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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전례 & 미사

주님의 날 / 정의철 [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3. 3. 14.

[특 집] 새 천년의 십계명: 제3계명-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주님의 날

정의철 [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신부]

 

 

서 론

Ⅰ . 주일에 대한 명칭

Ⅱ . 주일의 전례 거행에 대한 초기 증언과 역사

Ⅲ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오늘날의 주일

Ⅳ . 주일에 대한 사목적 고찰

결 론

 

서 론

 

주일은 “주님의 날”(묵시1,10)이다. 주일은 그 기원으로 보나, 교회의 전통으로 보나 또는 주일이 지니는 신학적 의의에서 보거나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중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대의 제반 여건들은 주일의 성화에 적지 않은 저해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즉, 물질주의의 만연과 가치관의 변화 등으로 인하여 일반적으로 종교심이 약화되었고 산업 사회의 발달에 따른 결과로 경제 성장과 생산성 제고를 위한 주일 노동 교대제로 주일의 의미가 크게 감소되고 있다.

 

또한, 주말의 유흥 내지 관광 등도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데 저해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일의 의의와 중요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주일 신학에 대한 인식의 재정립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이 소논단에서는 주일에 대한 명칭, 주일에 대한 성서와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 주일에 대한 역사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주일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보면서 주일 신학과 주일의 의의와 중요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Ⅰ. 주일에 대한 명칭

 

1. 주간 첫째 날

 

주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명칭은 “주간 첫째 날”(참조: 1코린 16,2; 사도 20,6~11; 마르 16,2)이지만 이 명칭은 교부시대 이후에는 주일에 대한 전문적인 명칭으로 더 이상 보존되지 않는다. 주간의 날들을 계산하는 이 방법은 이미 빛과 어둠을 구별하는 창조의 첫째 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빛의 날과 관련해서 바오로 사도는 2고린 5,17에서 '새로운 창조'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니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 주간 첫째 날에 “…모든 이를 비추고 있는”(요한 1,9) 새로운 빛이 솟아올랐다.

 

2. 주님의 날(주일)

 

그리스도교적 명칭인 “주일”(domenica. kyriake hemera)이라는 이 명칭은 묵시록 1,10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로마 전례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었다. 특별히 이 명칭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는 날을 다루고 있다. “주님의 날”이라고 부르게 된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자 집회의 중심이요 핵심으로서 이날 거행된 ‘주님의 만찬’(kyriakon deipnon)이라는 가장 오랜 표현의 영향을 들 수 있다; 희랍어 ‘kyriakos’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묵시 1,10 외에 단지 1코린 11,20에서 만 성찬과 관련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님의 만찬이라는 이 두 관계는 주일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생명이 솟아올랐다”라는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날로 성격이 규정되고 있다. 이처럼 내용이 풍부한 이 명칭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dies dominica’라는 라틴어를 통해 오늘날까지 신 라틴어 권에서 domenica(이태리어), dimanche(불어), domingo(스페인어)로 유지되었다.

 

3. 여드렛날

 

오늘날 드물게 사용하고 있는 명칭이지만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유래한 것은 “여드렛날”이다. 6일 동안 창조사업을 하신 후, 그리고 하느님께서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2,3)고 한 안식일 후 그 다음날인 부활 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여드렛날이었다. 그날은 새로운 시작과 가장 위대한 창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 명칭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언은 바르나바의 편지 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 신자들은 여드렛날에 축제를 지낸다고 언급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 생명이지만 또한 영원한 생명을 다시 주고자 어떤 첫날은 이처럼 제 8일이 되곤 하였다.”

 

‘여드렛날’이라는 이 명칭은 후대에 사용되지 않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시 새롭게 사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 그 기원을 둔 사도시대의 전통을 따라 교회는 여드렛(여덟째)날마다 파스카 신비를 경축한다.”

 

4. 부활날(파스카날)

 

다른 명칭으로 ‘부활날’(파스카날)이 있는데, 이것은 3세기초 처음으로 테르툴리아노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명칭은 희랍의 여러 저술가들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주일이 주간 파스카로서 나타나도록 하고 있다. 특히 비잔틴 교회와 연관된 이 명칭은 주일과 주님의 파스카 사이의 연관성을 뚜렷이 보여주는 이점이 있다. 다른 전례들에 비해서 비잔틴 전례가 각 주일의 파스카적 특성을 더 뚜렷이 보존하였다는 점에서 이 명칭이 낯선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이런 의미가 슬라브 언어권의 러시아어에서 주일을 가리키기 위한 용어로 남아 있다(worsresnje).

 

5. 태양의 날

 

2세기 중엽 후에 희랍 로마 태양계 주간에서는 ‘태양의 날’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으며, 후대에 이 명칭은 특히 독어권과 영어권에 적용 되었다(sonntag, zontag, sunday).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태양계 주간이 확산되기 전에 그리스도를“정의의 태양”(말라 3,20), “세상의 빛”(요한 8,12; 9,5; 12,46), “이방민족들을 비추는 빛”(루카 2,32), “사람들의 빛”(요한 1,4), “모든 이를 비추는 참된 빛”(요한 1,9)으로서 알고 있었다. 빛과 태양에 대한 이런 상징주의는 “태양의 날”이라는 이름을 굳게 하였다. 같은 시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상징적인 묘사 안에서, 태양 공경에 대한 의식과 함께 널리 퍼진 이교인의 종교와 대치하여 주일을 지내게 되었다. 태양의 상징주의는 사실상 주간 첫째 날에 빛의 기원을 두었던 창조 기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에서 암시되었다.

 

‘태양의 날’이란 명칭의 단정은 희랍 로마 세계뿐만 아니라 점차적으로 그리스도교 저술(저서) 안에서 나타났다. 순교자 유스티노는 이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4세기 중엽경에 성 예로니모는 이날에 고전적인 그리스도교 해석을 하고 있다.

 

“주님의 날, 부활의 날, 그리스도인들의 날인 이날은 우리의 날이다. 그래서 주일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날에 승리하신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올라가셨기 때문이다. 이교인들에 의해 ‘태양의 날’이라고 불렸지만 오늘날 세상의 빛, 정의의 태양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태양의 날’이라는 명칭에 동의한다.”

 

주일에 대한 교회의 공식 명칭은 오늘날까지 위에 언급한 여러 명칭 가운데 무엇보다도 “주일”(domenica)이라는 명칭을 더 선호하고 있다.

 

 

Ⅱ. 주일의 전례 거행에 대한 초기 증언과 역사

 

1. 신약성서

 

신약성서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어 주일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가지 언급을 하고 있으며 초기 3세기 교부들의 주일 신학에 있어 그 토대를 이루고 있다.

 

1)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에 대한 기사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기사에서 4복음서들은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주간 첫째 날에 부활하시고 제자들과 여인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전하고 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해가 뜨자 그들은 무덤에 가면서…”(마르 16, 2; 마태 28,1; 참조: 루카 24,1; 요한 20,1).

 

이렇게 언급하는 것 외에 복음은 그날에(같은 날) 일어난 것으로 부활 후의 예수님의 발현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루카 24,13: 엠마우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남. 말씀 식사의 구조), 혹은 안식일 다음인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요한 20,19: 죄의 용서를 위해 성령의 선물을 내포하고 있는 파스카 발현). 그 밖에, 제자들이 “여드레 후에” 집안에 함께 모여 기다리고 있는 요한 복음사가의 증언에서 찾아 볼 수 있다(요한 20,26: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을 회상시키는 발현, 집회 주님의 현존 수난과 부활의 증명 형식). 이런 발현 기사들은 이 특별한 날에 모인 공동 집회의 사실과 함께 주일 역사에 대해 중요한 증언이 되고 있다.

 

2) 신약성서의 다른 증언들

1코린 16,2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주간 첫째 날’에 각자는 형편이 닿는 대로 저축할 수 있는 것을 따로 놓아두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주간 첫째 날”에 각자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일에 전례 거행을 위한 확실한 증언은 아니지만 주일이 애덕의 큰일을 완성하기 위해 있다는 특별히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 특별한 날에 코린토 신자들의 정규적인 집회가 있었을 것이지만 이 본문에서는 그것을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또한 사도 20,7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트로아스에서의 행적과 더불어 “주간 첫째 날” 행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날의 행사는 그 환경(다락방, 수많은 등불)이나 내용(대화, 빵의 나눔, 대화)으로 보아 주일의 성찬이었음이 확실하다. 묵시 1,10에서는 “주님의 날”에 있었던 현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본문 역시 아무런 배경설명 없이 왜 “주님의 날”이라는 명칭을 썼는지, 또 그날과 현시와는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거의 동시대의 디다케(14,1)에서 증언하는 주일의 성찬과 연결시켜 볼 때 1세기 말경에는 주일이 이미 정기적인 성찬 집회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11)

 

이와 같이 신약성서가 여러 차례 주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주간의 그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날,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 공동체에 나타나신 날, 적어도 바오로 사도의 어느 공동체가 빵을 나누기 위해 서로 모이고 특별히 예루살렘 모교회에 대한 애덕을 기억하던 날, 예언적 현시를 받던 날.

 

성서상의 주일에 대한 이러한 언급에서 우리는 이미 2세기 초에 시작된 주일 신학의 발전을 위한 그 핵심을 찾아 볼 수 있다.

 

2. 교부들의 초기 전승

 

1)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교부들의 초기 전승은 신약성서 안에서 발견되는 주일에 대한 규정들을 더 명백히 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아마도 가장 오래된 전승은 디다케(90∼100)일 것이다. 디다케에서 “주님의 주일”에 전례적인 집회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 그러나 그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 자기 동료와 더불어 분쟁거리를 가진 이는, 그들이 화해할 때까지는, 여러분의 제사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모임에 함께하지 말아야 합니다.”

 

2) 디다스칼리아(Didascalia: 사도들의 훈육)

시리아 예식에 대해 잘 나타내 주는 문헌으로 3세기 중엽의 디다스 칼리아(Didascalia)가 있는데, 여기에서도 디다케와 같이 주일 집회의 중요성이 바로 그 집회에 참여하기 전에 회개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러분은 의견 차이를 없애고 주일을 위해 서로 대립되는 부분들을 화해하시오.”

 

그리고 집회를 그리스도 자체로 여기고 있다: 공동 전례에 참여하면서 그리스도 신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천상 음식으로 살찌워진다.

또한, 주간 첫째 날에 기쁨 안에서 모든 것을 보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3)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Ad Magn., 9,1에서 안식일의 폐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옛 규정을 따라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주일은 그리스도 신자들을 구분하는 표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새로운 희망에로 불려 주님의 날의 계명 안에 살며, 그날에 우리 생활이 특성지워지는 것이다.”

 

4)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플리니오(Plinius)의 편지

주일에 신자들의 집회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상세히 전해 주는 이교인의 자료가 있는데, 이 자료는 비티니아(Bitinia)의 총독인 플리니 오(Plinius)가 트라얀 황제에게 112년에 보낸 편지로서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체포된 그리스도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의 죄는 정해진 날 동트기 전 마치 신에게 하듯 그리스도에게 찬송을 드리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플리니오가 말하는 “정해진 날”이란 주일을 가리킴이 틀림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가(성찬기도가 아닐까?)를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집회(모임)가 새벽에 있었으며, 그 밖에 저녁 집회가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는데 이것이 단순히 형제적인 아가페(Agape)인지 또는 성찬례 자체인지 정확히 제시해 주지 않고 있다.

 

5) 테르툴리아노

3세기에 북아프리카의 상황에 대해서는 테르툴리아노와 치프리아노가 증언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노는 주일이 그리스도교 예식의 중심 이고, 그날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예식을 거행하는 가운데 성화되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날 자기의 일을 중단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일은 기쁨으로 특징지어진 날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6) 치프리아노

치프리아노는 주일과 안식일과의 명확한 구분을 하기 위해서 주일에 대해 초기의 많은 교부들이 이룬 시도 가운데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치프리아노는 “여드렛날”이라는 표현의 신약성서의 전승을 사용 하면서 부활 사건으로 성화된 주일을 언급하고 있다.

 

7) 바르나바의 편지

2세기에 바르나바의 편지는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상황을 전하면서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거행하는 차원에서 여드렛날의 특성을 묘사하는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현재의 안식일이 아니라 내가 행했던 그날로서 이날 모든 것을 안식에도 이끈 다음 제8일을, 다시 말해 새 세상이 시작된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발현하신 다음 하늘에 오르셨던 제8일에 즐거운 축제를 지내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8)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3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창세 1,3~5에 나오는 것처럼 첫째 날이 빛의 창조의 날이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면서 주일 신학을 발전시켰다. 모든 사물이 첫째 날에 이루어진 빛의 창조 안에서 조명되어야 하는 것처럼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이루는 모든 사물들은 이제 성령의 빛 안에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지혜의 빛과 자유로운 천상 의식(인식)으로 숙고된다.

 

9) 오리게네스

오리게네스는 우리의 성화와 구원을 실현시키는 것은 “여드렛날”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 밖에도, 주일 거행은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는 구원 선물에 대한 기념 이라고 하고 있다: 안식일에 한번 만나가 내렸던 것이 그치고 이제는 여드렛날(첫째 날)에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마지막에 오셨으며 그분의 말씀과 빵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오고 있다. 또한 영성적인 형상(양식) 안에서 그 같은 말씀과 천상 만나를 매주일 우리에게 아끼지 않고 주고 계신다.

 

10) 유스티노

그리스도교 초기 시대 동안, 로마에서의 주일에 대한 주요한 증언은 유스티노와 히폴리토의 증언들이다. 유스티노는 이미 2세기 중엽에 그의 저서에서 주일을 “태양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주일전례의 주요 노선에 대해 밝히고 있다.

 

“태양의 날이라 불리는 날 도시 또는 시골에 사는 우리 모두는 같은 장소에 모인다. 사도들의 비망록 또는 예언들을 읽는다…. 우리는 태양의 날에 언제나 모인다. 이날은 하느님이 어둠으로부터 질료를 끌어내어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 날이자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스티노는 유다 그리스도교 용어인 “첫째 날”과 “여드렛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날의 중요성을 예수님의 부활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또한 주일은 세상의 창조를 기념하는 첫째 날 일뿐만 아니라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날이다.

 

11) 히폴리토

히폴리토는 입문 성사가 주일에 거행되었으며,29) 또한 정규적으로 성찬례가 거행되었다30)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히폴리토가 증언하는 가운데 현저하게 주요한 사실은 새로 선발되는 주교는 주일에 서품되어야 한다31)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교부들의 증언을 통해 볼 때 주일에 대한 초기 교회의 여러 가지 풍부한 행동의 양상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a) 그리스도교 집회의 날(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유스티노, 테르툴리아노),

b) 이 집회에 서로 모일 수 있는 이유는 적어도 이날이 자유로운 시간을 가진 날이기 때문이다(테르툴리아노, Didascalia).

c) 창조의 첫째 날을 기념하는 날(유스티노, 클레멘스), 새로운 창조의 첫째 날, 즉 부활일(바르나바, 유스티노, 테르툴리아노, 치프리아노, 오리게네스), 그리고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성령강림일(히폴리토).

d)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의 날(유스티노, 클레멘스, 히폴리토).

e)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날(유스티노, 오리게네스, Didascalia), 성찬례를 위한 날(디다케, 유스티노, 플리니오, 히폴리토, 오리게네스, Didascalia).

f) 주교서품을 위한 날(히폴리토).

g) 화해를 위한 날(디다케, didascalia),

h)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기쁨의 날(바르나바, 테르툴리아노, Didascalia).32)

 

3. 4세기 이후의 발전 역사

주일 전례 거행의 역사 안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은 콘스탄틴 대제가 321년 3월 3일 공포한 첫 번째 법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법은 주일을 “공경하올 태양의 날”로 정하고 이날 모든 유다인들과 도시민들과 노동자들에게 휴식의 날로 선포하고 있다:

 

“모든 법관과 백성은 공경하올 태양의 날에 쉬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계절의 변화 때문에 농사일은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두 번째 법(321년 7월 30일)은 부연하기를, 종들에게 자유를 주기에 합당한 태양의 날에 소송과 불화를 일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로마제국 교회에 중요한 발전을 의미하는 이런 법률들로 주일의 전례 거행은 본질적으로 촉진되었으며 동시에 사회적인 일들과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위안을 위한 공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즉시 주일을 태만히 하고 남용하는 위험성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시리아의 에프렘(Efrem)은 부활 성야의 한 강론에서 그 위험성을 경고 하였다:

 

“…휴식의 날인 주일에 우리는 다른 날 보다 더 죄를 짓고 있다. 농촌의 일을 중단하고 노동을 중단하는 동안에 우리는 상업과 가사일에 자주 참여 하므로 번민(고통)의 일에 열중하고 있다….”

 

계속되는 발전 속에서 콘스탄틴의 법은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이 항상 주일 성화의 중심에 오도록 하였다. 주일에 육체노동을 하는 것은 국가법이나 교회법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항상 엄격한 방법들을 추구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의 작품이라고 왜곡된 4 세기의 한 콥틱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혼에 유익한 일들과 동물을 보호하는 일을 제외하고 거룩한 주일에 다른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은 저주받는다.”

 

오를레앙(Orleans) 공의회(538)는 주일을 유다 안식일 법과 분리하고 무엇보다도 형벌(처벌)의 위협 하에 농촌의 모든 노동을 금지하고 있다:

 

“…좀더 쉽게 교회에 가기 위하여, 그리고 기도의 은혜에 전념할 수 있기 위해서.”

 

또한 나르본(Narbonne) 공의회(589)는 주일에 어떠한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강한 벌을 가하고 있다:

 

“누구든지 주일에 감히 돈거래를 하면 자유인인 경우 도시의 재판관에게 금화 여섯을 지불하고, 노예인 경우 100대의 채찍을 맞아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인해 주일이 구약 안식일 법의 연장이라는 인상이 더욱더 굳어졌다.

 

스콜라 학파는 확실히 주일을 유다 안식일과 구분하고 있으며, 즐거운 주일 전례와 함께 노동의 금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스콜라 학파 이후에는 주일에 대한 의미를 노동 금지라는 차원에 중점을 두었기에 주일 신학의 그리스도론적 의미가 흐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중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유다 안식일 법에 근거를 두고 육체노동을 금하는 사례가 잦아져 많은 교회가 그 위험성을 경고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세기에 이르러 서방 교회는 주일을 신약 시대의 안식일로 간주하고 휴식 규정을 날로 강화하여 15세기 중엽부터는 육체 노동을 하거나, 주일미사를 궐하면 대죄를 짓는다고 가르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실제로 서방 교회가 주일미사 의무를 공법으로 공포한 것은 1917년인데, 1917년의 교회법(CIC) 1248조 에서 간결한 문장과 함께 주일에 대한 의무를 가중시키고 있다:

 

“모든 의무축일들(의무축일들 가운데 1247조 1에 따르면 주일이 포함되어 있다)에 미사에 참석해야 한다.”

 

이렇게 주일이 중세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안식일, 노동 금지일로서의 특성이 강화됨에 따라 성서와 초기 교부들이 언급하고 있는 부활 기념일로서의 원초적인 의미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염려하여 비오 10세, 비오 12세, 요한 23세 등 금세기의 교황들은 주일의 본 의미와 전례 행사의 가치를 복구시키려고 노력하였다.

 

 

Ⅲ.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오늘날의 주일

 

주일 거행에 있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파스카 신비 거행으로서의 주일의 의미를 명백히 부각시켰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 그 기원을 둔 사도시대의 전통을 따라, 그리스도의 성 교회는 여덟째 날마다 파스카 신비를 경축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이날을 합당하게도 주의 날 혹은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날에 신자들은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 예수의 수난과 부활과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주일은 근원적인 축일이니, 신자들의 신심을 일깨워 주어 이날이 또한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강조되도록 해야 한다. 참으로 극히 중요한 것이 아니면, 다른 축제를 이와 대치하지 말 것이니, 주일은 전례주년 전체의 기초요 핵심이다.”

 

사실상 전례헌장 106항은 신약성서와 초기 교부들이 주일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다시 회상케 하며 주일 신학의 총체를 이룬다고 하겠다: 사도 시대의 전통, 그리스도의 부활 기념(거행), 여덟 번째 날, 주님의 날, 태양의 날, 세례의 기념, 말씀과 성찬을 위한 모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원초적인 주일 신학으로 환원하여 주일은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주님의 기쁜 날임을 분명히 하면서 주일 거행 안에서 그리스도교 집회(모임)(in unum convenire), 하느님 말씀을 들음(verbum Dei audientes)과 성찬례 거행 (eucharistiam participantes)이 중심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영광을 기념하여 하느님께 감사하여야 하는 파스카 신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 전례헌장 은 파스카 신비40) 거행의 관점에서 주일은 전례주년 전체의 기초요, 핵심(fundamentum et nucleus totius anni liturgici)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원초적인 주일 신학의 풍부한 전례적 완성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개혁에서 나오게 된 독서집 (미사전례성서)과 미사경 본 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주년의 매 주일을 위해서 1969년 독서집 에서는 구약의 많은 구절처럼 거의 모든 신약성서를 듣도록 하기 위한 방법에서, 3년 주기의 독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성찬례 안에서 말씀 전례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설교가 주일 신학과 거행에 있어 중심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1970년의 새 미사경본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구성에서보다 옛 전통에서 이끌어 내고 있는 풍부한 기도 양식인 것이다: 새 감사송(주일에 대한 8개의 감사송)과 새 성찬기도문(성찬기도 Ⅲ은 특히 주일을 위해 적용된 것으로 언급되었다).

 

주일을 위해 구성된 8개의 감사송은 여러 세대를 통한 주일 신학에 있어 중요한 성격의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창조(감사송 5),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에 넘치는 찬미(감사송 1,5,8), 파스카 신비의 입문을 통한 우리의 새로운 창조(감사송 1), 천상에서의 복된 생활의 여드렛 날과 영원한 날(감사송 4,7), 그리스도 안에 모인 신자들의 일치로의 불림(감사송 1,3), 성령의 선물(감사송 6,8), 삼위일체에 대한 기념(감사송 8), 또는 단순히 파스카 신비 자체와 예수님에 의해 실현된 위대한 구원 업적에 대한 묵상(감사송 8개가 모두 포함되지만, 특히 감사송 2,3,4,7).43)

 

그러므로 우리는 1년의 전체 과정 동안 주일에 관해 규정된 독서와 감사송들을 잘 묵상한다면 주일 신학의 총체적인 의미를 잘 이해하여 보다 더 주일을 거룩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Ⅳ. 주일에 대한 사목적 고찰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그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과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주님의 날”을 기념하면서 주님의 현존을 강하게 체험하였다. 이는 주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신자들에게 깨우쳐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해야 할 것이며, 또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그러했듯이 공동체의 모임은 ‘일치’가 전제되어야 하겠다.

 

교회(Ecclesia)라는 명칭 자체가 그러했듯이 일치를 위해(그리스도와 신자들 상호간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주일미사의 봉헌도 단지 물질적인 봉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봉헌도 뒤따라야 하겠다. 그리고 주일 휴식에 대하여서는,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주일 의식이 세상에 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듯이, 오늘날에도 주일 휴식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즐거운 휴식이라는 의식이 고취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주일의 휴식은 단순한 예배적 차원을 넘어서 복음을 묵상하고 영신적 생활의 진보와 말씀의 선포, 그리고 애덕(이웃사랑)의 실천과도 함께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결 론

 

앞에서 주일에 대한 성서와 교부들의 증언 또한 제2차 바티칸의 정신을 보았을 때 분명 주일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 근원적이며 핵심이 되는 날이다. 왜냐하면 이날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며, 그로 인해 우리들을 재생케 하셨고, 산 희망을 가지게 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를 통해 볼 때 파스카 신비 거행이라는 초기 때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주일의 의미가 어느 시대에서는 유다 안식일법과 관련하여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의미로 이해되었던 때도 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서와 교부들의 증언을 토대로 주일의 올바른 의미를 재정립하고, 이날 우리 신자들이 어떠한 자세로 지내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날에 신자들은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 예수의 수난과 부활과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주일은 근원적인 축일이니, 신자들의 신심을 일깨워 주어, 이 날이 또한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강조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일 성화는 성찬례(미사)에 참여하고, 그리스도교적 기쁨과 형제적 사랑으로 가득 찬 휴식을 취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일을 단순히 쉬거나 즐기는 차원을 넘어 경건한 하루, 영성적으로 자신을 돌이켜 보는 하루, 영원을 향한 자기 삶의 지표를 재확인하는 하루, 자신과 가정이 함께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하루가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