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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南履灌 Sebastian)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7.
축일 9월 20일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南履灌 Sebastian)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南履灌 Sebastian)

축일 9월 20일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南履灌 Sebastianus, 탁희성 비오 작)

 

신      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80-1839년

같은이름: 남 세바스티아노, 남세바스티아노, 세바스띠아노, 세바스띠아누스, 세바스찬, 세바스챤, 세바스티아노, 세바스티아누스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또는 세바스티아노)는 양반집에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1800년경에 입교하였다. 어머니는 젊어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남필용은 1801년에 고발되어 옥에 갇혔다가 유배지인 강진에서 별세하였다. 당시 20세가량이던 세바스티아누스는 경상도 단성 땅으로 귀양을 가서 그곳의 어느 처녀와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세례성사도 받지 아니하였고, 천주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매일 저녁 거르지 않고 외우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녀를 낳기 위하여 첩까지 얻었으나 그것이 중죄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40세에 이르러 병을 앓던 중 어떤 신자의 이야기를 듣고 첩을 멀리하고 성세를 받은 후로는 신자다운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교리를 알고 회개한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허송세월한 것을 회복하려고 애쓰니,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의주까지 가서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여 온 다음, 유 신부의 심부름으로 북경에 편지를 쓰기도 하면서 신부 댁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세바스티아누스는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이천 고을에 몸을 숨겼으나 어떤 신자가 포청과 내통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장은 주리를 클게 하며 세바스티아누스에게 배교하라고 명령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확고부동하였다. 이 이튿날 의금부에 이송되어 문초를 세 번 당하는 동안 다리에 곤장을 수없이 맞았고 참수의 선고를 받았다.

 

남 세바스티아누스는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여자 옥의 옥리를 불러 자기와 같이 붙잡혀 아직 옥에 남아 고생하고 있는 아내에게 “우리는 같은 날 죽기로 언약했는데 천주께서 달리 안배하시니 적어도 둘이 다 같은 일을 위하여 죽도록 하자. 천당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일러 보냈다. 그 후 세바스티아누스는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니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수원교구 성지에서 만나는 103위 성인]

단내성가정성지 남이관 · 조증이 성인

 

부부가 신앙 지키며 같은 장소에서 순교

  

- 남이관 성인은 신유박해때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어 30년간 머슴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었다.

 

“동일동사(同日同死)하자 했더니, 이는 못해 동지동사(同地同死)합시다.”

 

1839년 8월 19일(음력) 남이관 성인(세바스티아노, 1780~1839)은 서소문 형장으로 끌려가던 중 한 군사에게 옥중에 있는 아내에게 전해달라며 유언처럼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성인의 아내 조증이(바르바라, 1782~1839)는 남편의 말처럼 3개월 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한날한시에 죽자던 약속은 지키지 못했으나 부부는 신앙을 위해 몸 바치며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면서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1780년 서울의 양반 교우가정에서 태어난 남이관 성인은 18세 때 교우인 조증이와 결혼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부친이 체포되고 처가로 피신했지만 곧 체포돼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된다.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 부친은 그곳에서 사망한다.

 

그로부터 30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성인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성인은 1832년 풀려나 처가인 경기도 이천에서 살다가 서울로 온다. 서울에서 성인은 처가의 친척인 정하상을 도와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했고 1833년 의주에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맞아 들여 그에게 견진성사를 받은 후 회장의 직무를 맡아 교회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로 이천으로 피신했으나 9월에 밀고자에 의해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정하상, 유진길 등과 함께 심문을 받은 성인은 형조로 이송돼 사형을 선고받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했다.

 

성인의 부인 조증이 성인은 경기도 이천 양반 교우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친정아버지가 순교하고 남편도 유배되자 친정인 이천에 내려가 10여년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 후 30세경 다시 서울에 온 성인은 정하상을 도와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유방제 신부를 보필하고 공소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친정으로 피신시키고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1839년 7월 체포되었다. 성인은 포청과 형조에서 남편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관헌들에게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함구하고 신앙을 지켜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했다.

 

성인은 박해 전부터 "만일 박해가 일어나면 우리는 죽어야 할 터이니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을 참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자"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당당히 죽음에 맞선 성인의 행동은 이 말과 일치한다. "만 번 죽어도 나는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며 부부의 연을 하늘나라에까지 이어간 부부는 1925년 같은 날 복자위에 올랐고, 역시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가정성화를 위한 순례성지인 '단내성지(www.dannae.or.kr)'는 남이관, 조증이 부부 성인을 기념하는 성가정성지다. 성지에는 부부 성인을 비롯해 이문우 성인, 이호영·이소사 남매 성인 등 가족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기리는 순교비가 들어서 있다.

 


 

 

성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1780-1839)

 

서울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남이관은 18세 때 교우인 조증이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다. 아버지 남필용(南必容)은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고, 남이관은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귀양갔다가 30년만인 1832년 풀려 나와 처가인 이천(利川)에서 살았다. 그후 상경하여 처가가 정하상 바오로와 인척인 관계로 그의 신부 영입운동을 도와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맞아들이게 했고, 그에게서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은 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이관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처가인 이천으로 내려가 숨었다. 그러나 9원 16일에 체포되어 서울 포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간단한 신문을 받은 후 김제준과 함께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의금부로 이송되어 여기에서 유진길, 정하상과 함께 신문을 받고,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거기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6일 남이관은 8명의 교우와 함께 6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성녀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는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