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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hony)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7.
축일 9월 20일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hony)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hony)

축일 9월 20일

 

 

 

신      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8-1866년

같은이름: 안돈이, 안또니오, 안소니, 안토니오,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성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주교의 세례명은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이고,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다. 그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그 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가정답게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덕행의 꽃을 피웠던 집안이다. 부모는 그의 억세고도 침착하지 못한 성격을 고치려고 다소 완고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는 사제직에 뜻을 두고 1834년 10월 파리(Paris) 교외의 잇시(Issy) 신학교에서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1836년 10월 파리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르와예(Roye) 본당의 보좌신부로 20개월 동안 사목하다가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교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 위해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어,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하여 8월 24일 외방전교회의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제3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선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 8월 초 상해로 가서 8월 17일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후,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塘)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8월 31일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남 강경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하였다.

 

이때부터 1866년 3월에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그는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인 1846년부터 전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백여 명의 교우들을 돌보았고,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일단 활동을 중단하고 습기가 심한 불결한 방에 숨어 살았으며, 그러면서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1848년 박해가 뜸해지자 건강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전교활동을 시작하여 1850년에는 생명이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로 하여금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전교활동을 금하였고, 그래서 그동안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틈틈이 "나선소사전"(羅鮮小辭典)을 편찬하는 등 교우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신심서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 성교 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 등의 번역서라든가,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들 중의 하나이다. 조선 교회사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 파리(Paris)로 보냄으로써 후대의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이것을 기초로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그는 1861년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1865년부터는 내포 지방에서 전교활동을 시작했었는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더욱 가혹해져 마침내 같은 해 2월 23일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잡혀 3월 7일 참수 치명하였다. 그래서 보좌주교였던 그가 주교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체포되어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다블뤼 주교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고 했다. 그러나 3월 23일 그가 사형에 처해질 것이 결정되어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송되는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 성 금요일에서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성 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의 소원대로 3월 30일에 성 금요일에 다블뤼 주교는 사형을 받게 되었다. 처형이 시작되자 맨 먼저 다블뤼 주교가 칼을 받았다. 이때 희광이들이 다블뤼 주교의 목을 칼로 한 번 내리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 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동안 꾸물거리다가,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다블뤼 주교의 목을 두 번째 내리쳤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얼마동안 군문효수 되었다가 교우들의 손에 의하여 홍산 땅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서울대교구 설정 180주년 기념 지상전] 그리스도의 일꾼, 서울대교구장

 제5대 조선 대목구장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

눈부시게 무리진 한국의 순교자들이 당신을 기리나이다

 

 

떠나도 너희를 자주 생각하여 그리워하고,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구하고, 너희 영혼의 신익(神益)을 항상 돌아볼 것이요, 멀리서라도 통공하는 은혜로 너희 가운데 있음과 같으니, 나를 생각하여 너희 본분을 열정으로 지켜라. 환난 이후에는 잊기 쉬우니, 어려운 가운데 너무 겁내고 낙심하지 말며, 부디 사람의 힘으로 구해주기를 생각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 바라고 구하며, 너희들이 주님을 위하여 당한 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니 당신 인자하심만 믿고 기다려라. - 다블뤼 주교의 마지막 <회유문> 중에서

  

성 다블뤼 주교 이야기

 

나, 마리 니콜라 앙투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1818-1866)의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입니다. 나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졸업한 뒤, 1834년 10월 파리 교외의 잇시(Issy)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파리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지요. 서품 후 르와(Roye) 본당의 보좌로 20개월 동안 사목하고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이듬해 극동 선교사로 임명받았습니다.

 

1845년 8월 초, 나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상해로 가서, 8월 17일 김가항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뒤,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 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습니다. 내가 갈 선교지 조선의 첫 사제의 첫 미사를 보좌할 수 있었던 그날의 감회를 뭐라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가 방인 사제를 길러낸 여러 선교사들의 노고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조선에 가서 내가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겠지요. 마침내 8월 31일, 나는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를 떠나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청도 강경 부근 황산포에 상륙했지요.

 

조선에 입국한 이튿날부터 나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교우촌 공동으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1846년 1월부터는 공동 주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리치골에서는 몇몇 신자들을 모아 신심 단체인 '성모 성심회'를 조직했습니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면서 큰 고초를 겪었고, 이때 겪은 고생으로 오른쪽 무릎 인대가 늘어나 평생 동안 보행에 불편을 감내해야 했지요. 1850년 1월에는 병이 너무 위중해져 최양업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기도 했지요.

 

그러던 중 1857년 3월 25일, 나는 서울에서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로부터 승계권을 가진 부주교로 서품되었습니다. 주교 서품 예식에는 메스트르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참석했습니다. 한밤중에 서울의 회장들과 신망 있는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교관에서 이루어졌는데 마치 '로마의 카타콤바'와 같았습니다.

 

1856년부터는 조선 교회사 및 조선 순교사 사료를 수집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신입 교우들을 위한 교리서도 편찬하였지요. 그리고 1862년에는 그동안 수집 정리해 온 조선 교회사 및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냈습니다. 이 자료들이 바로 여러분이 이른바 '다블뤼 비망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애통하게도 비망기를 쓰면서 모았던 한국 순교자 관련 자료들이 주교관에 불이 나면서 소실되고 말아 두고두고 안타까운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후에 달레 신부가 이 비망기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천주교회사'를 썼다니 하느님의 계획은 참으로 오묘하십니다.

 

1866년 2월에 베르뇌 주교가 서울 태평동 주교 댁에서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고 내가 대목구장직을 승계하여 제5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지요.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의 대목구장 재임 기간은 23일에 불과했습니다.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고 4일 뒤인 3월 11일에 나 역시 거더리에서 체포되었고, 위앵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 그리고 신자 황석두, 장주기와 함께 3월 30일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내 나이 48세에 하느님께서 주신 순교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사제로서 산 지 25년이었고 조선에서 활동한 시간을 따져 보니 21년이었습니다.

 


 

 

 

 [신앙 유산] 역사를 위한 증언 :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한갓 호사가(好事家)의 잡다한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지나간 시대의 기록일 뿐인가? 아니면, 과거의 인물들과 대화를 함으로써 오늘의 우리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우리의 미래를 튼실하게 설계해 주는 지혜의 원천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역사가 호사가의 소일거리에 국한되어서는 아니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대화이며, 이 대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와 문화가 창조되고 있음을 말한다.

 

교회사란 무엇인가? 교회사는 옛 사람들의 이름에 관한 해묵은 이야기인가? 현대의 우리 믿음이나 삶과는 무관한 지나간 시대의 종교적 열정에 관한 기록이 교회사인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가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듯이 교회사는 우리의 삶과 믿음에 뿌리가 되고 있다.

 

교회사는 하느님 백성들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지상의 도정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증거하려 했던 모든 일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 고백과 증거는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여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도 그침 없는 영감과 용기 있는 행동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사는 죽은 과거의 사건이 아닌 삼아 있는 현재의 일들인 것이다. 교회사는 현재 우리의 삶과 믿음에 개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교회사의 현재성(現在性) 때문에 우리는 교회사를 소중히 여기며 밝히려 한다.

 

우리는 교회사를 정리하고 밝히려 했던 대표적 인물로 현석문(玄錫文)이나 최양업(崔良業)을 우선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작업을 이어받아 조선 천주교회사를 서술하고자 했던 인물로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7~l866년) 주교를 주목하게 된다. 그는 조선사(朝鮮史) 입문을 위한 비망기[Notes]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남겼다. 그리고 이 비망기는 달레(dallet)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할 때 대본이 되었다.

  

다블뤼는 누구인가?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비망기를 남긴 다블뤼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선교사였다. 그는 프랑스 아미앙(Amiens)에서 1817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프랑스의 시민층에 속했으며, 이러한 그의 가정 환경은 그에게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했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당시 사회에서 성직자에 대한 편견이 강화되고 있었지만, 이를 도외시하고 자기 희생의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쌩 슐피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고, 1841년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가 다녔던 생 슐피스 신학교는 프랑스에서 가장 대표적인 신학 교육 기관이었다. 그는 서품 후 교구 사제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철저한 희생의 길을 따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1843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여 동양의 선교를 지망했다. 그는 1844년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 다음해에 충청도 강경 황산포를 통해 선교지에 입국하여 선교사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1866년 병인 박해로 인해 순교할 때까지 21년 간 조선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이 봉사의 과정에서 그는 조선의 풍습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관찰하고 있었으며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854년에 ‘한한불사전’(漢韓佛辭典)의 편찬에 착수했고 역사 연표를 엮어 나갔다.

 

1856년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베르뇌(Berneux) 주교가 취임 한 이후 그의 연구 활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주교의 명에 따라 신심서 및 교리서를 편찬하게 되었고 조선의 천주 교회사와 순교사를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베르뇌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고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이후 제5대 조선교구장의 직을 승계했다. 이러한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는 당시 선교사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성과 굳은 믿음을 겸비하고 있었던 인물이라 평가해 줄 수 있다.

  

“비망기”란 무엇인가?

 

다블뤼 주교가 작성한 "비망기"는 박해 시대의 교회사를 알려 주는 보고이다. 이 "비망기"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박해 시대 한국 교회사의 상당 부분을 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비망기"가 대본이 되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가 쓰여질 수 있었음을 생각할 때, 이 자료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비망기"는 탁월한 지성과 굳건한 믿음으로 밝힘과 섬김의 삶을 살았던 다블뤼 주교가 한국 교회를 위해 남겨준 가장 큰 선물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이 "비망기"를 통해 선교사이며 교회 행정가인 그의 면모뿐만 아니라 신앙인이며 순교자적 삶을 살았던 그 자신의 발자취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료를 통해 역사가로서의 다블뤼를 만나게 된다.

 

다블뤼가 "비망기"를 편찬하기 시작한 때는 1857년이었다. 이 해에 그는 베르뇌 주교의 위촉을 받아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자 전기의 편찬에 착수했다. 그는 이를 위해 1801년 신유 박해 당시 및 초기 교회사의 사료를 수집하려 했다. 그리고 1839년과 1846년에 순교한 사람들 가운데 시복(諡福) 수속이 진행 중이던 인물의 전기 자료를 정리하여 파리로 발송했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1859년에 이르러 그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이때 삼복 더위를 무릅쓰고 두 명의 서사생(書寫生)과 함께 편찬 작업을 강행했고, 이렇게 작성된 "비망기"를 1860년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로 발송하게 되었다.

 

그는 이 "비망기"를 작성하며 한국의 역사와 풍습을 밝혀 보고자 했다. 즉, 그는 19세기 당시를 전후하여 전개된 시대적 조건과 조선이라는 지리적 여건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는 교회사를 밝히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두 편으로 된 "비망기"를 작성했던 바 그 첫째 편은 "조선사 입문 비망기"로서 모두 15항으로 구성되어 있고, 둘째 편은 "조선 순교자 비망기"로서 모두 9권으로 되어 있다. 그가 "조선사 입문 비망기"를 작성하게 되었던 것은 교회사의 서술에 앞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19세기 중엽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정리 작업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통해서는 한국천주교회의 창설과 그 순교로 점철된 증거의 역사를 밝히려 했다. 즉, 그는 이벽(李檗)의 교리 연구와 윤지충, 주문모 신부의 순교 및 1819년과 1827년의 박해에 관해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이에 이어서 그는 조선 교구의 창설 과정과 1839년의 박해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서품과 활동 및 1860년대초 교회사의 전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박해 시대 우리 교회사의 대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비망기”가 소중한 까닭

 

"비망기"는 다블뤼가 지니고 있던 역사학도로서의 특성을 우리에게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망기 그 자체는 한국 교회사와 한국 근대사의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비망기"가 소중한 까닭은 여기에서 초기 교회사의 주요사료들을 확인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약용의 "조선 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에 관한 부분적 내용들을 알 수 있으며, "윤지충 일기"(尹持忠日記)를 비롯해서 박해 시대의 신앙 공동체에서 작성된 많은 자료들을 확인하게 된다. 이 자료들은 오늘날 그 원문이 없어진 상태이다. 그러나 비록 프랑스어로 번역된 형태를 통해서라도 우리는 그 자료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비망기"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연구사(硏究史)를 밝히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비망기"가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체계적 연구를 시도한 최초의 저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망기"가 없었다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도 집필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편 "비망기"는 믿음을 밝힌 글임과 동시에 믿음을 증거하고 실천한 다블뤼의 결단을 함축하고 있는 글이다. 우리는 이 비망기를 대함으로써 역사의 실천성이 갖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실천성을 잃은 교회사는 고상한 너스레에 지나지 않음을 다블뤼는 자신의 연구와 삶, 순교를 통해 우리에게 전한다. 이래저래 "비망기"는 소중한 책일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이 “"비망기"가 활자로 정리되어 널리 읽힐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회유문 원문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Daveluy) 주교(1817-1866)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너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 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 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 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성화]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hony) 주교

성금요일의 순교자들

제5대 조선대목구장 성 다블뤼 주교 마지막 회유문 발굴

베르뇌_다블뤼_주교_관련_사적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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