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John)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7.
축일 9월 20일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John)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John)

축일 9월 20일

 

 

신      분: 승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7-1866년

같은이름: 남 요한, 남요한,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성 남종삼 요한(Joannes)은 충주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남상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통정대부의 중직을 맡고 있었지만, 신앙생활에 방해가 됨으로 관직을 떠나 살던 인물이다. 남 요한은 1838년인 헌종 4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 교리, 영월 현감, 영해 부사 등을 거쳐 승정원의 승지까지 지냈다. 이러한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부친의 영향이 컸겠으나 무엇보다도 학자인 그 자신이 학문을 통하여 신앙을 크게 꽃피웠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그가 지은 '천주가사'를 통하여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으며, 만일 신앙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경우 물러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관직과 신앙생활을 겸하던 남 요한은 나라의 공식예절이 있을 때마다 조상 숭배행위에 참여해야 하였으므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한편 남 요한이 관직에서 떠날 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가문의 생계를 꾸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세속의 관직 때문에 당시의 선교사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며 성사까지 막힌 경우가 있었으나, 방인사제이신 최양업 신부와의 교분으로 그의 신앙생활은 크게 진보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영해 군수로 있을 때에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지방의 관리가 향교의 제사에 참석치 않는다고 말썽이 생기자 그는 즉시 사표를 낼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 사실 그는 관료생활과 신앙생활을 병행시키는 생활을 했었다.

 

그 후 그는 생활이 궁하였으므로 또 다시 승지가 되었다. 1866년 러시아 배 한 척이 함경도 국경을 넘나드니 대원군은 북경에 와 있는 프랑스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이때 천주교인들에게 호의를 가진 대원군 부인 민씨가 조선에 와 있는 프랑스 선교사에게 의뢰하기 위해서 남 요한을 불러 천주교에 관해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나눈 후 장 베르뇌 주교를 대궐로 모셔다가 그분에게 이 일을 맡기자고 하였다. 남 요한이 장 주교를 찾아 나섰을 때 장 주교는 이미 서울을 떠난 후였다. 평안도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장 주교는 급히 서울로 올라왔으나, 그때는 이미 러시아인들이 물러간 후였으므로 러시아의 침략 위험은 저절로 사라진 때였다.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흥선 대원군은 다시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1866년 3월 1일 남 요한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는 조정에 있는 세 명의 대신들로부터 문초를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남 요한이 이를 거절하자 심한 고문과 곤장을 맞고, 천주교를 신봉한 죄목으로 참수형이 결정되었다. 그의 사형은 1866년 3월 7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집행되어 장렬하게 순교하니,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남종삼 요한

천주교가 정도란 ‘호교론’ 펼쳐

 

성 남종삼 요한

 

서양과 교류 대원군에 건의, 참수형 받고 1866년 순교

 

1846년 병오박해 당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9위의 순교자들의 죽음이 잊혀져갈 때쯤, 또 하나의 피비린내나는 박해가 터졌다.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이들이 순교했다는 1866년 병인박해다.

 

이 가운데 남종삼(요한) 성인은 조선 후기의 남인계 학자로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서양과의 교류를 주장하다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8년(헌종 4년), 22세에 문과에 급제해 철종 때 승지에 올랐으며, 고종 초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기도 한 능력있는 학자다.

 

그는 큰아버지인 남상교의 양자로 들어가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의 관직 때문에 입교한 후에도 교회활동을 드러나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던 그가 1861년 입국한 리델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고, 이전부터 베르뇌와 다블뤼 주교 등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고종 초 러시아인들이 조선 국경을 넘나들면서부터다. 1865년 말 그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막다)의 방아책’을 최초로 대원군에게 건의한 홍봉주 등과 뜻을 같이해 다시 방아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열강과 조선이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고 더불어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위기감을 느낀 대원군은 남종삼에게 낙향을 권유하고, 남종삼은 신앙을 위해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제천 땅 묘재에 은거해 있는 부친 남상교를 찾아간다. 부친의 격려를 받은 남종삼은 순교를 각오하고 다시 상경하기로 작정한 다음 배론의 신학당을 찾아 고해성사를 받고 서울로 향했다.

 

자신의 정치적 문제를 천주교 박해로 풀어보려는 생각을 가진 대원군은 1866년 서양선교사들에 대한 사형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포하고, 같은 해 3월 1일 서울 근처의 고양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남종삼을 체포한다.

 

국청에서 남종삼은 6번의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갔으며, 천주교가 정도라는 ‘호교론’을 펼쳐나갔다.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마음 속 신앙이 만천하에 고백되는 순간이었다. 가톨릭대사전은 그가 서양과의 교류를 대원군에게 건의한 것은 매국의 계책이 아니라 충성하는 마음과 애국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전한다.

 

또 부친과 서양 선교사들, 동료 신자들도 남종삼의 이 같은 생각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과 교류하며 그는 세계정세와 앞으로의 방향을 살폈고, 자신의 신앙과 안목에 접합해 서양과의 교류를 건의한 것으로 비쳐진다.

 

결국 그는 모반부도라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선고받고,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동료인 홍봉주와 함께 순교했다. 이후 1909년 용산 왜고개에 매장된 그의 시신을 명동성당에 안치했으며, 시복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지하성당으로 옮겨 안치했다. 남종삼은 1885년 조정의 조치로 모반부도의 죄를 벗었으며,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시성됐다.

 

이원순 교수 "성인 남종삼과 그 일가의 천주신앙"

 


 

 

 

천주 신앙 명가 전통과 의미 전해

  

1968년 10월 6일. '구원의 도시' 로마에서 한국천주교회 순교자 24위가 시복된다. 이 가운데 병인박해(1866~73) 때 순교한 남종삼(요한)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새 복자에 대한 바오로 6세 교황의 특별연설은 한국어 등 5개 국어로 세계에 중계돼 감동을 안겼다.

 

"이 영웅들의 죽음은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용기와 모험과 희생정신에 의해 그 힘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웅들은 일찍이 믿음 안에 비치는 진리의 빛을 찾은 분들입니다."

 

이날 시복된 24위를 포함해 복자 103위는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그러나 이들 103위 성인 가운데 전기나 평전이 나온 경우는 김대건(안드레아) 성인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여타 성인은 약전만이 전해질 뿐이다. 그 중 하나가 남종삼 성인 평전인 「성인 남종삼과 그 일가의 천주신앙」이다. 이 책이 25년 만에 개정 증보돼 세상에 선보였다.

 

이원순(에우세비오, 83)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겸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교수의 저작으로, 남종삼 성인 평전으로는 유일하다시피 하다. 지은이는 병인 순교자 시복ㆍ시성으로 시작해 남종삼 성인 가문의 천주 신앙 수용, 병인박해와 남종삼 순교, 남씨 가문 3대 순교자들, 성인 가문의 탕척(蕩滌, 죄를 씻어줌)과 복권, 후손들의 천주 신앙까지 세세하게 짚어나간다.

 

특히 천주 신앙 봉행으로 멸문지화를 당해 폐문될 위기에 처했지만, 유복자 남상철(프란치스코)로 인해 가문이 이어지고 천주 신앙 명가로 되살아나기까지 과정과 후손들 신앙생활이 증보판에 포함됐다. 아울러 남씨 가문의 각종 자료와 새롭게 발굴된 사료가 실렸다.

 

지난 25년간 학계 연구 성과도 함께 담아 대를 이어 내려오는 가족신앙의 전통과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Joannes, 탁희성 비오 작)

 

성 남종삼(南鍾三) 요한(1817-1866)

 

자는 증오(曾五), 본관은 의령(宜寧). 성 남종삼 요한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성인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 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초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 등과 의논하여 영불(英,佛)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시므온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그는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여섯 차례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