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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모방 베드로(Manbant Peter)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7.

성 모방 베드로(Manbant Peter)

 축일 9월 20일

 

성 모방 베드로(Pierre Maubant)

 

신      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3-1839년

같은이름: 나백다록,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에르, 피터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씨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그는 선교사의 꿈을 꽃피우기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중국 사천(四川) 교구로 파견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에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주교가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에서 선종하자, 그는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하여 그곳에 와 있던 조선의 교우 5명을 만나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때가 1836년 1월 12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가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후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고,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열여섯 곳 내지 열일곱 곳의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백 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백 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고, 그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과 성인전기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모방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Franciscus),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등 세 소년을 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의 상황 하에서 조선 내에서의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2일에는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듬해 1월 15일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평 지방으로 내려가 전교하는 동시에 조선어를 다시 배워 조선어로 성사를 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그래서 결국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포교를 하던 중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상태가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샤스탕 신부로부터 병자성사까지 받았으나 3개월 후에 겨우 회복되었다. 1837년 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1839년까지의 선교사들의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해년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선교사들도 그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홍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모방 신부의 삶과 신앙

 

 

1836년 조선 입국… 교우촌 돌며 왕성한 활동

 

국내에 최초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 모방 신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양업 등 소년 세명을 뽑아 마카오로 보내는 등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하다 순교한 모방신부. 「군문효수」라는 극형을 선고받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선종한 신부의 삶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을 숙연케 한다.

 

5월 13~ 15일 모방신부의 고향인 프랑스 바시와 첫 사목지 데제르 등지에서 열리는 시성 20주년 기념행사에 발맞춰 본보는 성인의 일생을 소개한다.

 

생애

 

모방신부는 1803년 9월 20일 노르망디 지방의 바이어교구 관할인 바시에서 태어났다. 바시는 사제나 선교사를 많이 배출한 유서깊은 신앙도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모방 신부는 출생한 날 바로 바시성당에서 「피에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후 비르에서 중등교육과정을 이수한 모방 신부는 생 쉴피스 신학교 출신의 신부들이 지도하던 바이어교구 대신학교에 진학했다. 이 생 쉴피스 신학교는 파리외방전교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학교로 모방신부는 이 학교 출신의 교수 신부들에게 파리외방전교회의 활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829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비르의 북서쪽에 위치한 데제르본당의 보좌신부로 사목자로서의 첫 발을 내디딘다. 이듬해 비르의 남동쪽에 있는 샹뒤블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한 모방신부는 이곳에서 선교의 소명을 느끼게 된다.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 모방신부의 최초 선교 목적지는 베트남의 통킹이었으며, 최종 목적지는 중국의 사천성. 그러나 마카오에서 조선교회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돼 부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면서 목적지가 바뀌게 된다. 『조선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간청이 받아들여져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1835년 갑작스런 병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사망하고, 1836년 1월 15일 모방성인은 5명의 조선 교우들과 함께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들어오게 된다.

 

입국과 전교활동

 

입국직후에 조선교회의 상황을 보고받은 모방신부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활동할 조선의 언어를 배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자 했다. 그러나 새로 서양인 신부가 조선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아는 신자들은 모두가 고해성사를 받고 싶어 했기 때문에 모방신부는 언어를 배울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통역을 통해 고해성사를 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중국어나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빨리 조선어를 습득해 신자들에게 직접 고해성사를 베풀고자 노력했다.

 

모방신부의 사목활동은 주로 전국 각지에 산재한 교우촌들을 순회 방문하는 것이었다. 순회 방문에서 모방 신부는 가는 곳마다 회장을 임명하거나 신자 집단을 새로 조직하는데 열중했으며, 주일과 축일에 신자들이 모이게 했다. 이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게 했고,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 성인 전기 등을 몇 대목 읽게 했으며, 회장이 낭독한 대목을 해석하게 했다.

 

모방 신부의 업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갈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생들을 선발, 마카오로 파견한 일일 것이다.

 

『조선에는 조선 신부가 있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신부가 될만한 사람을 골라야 하는데…』

 

모방 신부는 박해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천주교 복음을 전할 조선인 신부의 자격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때묻지 않은 소년일 것, 둘째 천주교 집안일 것, 셋째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서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 일 것, 넷째 건강하고 근면 할 것.

 

그런 조건으로 선발된 소년이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 김대건(안드레아) 이었다. 모방 신부는 이들에게 몇 달 동안 기초교육을 시킨 후 마카오로 보냈다.

 

1837년 1월, 두 번째로 조선으로 들어온 샤스탕 신부와 재회한 모방신부는 그와 함께 공소들을 방문했다. 1837년 12월 조선 교회는 제2대 교구장으로 앵베르 주교를 맞이하게 된다. 이로써 조선교회는 체계적인 교회조직을 갖추게 됐고, 모방 신부 입국 당시 6000여명이었던 신자수가 1838년 말에 가서는 9000여명으로 증가하게 된다.

 

순교와 시성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로 서소문과 새남터는 다시 한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됐다. 이미 체포된 앵베르 주교는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게 자헌(自獻)할 것을 권고하였고, 이에 두 신부는 9월 6일 홍주 근처에 대기중인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서울로 압송돼 「대역 죄인」이란 판결을 받은 이들은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앵베르 주교의 나이는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 세 명의 시신은 3일 동안 백사장에 방치되다, 한강의 모래속에 묻혀버렸다. 그러난 20일쯤 지나 일부 신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시신을 수습해 노고산(老姑山)에 안장했다. 이후 1843년 삼성산(三聖山, 관악산의 줄기)으로 이장됐으며, 1901년 시복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지게 되고, 1967년 시성작업이 추진되면서 다시 절두산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들은 1857년 가경자(可敬者)가 됐고, 1925년에 복자가 되었으며, 1984년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순교자와 더불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신부(1804-1839)

  

한국명은 나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 그는 1836년 1월 입국하여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까지 3년 9개월 간 헌신적인 포교활동을 폈으며 특히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에 유학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베시에서 태어난 나(모방) 신부는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어 그 이듬해 동양에 진출, 중국을 거쳐 1836년 1월 의주의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그는 서울에서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순회, 전교하였다. 또한 그는 이 땅에 들어오자 곧 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이들 세 소년에게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장차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던 중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시켰다.

 

그 후 나 신부는 이들 세 소년을 전송한 교우들과 만나 1837년 1월 무사히 서울에 들어온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손을 나눠 각 도의 흩어진 교우촌을 찾아 밤낮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가며 전교에 힘쓴 결과 입국 당시 불과 4천 명이었던 신자수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한 1837년 말에는 갑절이 넘는 9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대박해가 일어나고 서양인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점차 소문으로 퍼져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순교의 날이 닥쳐온다.

 

범 주교는 박해가 일어나 신변이 위험하게 되자 처음에는 자신만이 자수하고 두 신부(나 신부, 정 신부)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했으나 형편이 그렇게 못되었고 결국은 범 주교에 이어 두 신부도 자진하여 포졸에게 몸을 맡겨 관가에 자수하였다. 그는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범 주교, 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서강대학교 교정의 성 모방 신부 순교 현양비

서울대교구 노고산 사적지(서강대학교 뒷산)를 기념해 서강대학교 교정에 마련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순교 현양비 중 모방 신부 현양비 모습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의 103위 시성 기념성당 옆벽에 설치된 한국 순교성인화

 

이 작품은 한국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12명의 순교자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 중에서 10명이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

 

문학진 작, 103위 순교 성인화

1976년 9월 당시 박희봉(이시도로)주임신부는 문학진 (토마스)교수에게 '103위 순교복자성화'를 의뢰하였다. 작가는 10개월에 걸쳐 전례, 역사, 복식 등 전문가(오기선 신부, 유홍렬 박사, 석주선 선생) 등의 폭넓은 자문과 한국적 주체성을 살려 한 분 한 분의 표정을 특색있게 나타냈다.

 

이 작품은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범 주교 및 두 명의 성직자,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79위 복자화이다. 이들은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 작품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시복식 때 대성당에 걸렸던 79위 복자화이다.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 신부(Pierre Philibert Maubant, 탁희성 비오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