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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Ignatius)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7.

성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Ignatius)

축일 9월 20일

 

 

성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Ignatius, 탁희성 비오 작)

 

신      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96-1839년

같은이름: 김 이냐시오, 김이냐시오,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오, 이냐시우스

 

 

성 김제준 이냐시오는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Pius)의 손자이며, 1846년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부친이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의 박해로 시련을 당한 서민의 집에서 태어나 충청도 면천 솔뫼라는 산골에서 살았다. 그 후 내포의 솔뫼로 거처를 옮겨 새살림을 시작하고, 아내 우르술라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1846년에 참수를 당한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이다.

 

신심이 두터웠고 매사에 성실했던 그는 만사를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는 자세로 살았기 때문에, 아들이 전교 신부들에게 선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도, 온 가족이 당하게 될 무서운 형벌과 환난을 오로지 주님의 안배와 섭리에 맡기고 아들을 보냈다.

 

아들이 떠난 후 그는 관헌들의 추격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기해년 9월 중순 그의 사위의 인도를 받은 배교자 김여상이 포졸을 이끌고 그의 집으로 몰려왔다.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기운이 장사여서 대여섯 사람쯤은 해 치울 수 있었으나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포승을 받았다고 한다. 포도청으로 붙잡혀간 이냐시오는 사학을 신봉한다는 죄와 자기 아들 안드레아를 국법을 거슬러 조선을 떠나 마카오에 가게 하였다는 죄, 즉 국사범이라는 중죄를 가해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다. 그는 이러한 형벌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 배교하였다.

 

그러자 옥에 있는 신자들이 그의 죄가 대단히 크다는 것과 배교한대도 석방될 수 없다고 이야기해 주며, "석방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마십시오. 당신은 의심 없이 처형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려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재판관 앞에 나가 배교하겠다고 한 말을 취소하고 순교자로 세상을 마치도록 하십시오." 하고 거듭 권고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형조에 출두하여 배교한 것을 취소하니, 이어 세 차례나 혹형을 당하였지만 다시는 마음을 굽히지 아니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아들 김대건 신부의 장한 모습도 보지 못한 채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니 때는 1839년 9월 26일이요, 나이는 44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김제준 이냐시오

찰나의 흔들림 이기고 신앙 지켜

 

- 성 김제준 이냐시오

 

김대건 신부 아버지 … 은이공소 회장직도

큰 고통에 배교 택했다가 곧 반성하고 순교

 

최경환 성인이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라면, 김제준 성인은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다. 비록 사제직이라는 아들의 그림자에 가려져있는 아버지들이지만,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소중한 평신도의 모습을 간직한 이들이다.

 

각 성인들의 순교한 해를 살펴보면, 신앙선조의 가계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 신앙은 가문의 줄기를 타고 흘렀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역시 최경환 성인과 같은 해인 1839년, 기해년에 일어난 박해로 9월 26일 순교했다.

 

당시 회장직을 맡았던 김제준 성인은 할아버지 김진후와 작은 아버지 김종한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고 우르술라와 결혼해 아들 김대건을 낳았다.

 

김제준 성인은 한때 냉담상태에 있다가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만나 마음을 다잡았던 인물이다. 또 체포됐을 때는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다가 배교를 취소하고 순교하기도 했다. 찰나의 흔들림이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나약한 우리와 더욱 닮았고, 그의 삶의 덕행은 아들 김대건을 우리나라 첫 번째 사제로 만들었다.

 

김제준 성인은 아들을 외국으로 유학시켰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온 집안이 몰살될 줄 알면서도 아들을 마카오로 보낼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그는 1836년 초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던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성사를 받고 돌아와 더 열심히 수계했으며, 은이공소의 회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회장 활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이곳에서 그는 장남 김대건(당시 15세)을 신학생으로 만들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담대했으며, 신앙의 열정을 꽃피웠다.

 

1839년, 많은 신앙선조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기해박해가 일어난다. 김순성(김여상) 일당의 밀고로 체포된 김제준은 국사범으로 인정됐다. 회장직을 수행하고, 아들까지 유학을 보낸 그가 다른 교우보다 더욱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쏟아지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결국 배교를 말하자, 교우들은 한마음으로 그를 다독이며 '순교자로서 세상을 마치라'고 조언한다.

 

교우들이 주는 용기가 그를 움직였을까.

 

형조로 옮겨져 진정으로 통회한 그는 새로운 결심으로 순교를 준비했다. 3회에 걸쳐 잔악한 형벌을 받은 그는 44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조신철 가롤로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하느님께로 갔다.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과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아들 신학생들이 롤롬보이에 머물 때인 기해년 9월 11일과 26일 각각 순교한 것이다. 타지에 떨어져 고국의 부모를 걱정하던 두 신학생의 아픔과 눈물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김대건 성인은 아버지 김제준 성인의 바람대로 사제가 됐으며, 역경 끝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복음을 전파하려다 1846년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아버지 김제준 성인이 순교한지 꼭 7년만이다.

 


 

 

성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1796-1839)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시명'으로도 불리는 김제준은 충청도 면천 땅 솔뫼에서 태어났다. 1814년 순교한 할아버지 김진후(金震厚)와 큰아버지의 권면으로 입교한 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 무렵 나(모방) 신부를 찾아가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했다. 1836년 15세 된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의 신학교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해 8월 김제준은 사위 곽씨를 앞세운 밀고자 김순성(金順性, 일명 여상) 일당에 의해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제준은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고 한때 배교하는 허약을 보였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된 후 배교를 취소하고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