 시작하였다. 바오로는 무서운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나갔고 배교하라고 엄명하였으나 거절하자 옥에 가두었다. 며칠 뒤에 다시 끌려나와 톱질 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또한 그는 샤스탕과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고 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또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받았다. 그리하여 1839년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으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평신도의 모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생애

성직자 영입위해 중국 9차례 왕복, 조선교구 설정뒤 신학생 선발 주도

 

 

한국 103위 성인 중 평신도 대표인 정하상(1795∼1839·바오로)성인. 피비린내 나는 박해로 한국교회가 쓰러질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김대건과 최양업 등을 신학생으로 선발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는 등 교회 재건과 복음화에 진력했다.

 

1801년에 조선 팔도를 '천주학쟁이'의 피로 물들인 신유박해. 이제 막 움트려던 한국 천주교회는 '신유'의 칼날 앞에 무참히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천지의 유일한 성직자였던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고, 한국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단체인 '명도회' 회장 정약종을 비롯한 평신도 지도자들마저 순교하자 천주교인들은 잇따른 박해를 참지 못해 목자잃은 양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정약종의 아들 6살배기 정하상은 경기도 마재부락에 있는 큰 아버지 정약용의집에 숨어들어 어머니 유소사로부터 신앙을 몸으로 배워 익히며 조선 천주교회의 재건을 꿈꾼다. 그로부터 15년 후인 1816년. 꺼져가던 조선교회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 정하상이 내놓은 묘책은 '성직자 영입'. 즉, 목자 없이 고통만 당할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양떼를 돌볼 참목자를 모셔오자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현석문(가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의 도움을 받아 중국까지왕복 5000리(2000km) 길을 무려 9차례나 왕복하며 ‘성직자 영입’에 구슬땀을 흘렸지만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상 성직자 영입은 어렵게 됐다. 그러나 정하상은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교황에게 직접 청원서를 보내 성직자 파견 문제뿐 아니라 조선 천주교인의 영적 구원을 위한 적극적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비범함을 보였다.

 

 

"저희는 교황 성하께 두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합니다. 신부를 파견해 주시는 것이 저희들에게는 큰 은혜요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주고 장래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해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으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입니다."

 

결국 교황청은 1831년 조선교구를 공식적으로 설정하고, 3년후부터 유방제·모방·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천주교인들이 성사적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정하상의 말대로 단순한 성직자 영입은 교회 재건을 위한 근본대책이 될 수없었다. 조선인 사제를 양성해 교회의 초석을 놓는 것이 시급했다.

 

그래서 모방 신부는 조선에 도착한 즉시 신학생 선발에 착수하지만 생면부지의 조선 땅에서 누구를 뽑을 것인지 막막했다. 이때 앞에 나서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정하상이다. 천주교인들 사이에서 지도자역할을 했던 정하상은 평소 눈여겨 봐둔 소년 김대건·최양업·최방지거의 집에 모방 신부와 함께 찾아가 부모들에게 아들을 사제로 봉헌할 것을 권고한다.

 

"만일 당신의 아들을 서양에 보내어 천주교를 전습(傳習)하여 배우게 하면 10여년후면 다시 본국에 나와 모방 신부와 같은 사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하상은 이 말을 자신에게도 적용해 신학생의 길을 걷는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던 앵베르 주교가 정하상의 순교적 열정과 교리에 대한 해박한 이해, 그리고 굳센 믿음에 탄복해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물론 정하상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함으로써 사제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말로만 성직자의 필요성을 외치지 않고 성직자 발굴에 직접 뛰어들고 또 죽음을 무릅쓴 채 그 자신도 사제의 길을 가려했던 점은 말과 행동,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보여주는 참신앙인의 모범이었다.

 

1816년부터 1839년 기해박해까지 20여년을 조선 천주교회의 부흥을 위해 전력한 정하상은 서양 선교사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살며 비서의 역할을 하는 등 성직자를 보좌, 자문하는 평신도의 직무에도 충실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천주교인들은 그를 '장상'처럼 여기며 존경했고, 수많은 이들이 정하상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믿게 됐다. 심지어 김대건 성인의 부친 김제준은 자신이 회개한 동기가 정하상의 권고 덕분이었음을 고백하였다.

 

"저의 백부께서 일찍이 천주학을 배웠으므로 저도 역시 이를 믿다가 신유박해때 나라의 금령이 지엄하여 다시 학습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정하상이 제게 권하여 다시 배우게 하였으므로 저는 1년에 여러 차례 정하상의 집에 왕래하며 수계(受戒)하였습니다."

 

기해박해때 체포돼 피비린내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임금에게 박해의 부당함을 알리고 천주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상재상서(上宰上書)'를 제출한 정하상 성인. 그는 굳센 믿음의 생활로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증거한 평신도 중의 평신도다.

 

"대저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나타냄은 저희들이 해야할 본분입니다."('상재상서'본문 중에서)

 

[평화신문, 제553호(1999-11-14), 박주병 기자]

 


 

 

 

성 바오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 김남수 주교 편역)

 

종교도 어디서 왔거나 진정 거룩한 종교라면 어찌 이 나라 저 나라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천주께서 천지 만물을 만드신 목적은 우리에게 당신의 복을 내려 주시고, 당신의 착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을 만드시어 우리를 덮어 주시고 땅을 만드시어 그 위에 우리를 살게 하시고,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어 우리를 비추시고 초목과 금수와 금은동철을 우리가 향유하고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모태에서 태어나 장성할 때까지 가지가지 은혜가 이와 같이 한이 없으니, 인간의 마땅한 본분은 과연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먹고 입기만 한다면 인류를 내신 분의 은덕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버지가 집을 짓고 살림을 차려 아들에게 주어 쓰게 하였는데도 아들이 그 집에 살며 그 살림을 사용하면서도 제가 잘난 체하고, 부모를 섬기며 그 은덕에 보답할 도리와 근본을 모른다면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불효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주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고 돌보시며 인도하십니다. 굳이 죽은 후에 받을 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당장 지금 받고 있는 은혜가 극진하여 그분을 받들어 섬긴들 어찌 만 분의 일이나 보답한다 하겠습니까? 천주를 섬기는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려니와 은밀한 말을 들추어내거나 괴상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천주의 계명을 지키려는 것뿐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길다 해도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자기 이익만을 탐하여 얻지 못할 것을 얻으려 애쓰고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으려 걱정하는 사이에 어느덧 늙고 만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부귀공명도 반드시 허무로 돌아가고 맙니다. 부귀공명마저 일평생 애써도 얻지 못하는 것인데 이 헛된 꿈을 깨기가 그다지 어렵단 말입니까? 세상에 있을 때에 정신이 흐려져 깨닫지 못하다가 육신이 죽은 뒤에 뉘우친다 해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기에 목을 벨 도끼가 눈앞에 있고 몸을 삶을 가마솥이 제 뒤에 있어도 꿋꿋이 굽히지 않은 사람이 대대에 적지 않습니다. 이것도 참된 종교의 증거입니다.

 

교리의 참되고 거짓됨이나 사리의 바르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얼토당토아니한 말로써 공격하고 배척하고 있으니, 그저 외국의 종교라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금은 산지를 가리지 않고 순금이면 보배가 아니겠습니까? 종교도 어디서 왔거나 진정 거룩한 종교라면 어찌 이 나라 저 나라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수명을 감하고 바쳐서 천주교의 참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몸도 장차는 죽을 목숨이오니, 감히 말해야 할 이 시각을 만나 한 번 머리를 들고 길게 외치지 못하고 슬프게도 입을 다물고 죽어 버린다면 산같이 쌓인 회한을 장차 백 대 후세에 이르기까지 폭로할 길 없기에, 엎드려 청하오니, 지금 한 번 밝은 빛으로 굽어보시고, 도리가 참된지 거짓인지, 올바른지 그릇된지 자세히 판단한 다음, 위로는 정부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일변하여 바른길로 돌아와, 금명을 풀고 체포하는 법을 거두며,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제 고향에 돌아가 제 직업을 즐기면서 함께 평화를 누리게 해주시기를 천번 만번 바라고 또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