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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전례 & 미사

성삼일 전례 - 그에 관련된 몇 가지 가벼운 의문들

by 파스칼바이런 2013. 3. 13.

성삼일 전례 - 그에 관련된 몇 가지 가벼운 의문들

 

신호철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 교수 · 전례학 박사

(text versioin 1.01.004)

 

 

 

서언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언에서 비롯되며, 그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간 ‘빠스카’의 신비가 그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교 전례주년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부활에 대한 빠스카 신비를 각 시기별로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례주년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였던 주일 집회로부터 시작하여, 일년중 가장 큰 주일(주님 부활의 날)인 부활대축일 및 성탄대축일이 생겨났고 거기에 각각의 준비시기인 사순시기와 대림시기가 더해지면서 점차 확장되고 또 때로는 조절되기도 하면서 그 체계를 갖추어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전례주년의 핵심이, 주님의 빠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주님 부활의 날인 주일인 만큼, 일년 중 가장 큰 “주일”로서 주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을 직접적으로 기념하고 있는 성삼일은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전체 전례주년 안에서 단연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전례학자들은 전례주년의 다양한 시기를 ‘강한 시기’와 ‘약한 시기’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강한 시기’란 아주 성대하고 큰 축일로서 그 축일에 부여되어 있는 규정이나 관습들이 강한 규제력을 지니고 있으며 아주 특별한 때에 가끔 존재하기에 그 본래의 옛 모습이 오늘날 까지도 보존되어 오는 경우가 많다. 반면 ‘약한 시기’란 ‘강한 시기’가 아닌 일반적인 시기이며 신자들이 늘 이 시기의 전례를 거행하기에 많은 진화와 변형을 거치게 되어 그 옛모습이 사라지고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본래의 모습과 의미를 잘 간직하고 있을 법한 ‘강한 시기’가 오히려 신자들로부터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자주 거행하지 않고 일년에 한번 정도로 아주 드물게 거행하기에 그 의미와 신비를 충분히 접할만한 기회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한 시기 중에서도 강한 시기인 성삼일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이 글은, 아주 중요하면서도 오히려 낯선 이방인 같은 이 성삼일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비전문가적인 의문들에 대하여, 전례 상식 수준에서의 단편적인 답변을 주기 보다는 보다 전문적인 접근을 시도하여 근본적인 이해를 도모해 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물론 이 제한된 지면과 시간 안에 충분한 검토와 고찰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삼일을 둘러산 주요한 몇 가지 의문점들만을 선택하고 그 질문들을 통합적으로 다루면서 성삼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 필요한 토대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전개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이 글은 크게 다음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성삼일의 준비기간과 성삼일. 성삼일의 준비기간인 사순절에 대한 부분은 사순절이 왜 40일인가 라고 하는 아주 명료하고 지나치게 단순해 보이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하여 사순절의 기원과 발전을 살펴볼 것이다. 성삼일에 관하여서도 출발은 너무나 단순하고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의문이다: “무슨 무슨 날이 성삼일인가?”, 그래서 “어디까지가 사순절이고 어디서부터 성삼일인가?”, “성목요일은 무엇이고 주님만찬 저녁미사는 무엇인가?”, “주님만찬 저녁미사의 대영광송은 어떻게 불러야 하나?”, “부활 성야 미사는 몇 시부터 집전할 수 있나?” 등등.

 

그러나 이 단순하고 유치해 보이는 의문은 아주 기초적인 의문이며 그래서 중요하다. 이 기본적인 의문을 덮어두고 간과해 버릴 때는 혼란스러운 다른 의문들이 일어나며, 거기에 대한 단편적인 답변은 갈증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하나를 물어서는 충분한 답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I. 사순절(四旬節; Quadragesima) – 어떻게 해서 “사순”(四旬)인가?

 

“사순절”(四旬節; Quadragesima)의 일차적인 의미는 말뜻 그대로 “40일의 기간”이란 뜻으로, “재의 수요일부터 주님의 만찬 저녁 미사 전까지” 의 기간을 가리키며, 교회는 이 기간 동안 기도, 참회와 자선을 실천하며 ‘주님 수난과 부활의 빠스카 성삼일’을 준비한다.  하지만 재의 수요일부터 성목요일까지를 실제로 세어보면 40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순절의 ‘40일’이라는 것은 어디서 유래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자연히 생기게 된다.  여기서는, ‘40’이라는 숫자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사순절에 도입되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1. 성서에 나타나는 ‘수’(數)에 대한 관례적인 개념과 40의 의미

 

J. de Fraine과 P. Grelot은 성서에 나타나는 수의 “관례적 의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어림수” 또는 “근사치”가 쉽게 관례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2”라는 수는 “약간”(민수 9,22)을, “2배”는  “넘치는 풍요”(예레 16,18; 이사 40,2. 61,7; 즈카 9,12; 묵시 18,6)를 뜻할 때도 있다.  “3”이라는 수는 원주율(π)을 어림셈으로 표시한 것이며(1열왕 7,23), 어떤 동작이나 말을 세 번 되풀이 하는 것은 강조나 장엄을 의미하며 “최상급 중의 최상급” 을 표현한다.  “4”는 땅의 사방(에제 37,9; 이사 11,12)이나 에덴 동산의 4개의 개울(창세 2,10)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리적인 공간의 전체를 가리킨다.

 

“5”는 한 손의 손가락의 수이기도 하므로 일정한 전례적 규정의 기원이 될 수 있는, 기억하기에 편리한 숫자로 간주된다(민수 7,17.23.29).   “7”은 꽤 많은 수를 암시한다.   또한 “7”은 최상급의 의미도 지니고 있으니, 라멕은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을 받을 것이며(창세 4,24), 베드로는 일흔 일곱번 또는 일곱번씩 일흔번을 용서해 주도록 예수님으로부터 명을 받았다(마태 18,22).  “10”은 열 손가락을 가리키므로 기억하기에 편리한 숫자로 사용되었고 그래서 10계명(탈출 34,28; 신명 4,13)이나 에집트에서의 10가지 재앙(탈출 7,14-12,29) 등을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따라서 꽤 큰 수량을 의미할 수도 있다.   “12”는 일년의 음력달 수를 나타내는 수이며, 일년의 완전한 주기라고 하는 개념을 암시하고 있다.

 

“40”은 관례적으로 한 세대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광야에서의 40년 간의 체류(민수 14,24), 판관들에 의해 성취된 해방 이후에, 매번 이스라엘 찾아든 40년간의 평화(판관 3,11.30; 5,31 등), 다윗의 40년 간의 치세(2사무 5,4)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이 숫자에서는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꽤 오랜 기간이라는 관념이 나오는데, 40주야의 홍수(창세 7,4), 시나이 산에서 40주야 동안 모세가 체류하던 것(탈출 24,18)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40일 간의 여정(1열왕 19,8)이나 예수님의 40일 간의 단식(마태 4,2; 마르 1,13; 루카 4,2)은 이스라엘이 했었던 40년간의 광야생활을 상징적으로 되풀이 하는 것이다.

 

사순절이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의 시기라는 점에 착안한다면, 사순절의 “40”이라는 수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직전에 하셨던 단식의 기간과 직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졌던 40년간의 광야생활과도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그리스도교 전례주년에 있어서의 사순절과 그 40일의 기원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최초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졌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식사하였던 “주일”(主日; Dies Dominica)이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그 일 년 동안의 주일들 중 예수님의 부활 축일의 연례 기념일에 해당하는 축제일인 부활대축일이 생겨나게 되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대축일이 생겨나게 된다.  

또한 부활대축일과 그에 이어지는 부활시기를 준비하기 위한 사순시기가 생겨나게 되고 성탄대축일과 그에 이어지는 성탄시기를 준비하기 위한 대림시기가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일년의 전례주년이 구성되게 되는데 결국 전체 전례주년은 주님의 부활 사건이 드러내는 빠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주일”이 그 핵심이며 이 “주일”로부터 다른 모든 축제일과 전례시기가 연장되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전례주년은 주일이 담고 있는 빠스카 신비를 다양한 면모로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전례주년의 핵심인 주일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빠스카 성삼일은 성목요일 저녁 “주님의 만찬 저녁 미사”를 전야제로 하여 그 첫 날인 성금요일에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기념하며, 둘째 날인 성토요일에는 주님의 묻히심과 지옥문을 부수심을 기념하고, 셋째 날인 부활대축일은 부활성야로부터 시작하는데 바로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 성대한 최고의 축제일에는 그리스도교의 입문 예식인 세례성사가 있었고 이 입문성사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교회는 처음부터 단식으로 몸과 마음을 준비했었으니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에 했었던 단식이 바로 그것이었으며, 이것이 사실상, 부활대축일을 준비하는 기간인 사순절의 효시가 된다.  이것이 점차 확장되어 3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빠스카 축일 직전의 한 주간(즉 성주간)을 빠스카 준비기간으로서 단식하며 보내게 된다.

 

4세기 경에는 이 준비기간이 3주간으로 늘어나고, 4세기 후반에는 드디어 40일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게 되는데 그것은 성목요일에 있을 정화예식으로 죄를 용서받게 될 죄인들이 준비해야할 참회의 기간을 40일로 정하는 데에서 유래하며 이렇게 40일을 참회기간으로 정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 311) 규정” 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참회자들이 준수해야할 준비기간은 사순 제1주 주일로부터 시작하여 참회예식이 있는 성주간(= 사순 제6주간) 목요일까지의 40일이 되었고, 총 6주에 걸친 준비기간이 빠스카 축일 앞에 마련되게 된 것이다.

 

참회기간이 시작되는 사순 제1주일은 주일이므로 단식하는 날이 아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단식일은 수요일과 금요일이었으며 이 준비기간을 단식일로 시작하려고 함에 따라 5세기경부터는 사순 제1주일 직전 금요일과 수요일의 단식으로부터 사순절을 시작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사순 제1주일 직전 수요일에 참회자들에게 재를 뿌려주던 관습이 점차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산되게 된다.  

 

7세기경에 작성된 젤라시아노 성사집(Sacramentarium Gelasianum) 을 통하여 우리는, 참회자들이 재의 수요일 예식을 통하여 엄격한 “영적 피정”에 들어갔으며, 이 재의 수요일이 “사순절의 시작”(caput quadragesimae)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6세기를 지나면서 빠스카 준비기간은 7주간으로 확장되며 그 7주간이라는 준비기간의 시작이 되는, 사순 제1주일 앞의 주일은 “오순주일”(五旬主日; Quinquagesima) 라고 불리웠다.  7세기초에 들어서면서는 빠스카의 준비기간이 과도하게 확장되어 오순주일 이전의 주일인 “육순주일”(六旬主日; Sexagesima), 또 육순주일 한 주 이전의 주일인 “七旬主日”(칠순주일; Septuagesima)이라는 것까지 만들어게 된다.  

 

그러나 그후 교회는, 빠스카 준비기간의 지나친 확장으로 보여졌고 따라서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겼던 Quinquagesima, Sexagesima 및 Septuagesima를 폐지하게 되며, 그리하여 빠스카 준비기간은 6주간으로 재정비되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3. 요약

 

 “사순절”이란 전례주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빠스카 성삼일의 준비기간이며, 이 준비기간은 부활대축일 직전에 단식으로 준비했던 관습이 그 핵심이다.  이 단식이 점차 확장되어 4-5세기 경에 6주간으로 그 기간이 늘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참회자들이 사순 제1주일에 피정을 시작하여 정확히 40일이 되는 사순 제6주간 즉 성주간 목요일에 있었던 정화예식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주일은 단식하는 날이 아니었기에 사순 제1주일 직전 수요일에 참회자들에게 재를 뿌려주고 단식하던 것이 점차 확산됨에 따라 이 재의 수요일이 사순절의 시작으로 인식되게 된다.  후대에 이르러 이 준비기간은 더욱 과도하게 확장되기도 하였지만 교회는 그러한 과도한 확장을 폐기하였고 본래의 6주간의 준비기간을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한편, 성삼일의 준비기간인, 사순 제1주일부터 성목요일까지의 이 40일의 기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 시작 직전에 그 준비시기로서 광야에서 단식하며 보내셨던 40일간의 시기에 상징적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시련을 겪었던 40년의 세월과도 정서적으로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따라서 교회는 사순 제1주일 직전 수요일인 재의 수요일로부터 성삼일(금, 토, 일) 직전인 성목요일까지의 기간을 “사순절”이라는 준비기간으로 지내며 이 기간동안 참회와 기도 그리고 자선을 통하여 주님의 부활 축일을 합당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II. 성삼일(聖三日) – 성금요일, 성토요일 및 주님 부활대축일의 삼일

 

 

여기서는 성목요일 주님만찬 저녁미사, 특히 이 미사에서 너무나 흔히 오해를 받고 있는 대영광송과 그에 따르는 오르간 반주에 관해서 그리고 부활 성야 미사의 집전 시각에 대하여 다루어 보겠다. 이것은 결국, 신자들이 종종 질문해왔고 동시에 흔히들 오해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다: 성삼일이 더 큰 축일인가 아니면 부활대축일이 더 큰 축일인가?; 성목요일은 성삼일의 첫째날인가?; 그래서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이 성삼일인가?; 성삼일 동안 정말로 악기를 사용할 수 없는가?; 성목요일 주님만찬 저녁미사의 대영광송은 오르간 반주 없이 부르는, 그래서 슬픈 대영광송인가?; 부활 성야 미사의 집전은 몇 시부터 시작할 수 있는가?

 

 

1. 사순시기 및 성삼일의 악기사용

 

사순시기와 성삼일의 오르간 사용에 관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특정한 시기에 오르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관습이며, 이 공의회 이후로는 오르간의 단독 연주를 제외하고 반주로써 신자들의 성가를 도와주는 한 사용을 허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빠스카 성삼일 기간 중 오르간 사용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기에 앞서 교회의 전례(그리스도교 초세기부터 현재까지)에서 악기사용(그 도입, 허용 및 금지)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를 부족하나마 간략히라도 살펴보도록 한다.

 

1) 전례 내에서의 악기사용

 

A. 초세기부터 시작하여 오르간의 등장까지

 

초세기 교회는 그 교세의 열악함으로 말미암아 주변의 이교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많았고 그래서 이교적인 것을 배척하였다.  전례 중에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도 이것이 이교적인 것이라는 이유에서 완전히 금지되어 있었다(이교에서는 기타 등 수많은 다른 악기들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노래불렀다. 그 중에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음란하고 윤리적으로 퇴폐한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박해시기가 끝난 후 로마 황제가 교회를 지원해주고 교세가 신장됨에 따라 차츰 그러한 위기의식은 사라지게 되고 풍요로움과 종교생활의 여유 안에서 오히려 이교의 요소들 중 교회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편, 초세기 교회가 악기 사용을 금지했던 것은 아마도, 당시 박해의 상황 하에서 악기 소리를 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받거나 발각될 소지가 있음을 알고 그런 사태를 회피하려한 현명한 처신이었으리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처음부터 악기 사용을 금지해왔던 이유가 오직 이교로부터의 정체성 확립이나 박해 상황 하에서의 자기방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 교회 성음악 전통에 있어서 항상 기본적인 정신과 신학은 조화와 통일을 지향함으로써 천상의 신비와 우주의 조화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단성부, 단선율의 Unisonus 만을 허용하였다.  2 성부 이상만 되어도 조화와 통일이 무너진다고 여겼다.

 

그러나 단성부 단선율의 통일성을 도와준다면 그 주 선율을 도와주고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한도내에서 보조적인 다른 한 성부의 첨가를 허용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을 거쳐 주선율에 그 주선율을 살려주는 보조선율이 붙은 2성부의 곡이 나오게 되며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결국은 교회의 화려한 다성음악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다성음악은 그 성부가 아무리 많다고 하여도 오로지 주 텍스트와 그 텍스트의 선율을 살려주고 강조하는 데에 핵심이 있는 것이다.

 

로마 전례 안에서는 악기의 사용도 같은 맥락으로 허용되기에 이르는데  그것이 바로 파이프 오르간이다. 처음 오르간이 사용된 것은, 주선율을 도와주는 보조선율을 부를 사람이 없을 때 그 사람의 목소리를 오르간으로 대신 연주하면서 부터이다.  그 이후로 이 보조성부를 Organum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비잔틴 전례 같은 동방전례에서는 아직까지도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노래하는 교회의 오래된 성음악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어떻든 이렇게 하여 파이프 오르간은 교회의 전례음악에 사용된 것이며 주 선율과 가사를 돋보이게 하여 신자들의 찬송을 도와야 한다는 그 핵심적인 기능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B. 전례 내에서의 악기 허용

 

오늘날 미사중에 사용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허용된 악기는 여전히 파이프 오르간 뿐이며, 이 파이프 오르간은 교회의 전통적인 악기로서 크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3년 12월 4일에 발표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에서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악기들은 각국의 현지 상황을 고려하여 전례에 도움을 준다면 지역주교가 그 사용을 허락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전례헌장 120).

 

한편, 교회의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를 드러내고 그 신비의 은총 안으로 모든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교회의 공적인 예배행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전례 안에서 드러나는 이 그리스도의 신비는 신자들이 부르는 성가를 통해서 충만히 표현되며, 악기의 사용이 신자들이 부르는 성가를 도와주고 그 깊이를 더하여 신자들의 영혼을 천상 신비에로 들어 높여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전례 안에서 악기의 사용은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신자들이 부르는 성가가 오히려 필수일 것이다.) 하느님께 바치는 성가와 그분께 다다르려는 영혼을 도와주는 기능을 한다.

 

2) 사순절과 성삼일의 악기사용

 

이렇게 성가와 그를 도와주는 악기의 사용으로 표현되는 성음악은 전례주년에 따라 각 시기별로 다른 면모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맞게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전례시기의 정신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하여 어떤 때 화려하게 장식하고 꾸미는 것을 금지하거나 또 어떤 때는 예외적으로 허용하기도 했는데 악기의 사용도 그에 따르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인 1958년 9월 3일에 경신성사성이 발표한 “성음악과 거룩한 전례에 관한 지침”(“De Musica”, Instructio de Musica sacra et sacra Liturgia)의 80-85 항에서는 “악기의 연주가 금지되는 시기에 대하여”(De tempore quo instrumentorum musicorum sonus prohibetur)라는 소제목 아래에 악기(물론 여기에는 당연히 파이프 오르간도 포함된다.)를 사용하지 말아야 할 시기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 사순시기와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성주간(부활 성야의 대영광송 전까지)이 포함되어 있다.

 

81항

In omnibus ergo actionibus liturgicis, excepta tantum Benedictione eucharistica, sonus organi omniumque aliorum instrumentorum musicorum prohibetur:

 

[그러므로 (아래에 나열하는 기간 중에는), 성체축복만을 제외한 모든 전례행위 안에서 오르간과 다른 모든 악기들의 연주는 금지된다:]

 

(중략)

 

b) Tempore Quadragesimae et Passionis, id est a Matutino feriae quartae Cinerum usque ad hymnum Gloria in excelsis Deo in Missa solemni Vigiliae paschalis;

 

[사순과 수난의 시기, 즉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성야의 대영광송 이전까지;]

 

한편, 이 기간 중에도 특별히 악기의 사용이 허용되는 시기를 별도로 명시하고 있는데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아래와 같다.

 

83항

Pro diebus tamen temporibusque ut supra prohibitis, sequentes statuuntur exceptiones;

 

[위의 금지된 날과 시기에 있어서(81항) 아래의 예외들이 있다;]

 

(중략)

 

b) Organi tantum aut harmonii sonus permittitur in dominicis tertia Adventus et quarta Quadragesimae; necnon feria quinta infra Hebdomadam sanctam in Missa chrismatis, et ab initio Missae solemnis vespertinae in "Cena Domini" usque ad finem hymni Gloria in excelsis Deo;

 

[대림 제3주와 사순 제4주의 주일에, 그리고 주님의 만찬 저녁 미사의 시작부터 대영광송이 끝날 때까지 오르간 혹은 풍금의 연주가 허용된다;]

 

이상 1958년에 발표된 성음악 지침인 De Musica의 81항과 83항의 내용을 종합하여 전례 중 오르간 사용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관습을 재구성해 보면,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여 악기의 사용을 금지하다가 사순 제4주 주일에 허용이 되고 다시 사용이 금지되다가 성 목요일 주님의 만찬 저녁 미사의 시작부분부터 대영광송 끝까지 허용이 되며 이 대영광송이 끝나면 다시 사용이 금지되다가 부활성야의 대영광송에 이르러 사순시기 악기 사용의 금지가 완전히 해제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예외 규정을 고려한 사순절과 성주간 동안의 악기 사용 금지 규정의 실제적인 적용은 아래와 같다:

1.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여 사순제3주 토요일까지 종과 악기의 사용을 금지

2. 사순 제4주 주일에 허용

3. 사순 제4주 월요일부터 성 목요일 주님의 만찬 저녁미사 직전까지 금지

4. 성목요일 저녁미사의 입당부터 대영광송 끝까지 허용

5. 성목요일 저녁미사의 대영광송 다음부터 부활성야의 대영광송 직전까지 금지

6. 부활성야의 대영광송때부터 해제

 

이에 따라 1962년에 반포된 로마 미사경문에는 성 목요일 주님의 만찬 저녁 미사에 대한 Rubrica의 7항에 아래와 같이 명시하고 있다.

 

Altaris incensatione peracta, celebrans, lecta antiphona ad Introitum et 'Kyrie, eleison' recitato, incipit solemniter 'Gloria in excelsis', et pulsantur campanae et organum, quae, expleto hymno, silent usque ad Vigiliam paschalem.

 

[제대를 분향하고 나서 입당송을 읽고 자비송을 낭송하고 나면, 주례자가 대영광송을 장엄하게 시작하고 종들과 오르간을 울리는데, 대영광송이 끝나면 (종과 오르간은) 부활성야까지 울리지 않는다.]

 

즉 주님의 만찬 저녁 미사의 대영광송을 돕기 위하여 오르간이 사용되고, 이 대영광송을 특별히 장엄하게 부르기 위해 대영광송을 부르는 동안 종소리를 울렸으며, 그것이 끝나면 모든 대영광송의 기원이요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그래서 가장 장엄하다고 할 수 있는 부활성야의 대영광송을 부르기 전까지는 종과 악기의 사용을 금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금지규정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7년 3월 5일에 경신성사성이 발표한 “거룩한 전례 안에서의 음악에 관한 지침”(Intructio “de musica in sacra Liturgia” = Musicam sacram)에서는 사라지게 되며 그 66항에서 다음과 같은 지침만을 찾아 볼 수 있게 된다.

 

66항

Sonus autem eorundem instrumentorum, solus, non permittitur tempore Adventus, Quadragesimae, in Triduo sacro et in Officiis et Missis defunctorum.

 

[대림, 사순 시기, 그리고 성삼일 및 위령 성무일도와 위령 미사 중에는 이러한 악기들을 단독으로 연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사 전례를 시작 하기 전에 연주하는 오르간의 서주나 미사 후에 연주하는 후주 및 미사 중에 성가를 도와주지 않고 단독으로 연주하는 것을 금한 것이며, 이전에 오르간 사용이 금지되었던 특정한 시기라도 성가를 도와주기 위해 오르간을 사용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70년에 반포된 로마 미사경문 Editio typica (= MR1970)에서는 성 목요일 주님의 만찬 저녁미사의 Rubrica 제3항에 다음과 같이 약간의 수정을 가하고 있다.

 

3. Dicitur Gloria in excelsis. Dum cantatur hymnus, pulsantur campanae, eoque expleto, silent usque ad Vigiliam paschalem, nisi Conferentia Episcopalis vel Ordinarius, pro opportunitate, aliud statuerit.

 

3. 대영광송을 바친다.  대영광송을 노래하는 동안 종들을 올리는데, 대영광송이 끝나면, 주교회의 혹은 교구장이 편의상 달리 정하지 않는 한, 부활성야까지 [종들을] 울리지 않는다.

 

이 1970년의 지침은 1967년에 나온 경신성사성의 지침을 반영하고 있으며 개별교회의 상황을 참작하여 개방적이고 융통성있게 제시되었다.

 

결국, 사순시기 동안 (또한 대림시기에도) 오르간을 사용할 수 있으나 다만 특별히 허용된 날이 아닌 이상 단독 연주가 금지되며 오직 성가를 도와주고 성가를 부르는 신자들의 영혼을 충만한 천상 신비에로 들어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오르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성 목요일 주님의 만찬 저녁 미사와 부활성야의 대영광송을 부르는 동안 그 장엄함을 드러내기 위해 계속 종을 치며, 만찬 저녁미사의 대영광송이 끝나면 가장 장엄한 대영광송인 부활 성야의 대영광송 때까지 종을 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에 대한 금지조항도 주교회의와 교구 주교의 결정에 따라 달리 바뀔 수 있다.

 

2002년 3월에 새로 반포된 로마미사경문 제3판에서는 성목요일 대영광송 이후 악기 사용에 관한 지침에 있어서 이전의 미사경문에 나온 지침과는 달리 문구상으로 약간의 수정을 가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다.

 

<Rubrica의 비교>

 

(1) 1970년 미사경문(Editio typica = MR1970)

 

Dicitur Gloria in excelsis. Dum cantatur hymnus, pulsantur campanae, eoque expleto, silent usque ad Vigiliam paschalem, nisi Conferentia Episcopalis vel Ordinarius, pro opportunitate, aliud statuerit.

 

[대영광송을 바친다.  대영광송을 노래하는 동안 종들을 올리는데, 대영광송이 끝나면, 주교회의 혹은 교구장이 편의상 달리 정하지 않는 한, 부활성야까지 (종들을) 울리지 않는다.]

 

(2) 1975년 미사경문(Editio typica altera = MR1975) – MR1970의 지침과 동일함.

 

(3) 2002년 미사경문(Editio typica tertia = MR2002)

 

Dicitur ‘Gloria in excelsis’. Dum cantatur hymnus, pulsantur campanae, eoque expleto, silent usque ad ‘Gloria in excelsis’ Vigiliae paschalis, nisi Episcopus dioecesanus, pro opportunitate, aliud statuerit. Item, eodem tempore organum aliaque musica instrumenta adhiberi possunt tantummodo ad cantum sustentandum.

 

[대영광송을 바친다. 대영광송을 노래하는 동안 종들을 울리고, 대영광송이 끝나면, 교구 주교가 합당한 이유로 달리 정하지 않는 한, 부활성야의 대영광송 때까지 (종들을) 울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기간 동안 성가를 도와줄 목적인 한 오르간과 다른 악기들을 사용할 수 있다.]

 

<수정된 부분>

 

이상의 비교를 통해서, 새로 나온 2002년의 미사경문의 성 목요일 대영광송에 관한 지침에 있어서 수정된 부분은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1) 성 목요일 주님 만찬 저녁미사의 대영광송을 부르는 동안 종을 치고 대영광송이 끝난 이후부터 부활성야의 대영광송 때까지 종을 치지 못하는 규정에 대하여 달리 정할 수 있는 권한이 교구 주교(Episcopus dioecesanus)에게 있음을 명시하고 있으며, 주교 회의(Conferentia Episcopalis)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였다.  결국 교구 주교는 주교회의의 결정에 상관 없이 자신의 교구에 대하여, 적절할 경우 달리 정할 수 있는 것이다.

 

(2) 이 동일한 기간 동안에 오르간과 다른 악기들을 성가를 도와줄 목적인 한 사용할 수 있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 전문 성가대가 아닌 아마츄어로 구성된 일반 본당의 성가대와 신자들이 오르간의 도움 없이 성가를 부르기가 무척 힘들고 게다가 오늘날 신자들이 부르는 대부분의 성가가 합창곡 형식(Corale)의 수직화성으로 이루어진 곡으로서 오르간의 반주 없이 부르게 되면 오히려 어색해지는 실정을 감안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오르간 반주를 허용하였던 것이다. 다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기간 동안의 오르간의 단독 연주는 여전히 금지하고 있다. 더우기 오르간 연주가의 실력이 합당하다면 무반주로 부를 때보다도 올바른 오르간 반주를 동반하였을 때에 훨씬 전례의 성격이 돋보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황청 미사에서 노래부르는 전문 성가대도 사순절 및 성주간 모든 시기에 훌륭한 오르간 주자의 절제된 반주와 함께 노래하고 있다.

 

 

2. 성목요일 주님만찬 저녁미사의 대영광송

 

위에서의 간략한 검토를 통하여 성삼일 특히 성목요일 주님만찬 저녁미사 때의 오르간 사용에 관하여 알아 보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미사의 대영광송에 대하여 다루어 보자.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Gloria in excelsis Deo, et in terra pax hominibus bonae voluntatis):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인류구원사의 결정적인 순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며 환호하는 천사 군단의 찬미가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교회의 관습 대로 그 시작구(Incipit)를 따서 “Gloria in excelsis”(우리말로는 “대영광송”) 로 불리우는 찬미가로서 미사 중에 바치는 여러 전례음악 중에서도 특히 영광스럽고 화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성목요일 주님의 만찬 저녁 미사 때에 부르는 대영광송은 “수난의 대영광송” 혹은 “초상집 분위기로 부르는” 그래서 “악기의 반주도 없이 처량하고 슬프게 부르는” 대영광송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나라에서 종종 듣는다. 하지만 어떤 근거로 그렇게 이야기 하는지 그리고 그 근거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또한 교회의 전통 안에서 정말로 그렇게 해온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문이 없다. 교회는 그 기도하는 전통을 신학보다 앞에 위치시키며, 이 역사적 전통으로부터 신학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전통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그저 과거의 사실에 얽매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교회의 자아인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각 시대마다 역사적 성찰을 통하여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꾸준히 쇄신해온 덕분으로 교회는 그 오랜 세기의 역사를 지나면서도 그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휩쓸려 쓰러지지 않고 늘 스스로를 추스리며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 성목요일 대영광송을 올바로 인식하고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전통 안에서 어떻게 해왔는지를 충분히 알아본 후에 그 역사로부터 우리의 현재를 재인식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대영광송의 유래를 알아보고 오랜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이 대영광송이 변함없이 지녀왔던 참된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우리 한국천주교회에서 종종 잘못 이해되어왔던 성목요일 대영광송의 참 의미와 그것이 성삼일 전례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올바로 제시하고 이것을 합당하게 대하고 부를 줄 앎으로써 성삼일 전야제의 합당한 거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찬미가(Hymnus)

 

찬미가라는 형식은 원래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로마 사회에서 불리어지던 문학형식을 교회가 종교적으로 승화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므로 그리스도교의 전례성가인 찬미가를 알아보려면 먼저 그 기원인 로마인들의 찬미가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A. 초세기 로마의 찬미가

 

‘찬미가’에 해당하는 그리이스어 ‘ΥΜΝΟΣ는 그리스도교 외부의 문화에서는 시적인 합창곡(cantus coralis poeticus)으로서 밝고 힘차며 쾌활하고 내면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형식 및 언어로 이루어진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합창곡적인 특성은, 한 사람의 독창자에 의해서 불리어졌던 것이 아니라 군중이 한데 어울려 집단으로 노래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시가의 장르과 두드러진 대조를 보이게 되며, 이런 성질은 한 단체, 한 민족 혹은 한 국가가 그들의 공동선익과 공통된 이념을 집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인 표현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리하여 찬미가는 국가가 전쟁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는 국가의 강력한 힘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리는 국민의 노래가 되었고 위대한 영웅이 나타났을 때에는 그의 높은 덕을 칭송하는 노래로 불리워짐으로써 사회구성원 모두가 그 공덕을 본받아 그 사회의 공동선익을 위해 힘을 합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하였다.

 

※ 참고: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Gloria Patri et Filio et Spiritui Sancto ...)로 시작하는 노래는 그냥 “Gloria”(우리말로는 “영광송”)라고 부른다.

 

B. 그리스도교의 찬미가

 

이 동일한 “찬미가”(ΥΜΝΟΣ)라는 용어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그리고 초세기 그리스도교 전통 안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빈번히 사용되게 되었으나, “군중의 노래”라는 그 본질적 고유성만은 잃지 않았다. 반면에, 시민적인 연대의 분위기 안에서, 자신들의 유익을 도모하며 그것을 언제나 영웅적으로 지켜나가고 평화를 향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회중이 그들 자신을 반영하는 노래”라는 원래 의미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스라엘의 신정정치라는 문화적 요청으로 말미암아, 민중의 시가가 정향할 수 있었던 유일한 목적이요 종착점은 오직 야훼 하느님 뿐이었다.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도 일어났다. 복음 메쎄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지존하신 성부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그분의 이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오직 이 이름을 향하여서만 찬미가를 올릴 수 있었으며, 곧 이어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님” 또한 찬미가의 유일한 대상이 되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찬미가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님 그리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시는 성령의 삼위일체를 유일한 대상으로 삼게 되며, 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지극한 덕과 초월적 속성 그리고 특히 성자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및 부활로 극에 달하는 그분의 구원업적을 영광스럽고 영웅적으로 칭송하는 성대하고 극적인 찬미의 송가로서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자리잡게 된다.

 

2) 대영광송의 기원과 교회 전통

 

그리스도교의 찬미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단연 대영광송을 들 수 있으며, 그 시작부분의 가사가 드러내고 있듯이 그 기원은 주님의 강생 신비를 기념하는 성탄 대축일 미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A. 성탄대축일과 대영광송

 

미사에 도입되기 이전에 있었던 대영광송의 흔적은 Cursus monasticus celticus et gallicanus(고대 영국 및 프랑스 지역의 수도원에서 바치던 시간경)의 아침기도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그 시기는 대략 4세기 중반으로 추정한다. 우리 나라의 왕조실록 정도에 해당하는 교황 역사서인 Liber Pontificalis에는 제9대 교황 Telephorus(† 154)께서 성탄 밤미사를 제정하고 그와 함께 대영광송도 미사 중에 바치도록 규정했다고 전하지만 , 이것은 사실무근이라고 학자들이 판단한다. 이유는 2세기 경에는 아직 로마에 성탄 전례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볼 수 있는 확실한 문헌은 Leo Magnus 교황(† 461)이 성탄절 낮에 한 강론인데 거기서 대영광송을 암시하는 대목을 볼 수 있다:

 

Apud dominicorum praesules gregum hodie evangelii orandi forma

praecondita est, ut nos quoque cum coelestis militiae dicamus exercitu:

Gloria in excelsis Deo et in terra pax hominibus bonae voluntatis.

 

오늘 기도할 복음은 주님 제관들 무리[천사들]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는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도 천상 군단과 함께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 평화"를 외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성탄절에 대영광송을 낭송했던 관습의 초기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4세기 말엽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탄 밤의 장엄 시간경을 마치고 난 후 이어서 성탄 밤 미사를 거행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B. 부활성야의 대영광송에서 모든 주일 미사의 대영광송으로 – 오직 주교만!

 

다시 Liber Pontificalis를 보면, 제53대 교황 Symmachus(498-514)께서 대영광송을 모든 주일과 순교자 축일에 부르도록 확장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Symmachus 교황이 모든 주일로 대영광송을 확장한 이유에 대하여 직접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성탄 대축일 미사 중에 대영광송을 부르던 관습이 얼마 안가서 보다 중요한 최고의 축제일인 부활성야 미사에도 적용되었을 것이고, 그런 다음에, 교황께서, 부활 성야 미사의 원형이며 주님 수난과 부활이라는 동일한 빠스카 신비를 거행하는 모든 주일 미사에로 대영광송을 확장하셨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대영광송은 성탄 대축일 미사를 시작으로 하여 부활 대축일 미사에로 적용되고 거기에서 다시 모든 주일 미사와 순교자 축일 미사에로 확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교 집전 미사에만 허용되었었고 그레고리오 성사집의 Rubrica에는 이러한 규정이 명확이 언급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주교들이 천사의 모습을 닮았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이며, 그외의 다른 사제들은 오직 부활 대축일 미사를 집전할 때에만 대영광송을 부를 수 있었다.  또한 사제가 서품되고 나서 드리는 첫 미사에서 대영광송을 부를 수 있었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기(6-8 세기 경) 로마에서 대영광송을 부르는 관습이 상당히 엄격하고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제한된 모습 속에서, 대영광송이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 지를 차라리 더욱 잘 볼 수가 있다. 즉, 대영광송은 대단히 성대하고 영광스러우며 경사로운 날의 전례 거행이 아니면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과, 비록 그 시작은 성탄 대축일 미사였지만 그 이후의 전통을 통해서는 오히려 가장 큰 축일인 부활 대축일 미사가 대영광송 본연의 자리로 확정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부활 성야의 대영광송은 모든 대영광송들 중 가장 장엄한 것이며, 지역에 따라서 이 대영광송을 부르는 동안 그 기쁨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특별히 종을 쳤다. 부활 성야의 대영광송은 종소리를 울리는 동안에 부르는 것이 지역적인 교회의 전통이며 그 종소리와 함께 대영광송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이 온 세상에 퍼져나갔던 것이다.

 

C. 모든 사제들에게도 모든 주일 미사에 대영광송을

 

그러나, 모든 주일에 주교가 아닌 사제가 미사를 집전할 경우 대영광송을 부르지 못하게 한 이 규정을 합당하다고 받아들인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Reichenau의 Bernone(+ 1048)는 그의 책 “De quibusdam rebus ad missam ...”에서 사제들도 대영광송을 노래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로, 이 금지 규정이 오직 그레고리오 성사집에만 근거하고 있으며 대(大) Gregorius 교황은 그러한 금지 규정을 언급한 바 없고, 교황 Telephorus와 교황 Symmachus는 오히려 그 금지 규정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 이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되었던 간에, 이미 로마 밖에서는 차츰 사제들이 대영광송을 주일 미사 중에 노래했으며, 얼마 후에 로마 내에서도 이 금지 규정을 폐지하게 된다.

 

D. 대영광송을 부르지 않는 전례시기

 

1085년을 전후하여 쓰여진 Micrologo는, 이미, 대림절과 빠스카 축일 이전 7주간 그리고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축일에는, 사제, 주교를 막론하고 대영광송을 부르지 않는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참회와 속죄의 기간이며, 빠스카 준비의 7주간(오늘날은 6주간의 ‘사순절’) 역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참회하며 기도, 단식, 자선을 통하여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이므로 이 두 기간은 경사스럽게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대영광송이 어울리지 않는 시기이다.

 

특히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성야의 대영광송이전까지는 종과 악기의 사용도 금지하였다.  또한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축일에 그 어린이들의 집단 학살 앞에서 밝고 힘찬 대영광송을 부를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통하여서 전례가 얼마나 인간의 감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오늘날은 대림절과 사순절을 제외한 모든 주일과 대축일과 축일과 특수한 행사 때에 대영광송을 노래하고 있다.

 

이상의 언급들을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전례적 전통을 통해서 본 대영광송은 처음부터 환희와 영광의 노래였으며 매우 경사스럽고 기쁜 날에 삼위일체의 영광을 현양하며 바치는 성시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영광송은, 슬픔과 수난의 모습으로 빠스카 신비를 드러내는 전례시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므로 그러한 시기에는 대영광송을 부르지 않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며, 그러한 인간의 감성을 존중하고 잘 보호해 주는 것이 또한 인간적 감성의 성화를 통하여 빠스카의 구원 은총에로 다다르게 해주는 전례의 문화-인간학적이며, 바로 그래서 성사적인 측면이기도 하다.

 

E. 성목요일 ‘전야제’의 대영광송

 

a) 성목요일의 어디까지가 사순절 기간에 속하는가?

 

성목요일은 성주간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순절에 해당되는 시기다. 그런데도 이날 저녁미사에는 대영광송을 부르고 있다. 바로 이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사순절은 약 4-5세기경, 참회성사를 준비하는 죄인들이 40일 동안 참회기간을 가진 후 성목요일에 있었던 정화예식 중에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사순 제1주일부터 피정에 들어갔던 데에서 시작된 것이며 , 후에, 주일은 단식일이 아니었기에 사순절을 단식일로부터 시작하고자 그 직전 금요일 혹은 수요일에 시작하는 관습이 생기고 그 수요일에 재를 얹어주는 관습이 퍼져나가면서 재의 수요일이 사순절의 시작으로 정착되게 된 것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하여 성주간의 성월요일, 성화요일, 성수요일을 거쳐 성목요일 주님만찬 저녁미사 직전에 끝나며 이어서 성삼일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목요일 자체는 사순절의 마지막 날이 되지만 성목요일의 저녁미사는 사순절기간에 해당되지 않으며, 아주 독특한 위치에 있다.

 

b) 성삼일의 ‘삼일’은 어느 어느 날인가?

 

우리 나라의 많은 신자들이 성삼일을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의 삼일로 알고 있으며, 그래서 이런 질문도 한다: “성삼일이 더 큰 축일입니까, 아니면 부활대축일이 더 큰 축일입니까?” 그러나 성삼일은 성금요일, 성토요일, 부활대축일의 삼일이다. 그래서 이름도 “주님 수난과 부활의 빠스카 성삼일”이며, 그리스도교 전례주년의 핵심으로서 가장 높은 등급이 매겨져 있는 최고의 장엄 축제이다.

 

성삼일의 첫째 날인 성금요일은, 성목요일 주님의 만찬 저녁미사로 시작되며 주님의 수난(잡혀가심, 심문 당하심, 매맞으심, 가시관 쓰심 십자가 지심,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죽음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이다.

 

성삼일의 둘째 날인 성토요일은, 주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기념하고 저승까지 내려가셔서 지옥문을 부수시고 태초부터 그 동안 거기에 갖혀있었던 영혼들을 처음으로 해방하여 부활시키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 교회는 무덤에 묻히신 주님의 무덤 옆에서 그분의 안식을 묵상하며 함께 쉬기에 “전례가 없는 날”(dies aliturgica)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명명이다. 성토요일에도 “시간 전례”(Liturgia Horarum)는 있으며 ‘시간 전례’는 당연히 전례이다.

 

※ 시간 전례는 교회 전통 안에서 초세기부터 미사만큼이나 중요시 되어 온 것인 동시에 사제가 없을 경우 평신도끼리도 집전할 수 있는 전례이다. 바로 그래서 성찬의 전례가 빠진 채 말씀의 전례만으로 하는 “공소예절” 같은 불완전한 예식(전례가 아니다.)을 거행하는 것 보다는 그 시간에 맞게 시간 전례서에 나와 있는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의 시간 전례를 집전하는 것이 더욱 좋고 이것이 교회 전통으로 볼 때나 전례의 내용과 흐름 그 자체를 놓고 볼 때에도 더 좋고 올바른 것이다.

 

성삼일의 셋째 날은 부활성야 미사로부터 시작되는 부활대축일이다. 이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일년 전체의 전례주년이 매일 동일한 신비를 다른 모습으로 거행하면서 항상 정향하고 있는 빠스카 신비의 절정에 달하게 된다.

 

c) 성목요일

 

성목요일 그 자체는 성삼일에 속하지 않는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목요일에 가끔씩 성유를 축성했는데 그것은 부활성야 미사 때에 세례성사가 있었고 그때 쓸 기름이 떨어졌을 경우 4-5년에 한번씩 주교가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미사를 집전하여 성유를 축성했던 것이다. 최근에 와서, 성목요일 저녁 미사가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던 “최후의 만찬” 사건을 기념하고 있기에 성목요일을 사제직 탄생의 날로 연관짓고 성유축성미사 중에 “사제서약 갱신식”을 매년 하고 있다.

 

성목요일 저녁 만찬미사 중에 기념하는 “성체성사의 제정”은 그 성사를 집전할 성직의 탄생을 의미하는 동시에 주님께서 남겨주신 “사랑의 계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특수사제직만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보편사제직(자신의 희생을 통한 사랑으로써 이웃을 하느님께로 들어올려 구원의 은총을 받게 하는 일)도 함께 기념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제직(특수이든 보편이든)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봉사’와 떨어져서는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잃고 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근래에 들어 성목요일에 부여된 ‘교구 신부들의 생일’이라는 의미는 일단 부차적인 것이며, 굳이 나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것이 그날 저녁에 집전하는 주님만찬 저녁미사가 드러내어야 할, 서로간에 행하는 ‘사랑의 봉사’라는 본질적인 의미와 상징성을 가려버리지 않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d) 성삼일의 전야제

 

한편, 성목요일 저녁에 거행하는 주님의 만찬 저녁미사는 또 다른 의미에서 아주 특별하다. 그 미사가 바로 교회의 가장 큰 축제인 성삼일의 시작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성삼일은 최고의 축제일이기에 교회는 크나큰 축제일을 시작하면서 전야제를 가진다. 이 전야제가 바로 주님만찬 저녁미사의 입당(Introitum) 으로부터 대영광송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 입당(Introitum)은 말 그대로 모든 직무자들(주례자, 공동집전자, 부제, 복사, 독서자, 봉헌자 등등)이 합당한 전례복장을 갖추고 행렬(Processio)하여 성당 안으로 들어가 제단에 경의를 표하고 제단 위에 마련된 각자의 직무 위치로 이동하는 전례동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동서방을 막론하고 그리스도교 전례 전통에 있어서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부분에 속하는 것이며, 거룩한 장소인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이 행렬을 바라보는 신자들이 일상으로부터 전례 안의 성스러운 체험과 휴식으로 인도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시작 성가”의 ‘시작’이라는 말은 전례가 시작됨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지만 전례의 이 부분은 단순한 시작이 아니다. 따라서 그에 동반하는 성가도 “시작 성가”가 아니라 “입장 성가” 혹은 “입당 성가”가 올바를 것이다.

 

원래 입장 행렬에 동반하는 노래를 “입당송”(Cantus ad Introitum)이라고 하지만, Graduale Romanum에 실려있는 것을 일반 본당에서 부르기가 어렵고, 그래서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려고 내어놓은 Graduale Simplex의 입당송 또한, 그레고리오 성가에 익숙하지 않은 본당의 성가대에게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입당송이 모두 작곡되어 있는 실정도 아니므로, 각 본당에서는 입당송의 가사를 참고하여 성가집에서 그것 대신 부를 수 있는 곡을 하나 선택하는데 이것을 보통 “입당 성가”라고 한다. 그러므로 입당송 대신에 부를 입당 성가를 선곡할 때의 첫째 고려해야할 점은 그 곡이 입당송의 내용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가 아니면 적어도 입당송의 내용과 얼마나 잘 어울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J.M. JONCAS, “Canti” in Scientia Liturgica 3, Casale Monferrato 1998, 223-225 참조.)

 

※ 퇴장은 입장의 반대이다. 퇴장행렬 역시 교회 전례 전통의 원초적,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서 전례거행을 끝낸 주례자와 다른 모든 직무자가 제단에 경의를 표하고 성당을 빠져나오는 것이며 이것은 천상은총을 온 몸에 받은 신자들이 그 은총의 힘을 입은 채로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주례자와 다른 직무자들은 합당하게 행렬하여 성전을 빠져나옴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전례 중에 맛 본 빠스카 신비를 통하여 얻은 기쁨와 용기로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할 것이다. 역시 “마침”보다는 “퇴장” 혹은 “파견”이라는 말이 합당할 것이다. “시작”이나 “마침”이라는 말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너무 일반적인 것이어서 그에 해당하는 전례부분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면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견 성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마 전례는 사제의 강복 및 파견으로 끝이 나며 퇴장성가는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파견했으면 이미 파견된 것이고 이제 남은 것은 성당을 빠져나가는 전례행위만이 남게되는 것이다.(J.M. JONCAS, “Canti”, 257-260 참조.) 그러나 신자들의 정서상 “입장성가”를 했으면 “퇴장성가”를 해야만 진짜로 마친 것같고 “퇴장성가”를 부르지 않으면 뭔가 제대로 끝내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 같다. 게다가 때로 본당의 실정이 회중이 편안히 퇴장할 수 있도록 놓아두지도 않는다. 퇴장성가도 불러야 하고 그것이 끝나면 뭔가 모자라서 또 여러가지 지향의 기도와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기도 한다. 그러니 “퇴장 행렬”은 마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양 그 본래 의미와 가치가 전혀 고려되지 않게 되기 일쑤이다. 바람직한 모습은 “성당에서 빠져나와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래서 전례를 일상으로 연결시켜주는 퇴장예식”의 본질적인 면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직무자들과 신자들이 성당을 빠져나가는 동안 오르간의 후주나 성가대의 합창으로 그 전례동작을 도와주는 것이 좋아 보인다. 교황청의 미사 역시 퇴장성가가 없다. 교황님의 파견과 강복으로 모든 전례가 공식적으로 끝나고 교황님과 직무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퇴장하는 동안 오르간이 후주를 하여 그 행렬을 도와준다.

 

미사 직후의 기도는 퇴장행렬을 존중하여 특별하고 중대한 이유가 없다면 지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미사 중에 이미 충만히 기도를 하였고 영성체를 통하여 주님과 결합하는 절정에 이르렀으니 이제 그 은총을 간직한 채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달리 바랄 것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웬만한 공동체적인 지향의 기도는 미사 시작 예절의 인사에서 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고 또한 미사 중 "보편 지향 기도"에서 지향을 제시하여 미사 중에 함께 기도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미사 직후의 기도는 삼종기도할 시간이 되어 함께 기도하는 정도면 좋겠다.

 

바로 이 전야제에서 교회는 성삼일의 절정인 부활성야의 기쁨이 임박했음을 미리 알리고 맛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목요일 저녁의 대영광송이다. 부활성야의 대영광송이 모든 대영광송들 중 최고의 대영광송이라면 성목요일의 대영광송은 이 부활성야의 대영광송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그래서 이 대영광송을 부르는 방식은 부활성야의 대영광송을 부르는 것과 동일하다: 사제가 대영광송을 선창하면 성가대와 회중은 성대한 오르간 반주와 함께 대영광송을 부르기 시작하며 지역에 따라서는 그와 동시에 종소리를 온 세상에 울린다.

 

 이 대영광송이 끝나면 전야제가 끝나게 되고 본격적으로 성삼일의 첫날인 성금요일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에로 들어간다. 그래서 이 대영광송이 완전히 끝난 후부터 종과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가 다시금 엄숙과 절제와 참회의 정서로 들어가는 순간은 주례자가 대영광송을 선창한 직후 혹은 성대가와 신자들이 대영광송을 시작하기 직전이 아니라, 대영광송이 완전히 끝난 직후이다. 만일 대영광송을 슬프게 불러야 할 경우라면 교회는 대영광송을 부르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영광송은 교회의 전통을 통하여 항상 기쁨과 환희의 영광스럽고 경사스러운 노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 목요일의 대영광송은, 당연히, 성대한 오르간 반주와 함께 크나큰 기쁨의 정서로 온 회중이 함께 합창하며 이때 온 세상에 종을 울린다. 성목요일의 대영광송은 결코 슬픈 대영광송이거나 수난의 대영광송이 아니다. 그러한 대영광송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성목요일의 대영광송은 부활성야의 대영광송과 함께 가장 성대한 대영광송인 것이다. 때로 사제의 선창 직후에 잠시 오르간을 연주하며 종을 친 후에 “땅에서는 ...” 부분을 성대한 오르간 반주와 함께 부르기도 하지만, 사제의 선창 후에 바로 신자들이 “땅에서는 ...”을 노래하고 성대한 오르간 반주가 그에 동반하며 대영광송이 끝날 때까지 종소리를 울리는 것이 보통이다.

 

앞서도 보았듯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교회가 사순절기간과 성주간동안 대영광송과 악기 연주를 금지하면서도 다가오는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세 시기에는 예외규정을 적용하는데, (가) 대림 제3주일과 (나) 사순 제4주일 그리고 특히 (다) “성목요일 저녁미사의 입장에서부터 대영광송 끝까지”가 그것이며, 이러한 금지규정의 예외를 적용하는 것을 보아도 성목요일 저녁미사의 입장에서 대영광송까지가 성삼일의 전야제로서 “축제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요약 – 성목요일 대영광송의 의미와 그 성대함

 

이제 성목요일 대영광송에 관하여 지금까지 한 이야기의 요점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이 부분을 간추리고자 한다.

 

(1) 대영광송은 삼위일체의 영광을 드러내고 환호하는 기쁨의 찬미가이다.

(2) 전례시기 중 절제와 참회의 준비기간에는 대영광송을 부르지 않는다

(3) 성목요일의 입당에서 대영광송까지는 성삼일 축제의 기쁨을 미리 드러내는 축제의 성격을 지니며, 이 대영광송이 끝나면 주님 수난의 시작을 눈앞에 둔 참회와 엄숙의 정서로 들어간다.

(4) 따라서 성목요일 대영광송은 부활성야의 대영광송과 동일한 급의 성대함으로 부르며, 보통 끝날 때까지 종과 오르간 반주를 동반한다.

 

 

3. 부활성야(復活聖夜; Vigilia Paschalis), 그 거행의 시간은?

 

부활성야(復活聖夜; Vigilia paschalis) 는 전례주년 중 가장 큰 축제일인 성삼일의 절정이며 따라서 이 밤에 거행하는 미사는 모든 미사들 중의 미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로 ‘성야’(聖夜)라고 번역된 라틴어 ‘vigilia’(철야)는 ‘거룩한 밤’이라는 뜻이 아니라 깨어서 주변을 경계하며 밤을 지새우는 것을 가리키며 특히 그리스도교 전례 전통 안에서는 이 ‘철야’가 밤에 오실 주님을 깨어서 기다린다는 종말론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부활성야 미사는 특별히 그 집전하는 시각이 그 전례의 본질에 직결되어 있으며 그 신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부활성야 미사가 어떻게 기원하였으며, 이 철야 미사의 집전 시각이 교회 전통을 통하여 어떻게 변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1) 그리스도교의 ‘주일철야’(Vigilia dominicalis): 1-2 세기경

 

2세기 이전에는 부활성야 미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주일 집회 이전 날 밤에 있었던 철야 집회의 모습만을 볼 수 있으며, 이 철야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주일 집회 자체에 속하는 것이었다.

 

※ 일반적으로 부활대축일의 vigilia를 ‘성야’라고 옮기므로 이 글에서도 그대로 사용하지만 ‘깨어서 밤을 지새운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철야’라는 말도 함께 사용하겠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성야’와 ‘철야’는 모두 vigilia를 가리킨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주님이 곧 다시 오시며 종말이 즉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긴박함 속에서 생활하였고, 그들의 집회는 주일 전날 밤을 지새우며 이루어졌는데, 이때 신자들은 주님의 명에 따라 깨어서 기도하였다: “깨어 기도하라”(마태오 26,41). 왜냐하면 주님께서 “밤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시각이 언제인지 모르니 깨어있어라”(마태오 24,42).

 

한편, Tertullianus는 이 철야 집회를 병사가 보초를 서는 행위와 견주고 있다: “die stationis ... tubam angeli expectemus orantes”(보초를 서는 당직일에 기도하면서 천사의 나팔소리를 기다립시다).   사실 이 ‘vigilia’라는 말은 ‘야간경계 임무’를 뜻하는 군사용어에서 차용된 것이었고, 당시 군대에서 하룻밤은 4교대의 vigiliae(야간경계, 밤에 서는 보초)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렇듯,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시작되었던 철야집회는, 주님이 곧 오신다는 종말론적 긴박감 속에서, 실제로 오실 주님을 합당한 자세로 맞이하기 위해, 병사가 보초를 서듯이, 깨어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철야 집회는 주일 집회 전날 밤을 지새우며 이루어졌으며 주일 집회에 속하는 것이었다.

 

※ 토요일 다음 날 밤(nox post sabbatum)은 우리말의 용례에 따라 ‘토요일 다음 날 새벽’으로 옮겼다.

 

2) 부활성야의 철야(Vigilia Paschalis): 2-3 세기경

 

3세기 이후에는 비로소 부활성야의 철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처음부터 이 예식은, 매주 있었던 주일 철야와 외형적으로 다를 것이 없었으며 본질적으로도 동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Augustinus는 부활성야의 철야를 “모든 거룩한 철야들의 어머니”(mater omnium sanctarum vigiliarum)라고 칭하였다.  

 

이후 로마 예식은 불과 초의 예식 그리고 입문성사를 전체 철야 예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런 과정을 거쳐 부활성야의 철야는 다른 주일 철야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성격을 갖추어가게 된다.

 

3세기경의 문헌인 Didascalia의 시리아 본에는 부활성야의 철야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Congregati estote in unum et insomnes ac vigilantes totam noctem precantes ac orantes et legentes Prophetas et Evangelium et Psalmos cum timore ac tremore et diligenti supplicatione usque ad horam noctis post sabbatum tertiam, et tunc solvite ieiunium vestrum. (Didascalia, cap. V, 19,1)

 

한데 모여, 잠들지 말고 온 밤을 지새우며 간구하고 기도할 것이며, 토요일 다음 날 새벽  삼시가 될 때까지  예언서와 복음서 그리고 시편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청하며 읽으십시요.  그런 연후에 단식을 해제하십시요.

 

3세기 경의 문헌으로 추정되는 Traditio Apostolica에는 부활성야에 있을 세례식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 et sabbato, qui accipient baptismum congregabuntur in locum unum in voluntate episcopi. ... Et agent totam noctem vigilantes, et legetur eis et instruentur. ... Tempore quo gallus cantat, oretur primum super aquam. ...(Traditio Apostolica, 20-21.)

 

... 감독자[주교]의 뜻에 따라 토요일에 한곳에 모일 것이다. ... 그들은 밤 내내 깨어 있으면서 독서를 듣고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 수탉이 울 시간에 먼저 물에 기도할 것이다. ...

 

‘vigilia’라는 말 자체가 군사용어에서 나왔으며, 로마인들은 밤시간을 다음과 같이 4등분하여 교대로 야간보초에 임하였다.

I. prima vigilia        = 18시부터 21시까지

II. secunda vigilia     = 21시부터 24시까지

III. tertia vigilia     = 24시부터 03시까지

IV. quarta vigilia      = 03시부터 06시까지

그러므로 여기서 ‘삼시까지’(usque ad horam tertiam)라는 말은 ‘새벽 3시까지’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문헌을 통하여 3세기 경에 있었던 부활성야의 철야집회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이 집회는 해질 무렵 시작해서 이튿날 새벽 동틀 무렵까지 거의 온 밤을 지새우며  이루어졌었던, 말 그대로 “철야”였으며, 독서와 기도 그리고 입문성사 가 그 주된 내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부활성야 미사 집전 시각의 변천: 4-16세기

 

4세기 말엽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으로, 예수 그리스도 빠스카 사건을 종말론적인 시각에서보다는 역사화(storicizzazione )된 시각에서 바라보는 풍조가 만연해 갔고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부활하시는 그 사건들을 역사적인 순서에 따라 각각 구별되는 예식으로 기념하고자 함에 따라 부활성야 예식은 성금요일, 성토요일이 더해져서 성삼일로 확장되고 거기에 준비기간으로서 성주간 및 사순절이 생겨나고, 또한 부활대축일 이후의 부활시기 자체도 더욱 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 부활성야의 주된 내용이 독서, 세례성사 그리고 성체성사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이미 6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활성야 전례를 토요일 저녁 이른 시간으로 앞당겨 거행하려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현상은 그 후로 세기를 거듭하며 점점 더 명백해져 갔다.  부활성야 미사를 저녁에 일찍 끝내려고 했었던 이유로는 보통 두 가지 정도가 학자들 사이에 제시되고 있다:  1) 부활성야 미사 중에 집전했었던 세례성사 대상자로 어린이들도 있었고 이 어린이들이 잠들기 전에 세례성사를 집전하려는 목적으로, 그리고 2) 매우 엄격했었던 단식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풀려나고자 했었던 당시 신자들의 현실적인 바람 때문에 점차 철야를 회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는 첫 사료는 6 세기경 Joannes 부제의 편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부활성야 미사가 마치 성토요일에 속하는 것인양 간주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부활대축일을 위한 미사가 다시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후에 등장한 부활대축일 낮미사가 마치 부활대축일 본연의 미사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며, 성토요일에 속하는 것으로 보여졌던 부활성야 예식은 부활대축일과 분리되어서 점점 시간을 앞당겨 거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젤라시아노 성사집 에는 부활성야 미사 기도문인 “Orationes et praeces ad missam in nocte”(GeV 453-462)와 부활 대축일 두번째 미사 기도문인 “Dominicum Paschae”(GeV 463-467)을 나란히 이어서 싣고 있으며 둘 다 부활대축일에 속하는 것으로 정리해 놓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부활성야 미사는 공식적으로 여전히 성삼일의 삼일째에 해당하는 부활대축일 주일에 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젤라시아노 성사집의 Rubrica에는 8시(오늘날의 오후 2시)에 예식을 시작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Primitus enim viiia hora diei mediante procedunt ad ecclesiam et ingrediuntur in sacrario et induunt se uestimentis sicut mos est. Et incipit clerus laetania et procedit sacerdos de sacrario cum ordinibus sacris. Ueniunt ante altare ...

 

7-9 세기경의 단편적인 예규들을 집대성한 Ordines Romani에는 7시경(오늘날의 오후 1시경)에 예식을 시작한다는 규정을 찾아 볼 수 있다: Sabbato sancto, hora quasi VII, ingreditur clerus aeclesiam, nam domnus apostolicus non.

12세기경의 주교예식서라고 할 수 있는 Pontificale Romanum에는 더 앞당겨져서 5-6시(오늘날의 오전 11 및 정오)에 시작한다고 되어 있다: Hora autem quinta vel sexta, novus ignis, si non fuerit excussus in caena domini, iuxta morem quarumdam ecclesiarum, excutiatur hoc die extra ecclesiam de crystallo, vel etiam alio modo fiat.

 

한편, 1570년 로마미사경문을 통하여 비오 5세 교황은 정오를 지나서는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며 , 이로 인해 부활성야 미사가 심지어 3시(오늘날의 오전 9시)에로까지 앞당겨 집전되게 된다.  왜냐하면 1917년 교회법전에서 사순절이 성토요일 정오에 끝난다고 공식적으로 명시하였고, 부활성야 미사는 6세기경 요한 부제의 편지에서 언급되었던 이래로 부활대축일과는 별개의 그래서 사순절에 속하는 예식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20세기 중반 비오 12세의 빠스카 전례 개혁이 있기 전까지는 특별한 변동 사항을 찾아볼 수 없다.

 

4) 비오 12세의 빠스카 전례 개혁

 

1951년  비오 12세는 경신성사성의 교령을 통하여 부활성야의 철야를 복구하며, 그후 수년간 여러 문헌들을 발표함으로써 그 지침들을 보완하였고, 다시 1955년 과 1957년 에 걸쳐 경신성사성의 교령과 지침들을 통하여 성주간 전체를 새로이 정비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1951년의 “부활성야의 복구”(Instauratio Vigiliae paschalis)는 부활성야 미사의 집전 시각에 대하여 언급하며 그것을 본연의 모습으로 돌려놓고 있다.  

 

그 동안 부활대축일과 분리되어 있었던 부활성야를 “주님 수난과 부활의 빠스카 성삼일”(1. 성목요일 저녁의 전야 미사로 시작하는 성금요일 + 2. 성토요일 + 3. 부활성야로 시작하는 부활대축일)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축제로 통합함으로써 그 본연의 위치로 복원시켰던 것이다.  그 서문과 실제로 해당하는 규정을 그대로 인용한다:

 

[DAILS 2314] Dominicae Resurrectionis vigiliam, quam « matrem omnium sanctarum vigiliarum » s. Augustinus appellat (sermo 219, PL. 38, 1088), maxima solemnitate, inde ab antiquissimis temporibus, celebrare consuevit Ecclesia.

Huius vigiliae celebratio horis peragebatur nocturnis, quae Domini praecedunt Resurrectionem. Temporum vero decursu variisque de causis, eadem celebratio ad horas primum vespertinas, dein postmeridianas, denique ad matutinas sabbati sancti horas anteposita est, diversis simul inductis mutationibus, non sine originalis simbolismi detrimento.

Nostra autem aetate, succrescentibus de antiqua liturgia investigationibus, vivum obortum, ut paschalis praesertim vigilia ad primitivum splendorem revocaretur, originali eiusdem vigiliae instaurata sede, ad horas videlicet nocturnas, quae dominicam Resurrectionis antecedunt. Ad huiusmodi instaurationem suadendam, peculiaris quoque accedit ratio pastoralis, de fidelium scilicet concursu fovendo; etenim cum sabbati sancti dies, non amplius, ut olim, festivus habeatur, quamplurimi fideles horis matutinis sacro ritui interesse nequeunt.

[DAILS 2315] His itaque suffulti rationibus, multi locorum Ordinarii, fidelium coetus religiosique viri, supplices ad Sanctam Sedem detulerunt preces, ut ipsa restitutionem antiquae vigiliae paschalis ad horas nocturnas inter sabbatum sanctum et dominicam Resurrectionis indulgere vellet.

[DAILS 2316] Summus autem Pontifex Pius XII, has preces benigne excipiens, pro Sua in re tanti momenti cura et sollicitudine, quaestionem hanc peculiari demandavit virorum in re peritorum Commissioni, qui totam rem diligenti studio et examini subicerent.

[DAILS 2321] 1. Hora competenti, ea scilicet quae permittat incipere missam solemnem vigiliae paschalis circa mediam noctem, …

 

[DAILS 2314]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모든 성야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주님의 부활 성야를 교회는 관습에 따라 최고의 장엄함으로 거행해왔었다.

 

이 성야 예식의 집전은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직전의 밤시간에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이 예식의 집전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이유로 말미암아 저녁기도 전으로, 더 나아가 오후로, 심지어는 성토요일 오전에로까지 앞당겨졌으며, 그 고유한 상징성이 훼손되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오늘날 옛 전례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면서, 특별히 부활 성야가 그 본래의 광채를 회복하고, 그 성야 본래의 자리, 곧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직전의 밤시간에로 복귀하여야 한다는 열망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방식의 복원을 권고하는 것은 특별한 사목적 배려, 곧 신자들의 참여를 독려하여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요즈음 들어서는 상당수의 신자들이 아침 시간에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성토요일에는 더 이상 아무런 축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DAILS 2315] 이러한 이유로, 많은 지역 교구장들과 신자 단체들과 수도자들이 옛 부활 성야의 복원을 가납해 주실 것을 탄원하는 청을 성좌에 올렸다.

 

[DAILS 2316] 이에 비오 12세 교황 성하께서 이 간청을 기꺼히 받아들이시어, 수차례에 걸친 염려와 걱정 끝에 이 사안을 전문위원회에 위임하셨고, 위원회는 이 모든 사안에 대하여 성실한 연구와 조사로 응했다.

[DAILS 2321] 1. 자정 가까이에 부활성야의 장엄 미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고, 이 합당한 시간에 …

 

이 문헌에서는 부활성야 미사를 자정 가까이에 시작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이렇게 시작 시각을 복원해 놓은 이유는 두 가지다: 1) 깨어서 기도하고 주님을 기다리며 부활하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한다는 철야 미사의 고유한 상징성을 회복한다는 것과 2) 토요일 아침에 모든 신자들이 함께 모여서 장엄 예식을 거행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보다 많은 신자들이 예식에 참여하도록 독려한다는 사목적인 배려가 그것이다.

 

1952년에 다시 나온 “Celebratio instauratae Vigiliae Paschalis ad triennium prorogatur”(DAILS 2363-2443)에서는 하나의 항이 더 추가된다:

 

[DAILS 2372] 4. Si vero loci Ordinarius censeat, eiusdem vigiliae celebrationem, gravibus publicisque de causis, in quibusdam ecclesiis hora praescripta peragi non posse, facultas ei conceditur, ut, omnibus adiunctis mature perpensis, permittere queat in iisdem ecclesiis sacram celebrationem anticipandi, non autem ante horam octavam post meridiem.

 

[DAILS 2372] 4. 만일 지역 교구장이, 중대하고 공적인 사유로 인해 이렇게 규정된 시간에 집전하는 것이 그 교구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면, 모든 필요한 사안에 대하여 원숙하게 심사숙고하여 자신의 교구에서 거룩한 집전을 앞당기는 것을 허용할 수 있지만, 오후 8시 이전은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지역 교회의 사정에 따라 부득이할 경우 교구장이 집전 시각을 앞당길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오후 8시 이후에 예식을 시작하도록 제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두 개 항으로 늘어난 규정은 1957년에 나온 “Ordinationes et declarationes circa Ordinem Hebdomadae Sanctae instauratum”(DAILS 3027-3051)에서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다듬어 지게 된다:

 

[DAILS 3048] 19. – De hora celebrandae Vigiliae paschalis haec serventur:

Hora competentes ea est quae permittat Missam eiusdem Vigiliae incipere circa mediam noctem inter Sabbatum sanctum et dominicam Resurrectionis (Decretum generale diei 16 novembris 1955, n. 9).

Ubi tamen, ponderatis fidelium et locorum peculiaribus conditionibus, propter graves rationes ordinis publici et pastorali, de iudicio Ordinarii loci, horam celebrandae Vigiliae anticipari conveniat, haec inchoari non potest ante diei crepusculum, aut certe non ante solis occasum (cfr. Decretum generale diei 16 novembris 1955, n. 9).

Permissio autem horam Vigiliae paschalis anticipandi ab Ordinario loci dari non potest indistincte vel generaliter pro tota dioecesi aut regione, sed tantum pro iis ecclesiis vel locis, ubi vera urgeat necessitas; praestat insuper ut hora competens servetur in ipsa saltem ecclesia cathedrali et in omnibus aliis ecclesiis, praesertim religiosorum, ubi sine gravi incommodo id fieri potest.

 

[DAILS 3048] 19. – 준수해야 할 부활 성야의 집전 시각

성토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의 자정 가까이가 이 성야의 미사를 시작하기에 합당한 시각이다. 그러나 신자들과 해당 지역의 독특한 사정들을 심사숙고하여 공공질서와 사목상의 중대한 사유가있을 경우 지역 교구장의 결정에 따라 성야의 집전 시각을 앞당길 수 있지만, 동트기 전이나 일몰 전에 시작할 수는 없다.

교구장이 부활 성야의 집전 시각을 앞당길 수 있도록 하는 허용은 전체 교구나 지역에 대하여 불명확하게 혹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다만 절박한 필요성이 있는 지역이나 교구에 한하여 허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적어도 주교좌와 큰 불편함 없이 제 시각에 거행할 수 있는 다른 모든 성당들, 특히 수도원에서는 합당한 시각이 준수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헌에서는 중대한 지역적 사정에 처한 교구장의 심사숙고에 의한 예외 규정에 있어서 일몰 후부터 동트기 전까지로 그 허용 범위를 제한하고 있으며, 적어도 주교좌 성당과 별 어려움 없이 제 시각에 전례를 거행할 수 있는 다른 모든 성당에 대하여서는 자정 가까이에 부활 성야 미사를 시작하도록 하는 원칙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비오 12세의 부활성야 시작 시각의 복원에 있어서, 그것을 본래의 상징성을 되살리기 위해 밤시간에로 복귀하였다는 점은 납득이 가지만 그 시각이 왜 하필 꼭 자정가까이여야만 하는지에 대하여는 뚜렷한 전례신학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주일 철야나 부활 철야는 온 밤을 지새우며 이루어 졌던 것이며, 반면에 자정이라는 특정 시각에 우위를 부여할만한 어떤 근거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 1969년에 나온 “Calendarium Romanum”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21. Vigilia paschalis, nocte sancta qua Dominus resurrexit, habetur ut « mater omnium sanctarum Vigiliarum », in qua Ecclesia Christi resurrectionem vigilando exspectat, eamque in sacramentis celebrat. Ergo tota huius sacrae Vigiliae celebratio nocte peragi debet, ita ut vel incipiatur post initium noctis vel finiatur ante diei dominicae diluculum.

 

21. 부활 성야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거룩한 밤으로서 “모든 성야들의 어머니”로 간주되었으며, 이때 교회는 깨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고 그 신비를 성사로 집전한다.  그러므로 이 성야의 모든 거행은 밤에 이루어져야 하며, 그래서 밤이 시작된 후에 시작하고 주일 동이 트기 전에 끝마친다.

 

이 문헌에서는 1957년 규정에 명시되었던 기본원칙인 “자정가까이”(circa mediam noctem)라는 “합당한 시각”(hora competens)에 대한 언급이 없어지며, 오히려 예외 규정을 위한 허용 범위였던 “해떨어진 이후부터 주일 동트기 전까지”가 기본원칙으로 제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부활 성야의 고유한 상징성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진 밤”이며 따라서 밤시간(해 진 후부터 해뜨기 이전) 전체가 부활 성야 예식을 위한 합당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야간 집전”(celebratio nocturna)이라는 상징성에 대하여는 A. Bergamini가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부활 성야의 기본적인 상징성은 “비추어진 밤”(nox illuminata), 아니 “낮에 의해 정복되어진 밤”(nox victa a die)이라는 점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은총의 생명이 터져나온다는 표상을 통하여 드러난다.  이 때문에, 성야는, 그것이 부활 성야인 한, 그 본성상 야간(nocturna) 예식이다.  어두움에서 빛으로의 통과, 밤에서 낮으로의 통과는 그 살아 움직이는 상징성과 함께 그 어떠한 추상적인 개념화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존재하는 빠스카 신비의 실재를 드러내고 있다.

 

이 1969년 로마 전례력의 규정은 그 이후에 그대로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 요약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종말론적 긴박감 속에서 주일 전날 밤에 함께 모여 밤새도록 성서를 읽고 기도하며 밤에 오실 주님을 깨어 맞이하려 하였다. 이러한 주일 철야(vigilia dominicalis)는 그대로 부활 철야(vigilia paschalis)로 이어지며 사실상 부활 철야는 처음에 주일 철야와 동일한 것이었기에 성 아우구스티노는 부활 철야를 “모든 철야들의 어머니”(mater omnium sanctarum vigiliarum)라고 불렀다.  주일 철야와 부활 철야는 이렇게 처음부터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기도하며 온 밤을 지새우는 야간 예식이었으며 따라서 그 집전 시각이 이 예식의 본질적 상징성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부활 성야 예식을 성토요일저녁의 보다 이른 시간으로 앞당겨 거행하려는 경향이 나타났고 특히 6 세기 이후 부활성야 미사를 부활대축일과 분리된 별개의 미사로서 성토요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부터 세기를 거듭하며 부활성야 미사의 집전 시간은 더욱 더 앞당겨 지게 되었으며, 결국 1570년 비오 5세 미사경문이 반포된 이후로는 사순절에 속한다고 보았던 부활성야 예식을 사순절이 끝나는 시점이라고 보았던 성토요일 정오 이후에는 집전할 수 없도록 금지함으로써 부활 성야 예식을 성토요일 아침 9시에 거행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부활대축일에 속하는 부활성야 예식을 따로 분리하여 사순절에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로 인해 야간 예식을 저녁에 혹은 오후에 심지어는 아침에까지 거행하다 보니 부활 성야 예식은 그 본질적인 상징성이 훼손되어 갔고, 이에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1951년부터 1957년까지의 빠스카 전례 개혁을 통하여 성목요일 저녁의 전야제로부터 시작하는 성금요일, 성토요일 그리고 부활성야 미사로 시작하는 부활대축일의 삼일을 “주님 수난과 부활의 빠스카 성삼일”이라는 단일한 축제로 통합하고, 부활성야 미사를 부활대축일과 결합하면서 그 합당한 집전 시각을 자정 가까이라고 확정함으로써 이 야간 전례의 본질을 복원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 1969년에 반포된 로마 전례력은 부활 성야 미사 집전 시각의 기본적인 원칙을 “해가 지고난 이후부터 주일 동트기 전”으로 최종적으로 확정하여, 이 야간 예식의 본질적인 상징성을 회복하였으며 이 규정은 2002년에 반포된 로마미사경문 제3판 에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맺음말

 

지금까지 성삼일과 그 준비기간인 사순절을 둘러싼 주요한 의문들 중에서 선택된 몇 가지를 다루어 보았다. 굳이 여기서 결론이라는 것을 쓸 필요는 없으며, 대신 각 항목의 마지막 부분이 결론 대신 간략한 “요약”을 해 두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리라고 본다. 다만 이 글을 마치면서 두 가지 걱정이 생긴다.

 

우선, 차칫 이 글이 과거의 역사에 너무 치우친 듯한 인상을 주지 않을까 우려한다. 하지만 역사는 거기에 얽메이기 위하여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가를 올바로 알기 위해서 계속하여 이행하는 자아반성이며 이를 통해서 올바른 방향을 잡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교회는 그 기도하는 전통을 신학보다 앞에 위치시키며, 이 역사적 전통으로부터 신학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전통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그저 과거의 사실에 얽매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교회의 자아인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각 시대마다 역사적 성찰을 통하여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꾸준히 쇄신해온 덕분으로 교회는 그 오랜 세기의 역사를 지나면서도 그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휩쓸려 쓰러지지 않고 늘 스스로를 추스리며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본문 중에서)

 

우리가 전례 안에서 무언가를 올바로 인식하고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전통 안에서 어떻게 해왔는지를 충분히 알아본 후에 그 역사로부터 우리의 현재를 재인식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혹시나 이 글이, 전례란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공부하여 알아서 올바로 수행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줄까 우려한다. 전례는 학교가 아니다. 전례는 그 안에서 인간이 신앙의 은총을 받는 것이며, 이 은총은 인간의 감각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열리고 성화됨으로써 인간에게 감지되고 그렇게 느낌으로써 전달되며 그렇게 전달되기에 인간은 초월적인 힘을 얻고 신성한 기쁨에 넘치며 삶에 대한 용기와 의미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은총의 전달은 언제나 올바른 인식과의 변증법적인 상관관계 안에서 일어난다. 다음의 라틴어 속담을 제시하면서 이 급하고 불충분한 글을 마무리한다:

 

Eo magis amat quo magis intellegit, eo magit intellegit quo magis amat.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잘 알게 되고,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