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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녀 이경이 아가타(李璟伊 Agatha)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1.

성녀 이경이 아가타(李璟伊 Agatha)

축일 9월 20일

 

 

 

신      분: 부인,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3-1840년

같은이름: 아가다, 아가따, 이 아가다, 이 아가타, 이아가다, 이아가타

 

성녀 이경이 아가타는 원래 천주교를 믿는 시골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장성한 후에는 궁녀를 감독하던 내시에게 속아서 출가하였지만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그 결혼은 교회법상 무효라는 선언을 받았다. 그래서 남편과 헤어졌지만 친정어머니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한영이 막달레나(Magdalena)와 그녀의 딸인 권진이 아가타의 집에 의지해 함께 살았다. 이 아가타는 같은 처지이던 그들과 함께 항상 기도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기해박해가 극에 달했던 1839년 7월 17일 어떤 배교자의 밀고로 잡혔는데, 포장은 그들의 성명을 물은 다음 같이 잡힌 한 막달레나만 옥에 가두고 권 아가타와 이 아가타는 이웃집에 남겨두고 지키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을 감옥에 가두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는데, 배교자 김여상이 찾아가서 권 아가타를 감언이설로 꾀어 함께 도망치려 했기 때문이었다. 포졸들은 이러한 사실을 막기 위하여 이 이가타를 풀어주었다.

 

한편 조정에서도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고 난 다음 관원을 파면시키고, 여러 포졸들을 귀양 보내고, 그들을 다시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아가타와 권 아가타는 서울의 어느 초라한 신자 집에 숨어 있었는데, 함께 탈출했던 여종이 먼저 잡혀서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다시 붙잡히게 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으로 압송된 이 아가타는 무서운 형벌을 받았지만 불굴의 인내심으로 형벌을 극복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형조로 옮겨져서도 새로운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순교의 의지를 더욱 굳혔을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27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이경이 아가타(李璟伊 Agatha, 탁희성 비오 작)

 

성녀 이경이(李瓊伊) 아가타(1813-1840)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경이 아가타는 시골에서 교우가정에서 태어났다. 혼기에 이르러 어떤 내시에게 속아 결혼했으나 곧 집으로 돌아왔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그 결혼을 무효화시켰다. 그 후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가 막연해지자 어머니를 시골에 사는 외삼촌에게 맡기고 상경하여 한영이(막달레나), 권진이(아가타) 모녀의 집에서 살며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권진이 모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 김순성의 간교로 한영이만 포청에 갇히고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포졸 하나가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을 탈출했으나 얼마 안되어 숨어 있던 교우의 집에서 다시 체포되었고 마침내 1840년 1일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27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 성녀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 성녀 권진이(權珍伊) 아가타와 함께 체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