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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John)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2.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John)

축일 9월 20일

 

대구대교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 지하 경당 제대 오른편에 있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영정 모습

 

 

신      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6-1867년

같은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 요한, 이반, 이요한,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이윤일 요한(Joannes)은 충청도 홍주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친 대(代)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가 언제부터 경상도 문경군 새재 여우목으로 와서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박해가 일어났을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는데, 키가 크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므로 위엄이 있었으며, 신심이 깊고 또 솔직담백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의 가정은 친가와 외가 모두 선대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가문이어서 선친들 중에 전교회장과 순교자들도 있었다. 이 요한도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온갖 방법과 노력으로 자기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관아에서는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포졸들을 보냈다. 이 요한은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올 때가 온 것이며 이미 각오한 바 있어 도망하지 않고 태연히 그들을 맞아 들였다. 포졸들이 "이 마을을 대표하는 집 주인이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선뜻 나서며 "바로 나요" 하며 점잖게 말하였다. 그들은 마을을 수색하여 이 요한의 가족 8명과 마을의 신자 30명을 체포하여 험준한 산길을 걸어 문경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문경에서 사흘을 지낸 후 상주로 압송되었다. 여기서 세 달을 지냈는데 그가 기거하던 곳은 집이 아니었고, 마구간도 돼지우리도 아닌 겨울에 무나 배추를 저장하기 위해 파 둔 구덩이가 요한의 침실이었다. 그의 목에는 죄수가 쓰는 칼이 두 개나 채워졌고, 발에는 차꼬를 끼워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기도와 묵상을 하였으며 신자들을 격려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상주 목사는 마지막 문초를 마치고 70여 명의 신자를 세 편으로 갈랐다. 첫째 편은 집으로 돌려보낼 자들이고, 둘째 편은 처형될 사람들 그리고 셋째 편은 이 요한과 같은 사교의 두목이었다. 상주 목사는 1867년 1월 4일 대원군의 윤허와 함께 군중에게 교훈이 되게 사형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집행을 위해 대구로 압송하였다. 이 요한은 사형선고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출발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이 요한은 포졸들이 주는 마지막 음식을 다 받아먹고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 나갔다. 천주학장이를 참수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 형장은 인파로 들끓었다. 집행관이 나와서 선고문을 낭독하자 요한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어 희광이에게 주며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 터이니 받아서 요긴하게 쓰게나. 그 대신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 주게나." 하고 말하였다. 요한은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꿇어앉았다. 돈을 준 효력이 있었는지 요한의 목은 한 칼에 떨어졌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와 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에 의해 대구 날뫼(비산동)에 매장되었다가, 1901년 경부선 철도가 착공되면서 당시 용인의 먹뱅이에 살고 있던 그의 동생 이시영에 의해 1912년 이동면 묵리 산으로 이장하였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그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이윤일 요한

공소 회장으로 선교활동에 헌신

 

사형선고 받고도 기쁜 맘으로 기도

1867년 관덕정서 참수형 받고 순교

 

우리나라 성인 103위 가운데 첫 번째에 이름을 올린 평신도가 정하상 바오로라면, 마지막에 이름을 올린 평신도는 이윤일 요한이다.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당한 이 성인의 유해는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성지에 모셔져 있다.

 

이윤일 성인은 충청도 홍주 출신의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충청도를 떠나 경상도 상주 갈골로 이주했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다시 문경의 여우목(호항리)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당시 그곳은 성인의 처갓집 식구들(순교자 박사의 후손)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103위 성인 가운데 많은 이들이 '회장'의 직분을 다했던 것처럼, 이윤일 요한 또한 공소회장으로 활동하며 이곳에서 외교인 30호를 입교시켰다. 그는 본래 성품이 순량해 남을 꾸짖거나 탓하는 일이 없었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화평한 모습을 보였다고도 전해진다. 또 아버지에게 효성도 지극해 동네 외인들이 그를 위해 효자문을 세워야 마땅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지고 그 여파가 경상도에까지 이르러 이윤일 성인은 그해 11월 가족을 포함한 마을교우 30여 명과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그는 우선 문경관아로 끌려갔는데, 3일 동안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상주로 이송됐다. 상주에서는 한 달에 세 번씩 3개월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윤일 성인은 사형선고를 받고도 본래의 여유와 기쁨을 잃지 않으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됐다.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52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후손에 의해 처음 대구 비산동 날뫼 뒷산으로 이장됐다가 경기도 용인군 묵리, 미리내성지 무명순교자 묘역을 거쳐 1987년 대구 성모당에 안치됐다. 이후 성인은 대구대교구 제2 주보성인이 됐으며, 1991년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봉안됐다.

 

[가톨릭신문, 2011년 10월 23일, 오혜민 기자]

 


 

 

 

성 이윤일(李尹一) 요한(1815-1867년) 일대기

 

성 윤일(尹一) 이제현(李齊賢) 요한은 충청도 내포지역의 홍주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중인(中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태어날 당시 시작된 을해박해(1815년)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많은 이들이 잡혔고 그중에 몇 명은 경상감영에서 옥사하였다. 대구지역 박해 시작과 더불어 성인은 탄생하신 것이다. 성인의 부친 대(代)에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성인의 가족들은 신앙과 용기로 항상 빛났던 사람들이었다. 성인의 아들 시몬은 아버지보다 앞서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에 예천 건학에 사는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체포되어 공주에서 치명하였다.

 

성인은 키가 큰데다가 길고도 숱이 많은 수염까지 기르고 있어 위풍이 당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성인의 성품은 순량하여 남을 꾸짖거나 탓하는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화평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한 번도 성내는 일이 없었던 성인은 부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동네 외인들이 그를 위하여 효자문을 세워야 마땅하다고 할 정도였다.

 

성인은 고향이었던 홍주를 떠나 상주 갈골에 살다가 부친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자, 성인의 처가 집 식구들(순교자 박사의 후손)이 많이 살던 문경 호항리(여우목)로 이사를 갔다. 여우목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성인은 온후한 성품과 독실한 신앙으로 수계 생활도 열심히 하였다. 성인은 그곳에서 공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천주교회에 입교시켰고 신자들을 잘 이끌었다.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포졸들이 여우목으로 들이닥쳤다.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올 때가 온 것이라 각오한 바 있어 도망하지 않고 태연히 그들을 맞아들였다. 포졸들이 "이 마을의 대표자가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 하고 묻자 성인은 선뜻 나서며 "바로 나요."하며 점잖게 말하였다. 포졸들이 와서 성인의 손을 묶자, 성인은 침착하게 "이렇게 아니하여도 나 달아날 사람이 아니다. 수갑을 늦추어 달라."하였다. 그리고 성인의 여덟 식구와 동네 교우들을 합쳐 약 30여 명이 문경 아문에 갇혔다. 당시 문경 현감은 신자들을 잡지 아니한 죄로 면직이 되어 현감 자리는 공석 중이었다. 현감이 없자 포졸들이 성인에게 돈을 내라고 요구하였고, 때리지는 않았지만 세간은 다 빼앗겼다. 문경에서 3일 동안 있다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갔다. 성인이 상주 진영에 잡혀 있을 때 잡혀 온 이들은 약 70여 명이 되었다. 그 중에서 약 20여 명 이상이 치명하였다.

 

 

상주 진영에서 성인은 큰 칼을 쓰고 차꼬를 채인 상태로 한 두어 달 갇혀 있으면서 문목을 받았다. 성인이 상주 감영에 있을 때 원(牧使) 앞에 3차례 문목을 받는다. 원이 "교우들이 어디에 있느냐?" 묻자 "교우들은 여기 들어 온 사람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고, "지금도 성교를 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아니 할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원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네가 회장이니, 네만 아니하면 다른 사람도 아니할 것이다." 포졸들에게 큰 괴로움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에 성인의 두 살 난 손녀가 죽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성인은 교우들 중에서 마음이 변하는 자가 있으면 열심히 권면하여 마음을 돌이키게 하였고, 성인의 지도로 함께 옥중에서 아침저녁 기도를 그치지 않고 하였고, 항상 웃으면서 즐거워하였다.

 

상주감영에서는 끌고 온 신자들을 세 편으로 갈라놓는다. 빈곤한 사람과 여자와 어린 아이들처럼 풀어 줄 사람,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을 하여 죽어야 될 사람, 성인과 한실 공소 회장 김예기 형제처럼 사학 괴수라 하여 따로 사형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 때 성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와 모친과 누이가 풀려 나온다. 그러다가 성인이 대구로 참수 당하러 갈 때 자손들을 불러 이렇게 훈계한다. "나는 이제 치명하려 가니 너희는 가서 열심히 수계하다가 나를 따르라." 그리고 치명하는 장소에는 따라오지도 말고 치명하는 장면은 보지도 말라고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성인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다시 신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일성록' 고종 병인년 11월 29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지금 경상 감사 이삼현의 장계를 보니, '문경 고을에서 잡힌 사학 무리 중에 이제현, 김예기, 김인기 세 명은 사학에 매우 깊게 빠진 자들이니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에 대해서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많이 모은 뒤 효수(梟首)하여 모든 사람들을 경각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사학 무리들을 먼저 목 베고 후에 장계함이 일찍이 행한 일이 있은즉 이후로는 굳이 품처하지 말고 해당되는 율로써 형벌을 행한 후에 장계하여 드릴 것을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의정부에서 왕께 아뢰니 왕이 윤허하였다.

 

상주에서 경상감영으로 끌려온 지 3일 째 되는 날,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에 각각 그 날 음식상을 한 상 씩 받았다. 그러자 김 회장 형제 두 사람은 먹지 않고 울었다. 그러자 성인이 "천주가 먹으라 하신 음식을 먹지 않고 울긴 무슨 연고이냐?"며 권면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다 먹었다고 한다. 성인과 김예기, 김인기 형제는 영장이 먼저 나와 앉아 있던 관덕당 앞으로 묶인 채 끌려 나왔다. 사형 터에는 막대기 넷이 땅에 박혀 있었다. 포졸들이 묶인 것을 풀어 주었고 첫 차례로 성인이 죽을 때가 되자 성인은 자기 주머니에서 엽전 닷 냥을 자신에게 쓸데없는 것이라며 희광이에게 주면서 "여보게 이것 받아 주게. 내가 죽는 마당에 이것을 품속에 넣은 채 죽겠는가? 저승에서는 이런 것이 필요 없다네. 그러니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들에게 주는 게니 받아주게. 자네들이나 나나 고생하지 않기 위해 한 칼 단번에 내 목을 잘라주게."고 하였다. 그 후 희광이가 성인을 엎드리라고 하면서 손으로 치자, 성인은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 성호를 긋고는 스스로 엎드려 나무토막을 목에 괴고, 사지를 각각 잡아매라 하였다. 이렇게 성인은 관덕당 형장에서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당시 성인의 나이는 52세였다.

 

성인의 유해는 이 토마스에 의해 처음에는 이곳 관덕당 형장 근처에 임시로 묻혔다. 성인의 머리를 따로 효수하지 않아서 몸과 함께 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약 두 달 후(음력 2월) 성인의 아들 마티아와 마티아의 형과 외숙부와 이 토마스가 와서 봉분을 크게 만들었다. 2년 후 후손들에 의해서 대구 비산동 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러다가 그 후손들이 경기도 용인군 묵리(墨里 = 먹방이 = 먹뱅이 = 묵뱅이)로 이사를 가서 1912년에 그곳으로 이장을 했다.

 

그 후 다시 1976년 6월 24일 미리내 성지의 무명 순교자 묘역에 이장했다. 1985년 대구교구 신자들이 미리내 성지 순례를 할 때 해설자에 의해서 무명 순교자 묘역에 안치된 18위 중 한 분이 성인이라는 것을 듣고, 교회사연구소 최석우 신부님이 조사 검증하고 확인하였다. 성인의 묘소가 확임 됨에 따라 대구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와 수원교구장인 김남수 주교, 미리내 성지 정행만 신부의 합의에 의해서 대구대교구로 이장하게 되었다. 대구로 이장된 성인의 유해는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구내 성모당으로 안치했었고, 대구대교구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는 이날 성인을 대구대교구 제2주보로 모실 것을 반포하셨다. 그러다가 성인의 유해는 1991년 1월 20일(일)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의 주례로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봉안하였다.

 

한국의 병인 순교자 24위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김수환 대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1968년 10월 6일 시복될 때, 성인도 복자가 되었다. 그 때 교황은 바오로 6세였다. 이후 성인은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서울 여의도에서 더불어 시성(諡聖)되셨다. 성인은 우리나라 103위 성인 중 가장 끝에 소개되어 있는 분이다.

 

※ 성 이윤일 요한과 관련된 순례지

 

가. 충남 홍주, 덕산

나. 경북 상주 갈골

다. 경북 문경 여우목

라. 경북 문경 관청

마. 경북 상주 감옥터

바. 대구 중구 아미산(관덕정)

사. 대구 서구 날뫼(비산동)

아. 경기 용인 묵리(먹뱅이, 이동면)

자. 경기 용인 미리내

차. 대구 중구 성모당(남산동)

 

[출처 : 대구 관덕정 순교성지 홈페이지]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Joannes, 탁희성 비오 작)

 

성 이윤일(李尹一) 요한(1823-1867)

 

일명 '제헌'으로도 불리는 성 이윤일 요한은 충청도 홍주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문경의 '여호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자 11월 가족, 마을의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3일 간 혹형과 고문을 받은 후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한 후 소위 사학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다시 김 회장 형제와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 김 회장 형제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형이 집행될 때까지 기쁨과 여유를 갖고 기도하며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이윤일 요한 성인의 사람들

김정숙(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세례명을 택하는 일은 늘 자신과 함께 기도할 성인을 정하는 일이라고 했다. 즉 세례 때 정해진 주보는 세상 마지막에 그의 손을 붙들고 주님 앞에 함께 갈 성인이란다. 그런데 우리 교구에는 제2주보성인이 있다. 그리고 그분은 대구 도심 복판에서 우리에게 가깝게 손을 내밀고 있다. 물론 이분의 인생은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면 고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분은 참 많은 곳을 떠다녔다. 그것은 아마 더 많은 사람을 만나려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윤일은 1815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언제인가 아버지를 따라 상주 갈골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교우촌인 여우목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체포되어 상주옥에 갇혔다가, 문경관아를 거쳐 대구 경상감영으로 끌려가 이곳에서 참수 치명했다. 한곳을 떠날 때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서인지 그의 인품은 더욱 다져져 갔다. 이윤일 회장은 효자였으며, 성을 내는 일이 없었고, 온화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감옥에서도 여유롭고 의젓했으며, 당당하게 죽음에 임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살아서 여러 차례 포기를 배워서인 듯하다.

 

그러나 성인의 여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치명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살아생전에는 본인의 진술과 문헌도 있지만 죄인으로 처형된 뒤에는 더 이상의 사회적 관심도 없고 말해줄 사람도 없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이동은 계속됐지만, 고비마다 작은 손들이 있어 성인을 우리에게 연결해 주는 은혜들을 보게 된다. 그가 치명당할 때, 이토마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토마는 이윤일의 시신을 형장 가까운 곳에 가매장했다. 이듬해 춘삼월에 이토마는 성인의 아들 이위서 마티아 등과 함께 정식 분묘를 만들어 장사지냈다. 2년 후 이들은 묘를 날뫼(비산동)로 옮겨 모셨다.

 

대구대교구는 시성이 이루어진 후 대구에서 순교한 성인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날뫼에는 성인의 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미리내 성지를 안내하는 사람이 그곳의 무명순교자 묘지에 묻힌 분 중에 한 분이 대구에서 온 요한이라고 설명한다는 말이 전해졌다. 사실 그 안내자는 그 무덤의 주인공이 용인 먹방이에서 옮겨온 이요한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먹방이는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리의 다섯 마을 가운데 하나이다. 먹방이는 1890년대에 이시영 집안에 의해 생기기 시작한 새로 된 마을이어서 새터라고도 불렸다. 이 먹방이에서 30분가량 북으로 뒷산을 넘어 외진 곳에 순교자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무덤이 있었다. 이시영은 충남 연산에서 왔으며, 순교자의 동생이라고 했다. 그는 순교자의 미망인이라고 하는 백발의 고운 노인 형수와 같이 살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연산 이생원(連山李生員)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대구에서 이요안의 묘가 옮겨왔다.”는 짧은 글이, 드브레(Devred) 주교가 작성한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묘지 조사록」에 적혀 있다. 이윤일의 묘에 관한 유일한 문헌자료이다. 다행인 것은 이 무덤 조사 작업이 무덤이 옮겨진 뒤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한국천주교회가 병인 순교자 시복을 위한 예비조사를 시작한 것은 1876년부터이지만 그 사적은 1890년경 장드르(Le Gendre) 신부가 간행한 『치명일기』에서 알려졌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으로 끝났다면 결국 요한 성인의 묘가 날뫼에서 비산동으로 옮겨진 사실이 기록되지 못했을 텐데, 시복 재판과정에서 보완작업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하겠다. 물론 이름으로가 아니고 이요안이라는 본명으로 전해졌다.

 

지난날 먹방이 교우촌 사람들도 이 무덤을 순교자의 무덤으로 벌초하며 공경했다. 특히 복자성월 등에는 많은 이들이 참배했다. 그렇게 ‘대구에서 온 요안’이라는 이름이 전수되었다. 그리고 마을 어린이들도 자연스레 순교자묘에 대해 듣고 자랐다. 그중 한 명이 현 수원교구 주교대리인 최재용 신부였다. 1960년대 신학생이었던 그는 외조부 민달호로부터 먹방이 뒷산의 순교자 무덤의 주인공은 대구에서 순교한 사람이라는 말을 귀담아 듣게 되었다. 최신부의 외증조부 민치성이 그의 아들 민달호에게 한 증언이었다. 민치성은 1903년경 먹방이로 이사 왔다. 또 최재용 신부의 친가는 1904년경부터 먹방이로 옮겨와 살았다.

 

최신부 할머니 주마리아는 어느 때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이시영이 경상도로 순교자 유해를 모시러 간다고 나갔다가 약 한 달쯤 후에 유해를 섬에다 싸 짊어지고 돌아와 먹방이 뒷산에 묘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아마 이시영은 경부선 철도길이 대구 날뫼를 지나게 되어 순교자 이윤일의 무덤을 먹방이로 이전한 듯하다. 경부선은 1901년에 착공되어 1904년에 준공되었다. 먹방이 마을에서는 이 무덤을 순교자의 무덤으로 섬기며 고이 간직해 내려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증언을 통해서, 이 무덤의 주인공은 대구 날뫼(飛山)에서 온 이요한임이 밝혀졌다.

 

어려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신학생 최재용은 자연스레 이 무덤 주인공의 인생을 찾아다녔고, 후손들을 만나 경주이씨 백사공파(百沙公派)인 것도 알아냈다. 그리고 교회사 강의 리포트로 이 이야기를 묶었다. 이렇게 이시영은 죽고 그의 후손들은 흩어졌지만 순교자 요한의 이야기는 남아서 신학생 최재용은 그 궤적을 찾으면서 신부가 되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가 있음에도 먹방이 공소에 순교자 요한의 묘는 없었다. 수원교구가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연고 없는 순교자의 유해를 미리내 성지로 옮겨 모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의 유해는 1976년 6월 24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지로 모셔졌다. 먹방이에 있을 때에는 그래도 ‘이요안’의 묘였는데, 무명 순교자의 묘지로 옮겨지면서 묘주의 이름은 사라져갔다. 그렇게 세월이 좀 더 가면 문자 그대로 ‘무명 순교자’로 남을 뻔했다. 이는 성인께 대한 대접이 아니었다. 몇 사람의 꿈이나 느낌에 무명 순교자 묘로 들어간 이름 있는 순교자가 말하기 시작했다.

 

요한의 묘를 다시 찾은 동정녀 이영기 보나는 1983년 3월 12일 무명 순교자 묘 중에 복자분이 한 분 계시다고 알려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또 다행히도 먹방이의 구전은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를 안내하던 성지 안내 봉사자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안내자는 그 무명순교자 중에 한 분이 대구에서 온 요한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대구대교구는 수원교구 및 미리내 성지와 의논하여 1987년 1월 20일, 즉 순교 120주년을 기려 성인의 묘를 대구로 이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무명 순교자 18기의 묘에서 요한 성인의 유해를 찾는 일은 어려웠다. 더욱이 무덤을 열어보니, 성지 공식설명과는 달리 무덤은 17기뿐이었다. 따라서 성인의 관의 위치를 찾는 일이 중요했다. 이때, 이장을 참관했던 이영기가 자신의 노트를 보이며 무덤은 17기뿐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그에 의해 먹방이에서 온 요한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이영기는 평생 동정녀로 살면서 김대건 신부 부친 묘를 찾아 고우르술라 묘소 옆에 모시려고 했다. 이영기는 경기도 일대 무명 순교자 묘소를 찾아 다녔다. 그 뒤로 흩어져 있는 치명자 묘소를 찾아보고 미리내로 옮기는 일을 하게 됐다. 그는 이 경비를 각 성당으로 다니면서 모금했는데, 돈은 200원, 300원씩 모였다고 한다. 그렇게 평생 무명 순교자를 찾으며 산 사람이어서 그 복으로 그가 요한 성인의 묘를 찾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는 그가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순교한 120주년이 되는 날인 1987년 1월 21일에 대구대교구로 이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땅이 얼 것을 염려하여 결국 예정보다 한 달 전에 유해 봉송이 이루어졌다. 대구로 이장된 성인의 유해는 교구청 경당에 모셔졌다가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내 성모당에 안치하였고, 당시 교구장 이문희(바울로) 대주교는 이날 성인을 대구대교구 제2주보로 선포했다. 그리고 1년간 매일 한 시간씩 고해소를 열고 이듬해 관덕정 순교기념관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그러나 관덕정은 4년 후에나 지어졌고, 성인의 유해는 1991년 1월 20일 이문희 대주교의 주례로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 제대, 자신의 본적지로 돌아왔다.

 

이윤일 성인은 여러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여러 지역사람이 성인의 손을 쉽게 잡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피 흘려 혈제(血祭)를 지낸 곳을 다시 찾아 이렇게 124년 만에 돌아왔다.

100년이 넘는 여행을 끝낸 성인의 금의환향은 올곧은 그의 삶을 기리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인은 이제 대구 한복판 관덕정 순교성지에서 세계인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는 작은 한 손 한 손을 거쳐 여기에 왔고, 옳은 선택이 시간 앞에서 얼마나 찬란하게 이어지는지를 증거하고 있다. 백년이 지나도 억울할 것 같은 일을 당했다면, 이곳에서 요한 성인을 만나 볼 일이다.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