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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녀 이 아가타(李 Agatha)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1.

성녀 이 아가타(李 Agatha)

축일 9월 20일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의 103위 시성 기념성당 옆벽에 설치된 한국 순교성인화입니다. 성녀 권희 바르바라, 성 이광렬 요한, 성녀 이 아가타,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신      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23-1840년

같은이름: 아가다, 아가따, 이 아가다, 이아가다, 이아가타

 

성녀 이 아가타는 서울에서 출생했고, 앞서 순교한 이광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회장과 권희 바르바라(Barbara)의 딸로서 온 가족이 함께 1839년 4월 7일에 체포되었다. 당시 80세의 할머니와 8세의 남동생은 석방되고, 이 아가타는 17세의 어린 처녀의 몸으로 부모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는 좋은 모범을 보여 주었다. 당시 그녀의 집은 남명혁 다미아누스(Damianus)의 집과 이웃하여 있었는데, 배교자의 밀고로 양쪽 집안 식구들이 모두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 아가타는 포도청에서 형조로 옮겨 갔다가 다시 처음 갇혔던 포도청으로 끌려왔다. 형조판서는 어린이들을 형조에서 심문하는 것이 법에 어긋난다는 구실로 남명혁 다미아누스의 아들과 이영희 막달레나(Magdalena)의 조카딸과 이 아가타의 남동생과 함께 포청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들은 부모와 헤어지기 싫어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포청에 끌려온 이 아가타는 주림과 목마름뿐 아니라 고문까지 거듭 당했는데, 3백 대 이상의 태장과 곤장 90대를 맞았다.

 

형리들은 그녀에게 부모가 배교하고 석방되어 집에 돌아갔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이때 아가타는 동생의 대답까지 대신하여 "저희 부모님이 배교를 하고 안하고는 그분들의 일입니다. 저는 늘 섬겨 온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며 자신의 신앙을 더욱 분명히 했다. 이 아가타는 9개월 이상이나 옥중에서 온갖 고통을 당했고 또 파렴치한 옥졸 손아귀에 혼자 갇혀 있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순결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김 테레사(Teresia)와 함께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때는 1840년 1월 9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이 아가타(李 Agatha, 탁희성 비오 작)

 

성녀 이 아가타(1823-1840, 동정, 기해박해 때 교수)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동정녀 이 아가타는 이광헌(아우구스티노)과 권희(바르바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거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으로 수계범절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형조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포청으로 환송하였다. 포청에서는 다시 혹형과 고문을 했고 또 부모가 배교한 것처럼 속여 배교를 강요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옥에서 만난 김 데레사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나갔다.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곤장 300도, 대곤 90도를 맞고 드디어 1840년 1월 9일 김 데레사와 함께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 성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성녀 권희(權喜) 바르바라의 딸.

- 성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성녀 김장금(金長金) 안나, 성 이광렬(李光烈) 요한, 성녀 권희(權喜) 바르바라와 함께 체포됨.

 

이광헌과 권희의 딸인 이 아가타는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수계범절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해 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들과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소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나이 어린아이를 형조에서 심문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환송되었다. 포청에 다시 끌려온 아가타는 주림과 목마름뿐 아니라 소문까지 거듭되고 부모가 배교한 것처럼 속여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저희 부모님이 배교를 하고 안하고는 그분들의 일입니다. 저는 늘 섬겨온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며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나갔다. 9개월 동안 옥에 갇혀있으면서 곤장 300대, 대곤 90대를 맞고 김 데레사와 함께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열일곱살이었다.

 

[경향잡지, 1996년 1월호, p.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